131화 오랜만이야
강현은 팔을 타고 내려온 토리를 보자 정신이 들었다.
이렇게 한가하게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서둘러서 짐을 정리한 후에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올라가는 도중 방송을 듣고 마을 회관으로 올라가는 이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왔어?”
“예, 안녕하세요.”
“너무 안 와서 이사 간 줄 알았잖아.”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이들.
그들과 인사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마을 회관에 도착해 있었다.
마을 회관에 있던 이장의 눈이 번뜩였다.
매가 사냥감을 발견했을 때, 저런 눈빛일까.
“방송한 지가 언젠데 이제 오는 거여!”
이장의 호통에 반가움이 묻어났다. 웃음을 흘린 강현이 입을 열려는 찰나, 먼저 나온 이가 있었다.
짝.
익숙한 소리와 함께 이장이 몸을 비틀었다.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지. 그걸 못 참아?”
“아니, 그걸 누가 몰러? 반가워서 그렇지, 반가워서.”
이장이 뒤를 보며 눈을 흘겼다.
그러나 박씨 할머니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강현은 그런 둘을 향해 다가갔다.
“예. 잘 지내셨어요?”
“나야 잘 지내지. 이 양반도 마찬가지고.”
“김치 보내 주신 건 잘 먹었어요.”
강현의 말에 박씨 할머니의 눈이 커졌다.
“으응? 집에 없었다며. 어떻게 알았어?”
“모를 리가 없죠.”
박씨 할머니뿐만이 아니었다. 나물이나 다른 음식들도 대충 짐작이 갔다.
이미 마을 사람들의 손맛은 익숙했다.
강현의 미소에 박씨 할머니가 눈을 껌뻑였다.
“역시 테레비에 나오는 요리사는 다른가? 신통하네.”
“그럼! 다른 요리사들하곤 다르지!”
이장의 외침에 박씨 할머니가 눈을 흘겼다.
그때,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우린 보이지도 않나 보군.”
“어쩔 수 있나. 외지인 아닌가.”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강현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정기훈 작가와 이정환이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외지인이라니, 그딴 소릴 누가 하나? 다 가족이나 마찬가진데!”
박씨 할머니였다. 박씨 할머니의 호통에 둘이 움찔거렸다.
“허험. 우리가 실언했소.”
정기훈 작가와 이정환이 황급히 사과했다.
반가움에 강현을 놀리려다가 이 자리에 강현만 있는 게 아니란 걸 깜빡한 것이었다.
박씨 할머니가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둘을 노려보았다.
“다시는 그런 말들 하지 말아.”
박씨 할머니의 경고에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반응을 본 박씨 할머니가 강현을 돌아보았다.
“잘 돌아왔어. 편히 쉬어.”
“예.”
강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할머니들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박씨 할머니의 눈치를 보던 이장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하여튼, 저 여편네 성질은 어째 점점 심해지는지 몰러.”
그 이야기가 들렸는지 걸어가던 박씨 할머니가 몸을 돌렸다.
그러자 딴청 피는 이장.
박씨 할머니는 이장을 힐끗거리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에 정기훈 작가와 이정환이 웃음을 터트렸다.
강현 역시 웃음을 흘렸다.
세계적인 거장들을 주눅이 들게 하다니, 대단한 일이었다.
“황대길 선생님은요?”
“서울에 일하러 갔네.”
“방송국에서 또 불렀다더군.”
둘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정 프로그램은 하차했지만, 그래도 방송을 접은 건 아니었다.
“그 양반도 그쯤 했으면 좀 쉬어도 될 텐데. 욕심이 많아.”
“그만큼 열정이 넘치는 것이지.”
둘의 감정은 복잡해 보였다.
은퇴하긴 했으나, 비슷한 나이의 황대길이 아직 활동하는 걸 보니 부러운 감정이 올라온 것이었다.
강현은 그런 둘의 기분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확실히 대단하신 분이지.’
둘이 대단하지 않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황대길이 이상한 것이었다. 이미 정상에 올랐음에도 열정은 젊은이들 못지않았다.
그때, 강현을 바라보던 정기훈 작가가 입꼬리를 올렸다.
“자네,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군.”
“예?”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었다.
정기훈 작가뿐만 아니라 이정환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은 사람을 성장시키는 법이지.”
둘이 흐뭇한 표정으로 강현을 바라보았다.
괜히 낯이 가려워진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그러던 강현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설기와 옆에서 얌전히 앉아 있는 토리.
둘이 저런 반응을 보일 상황은 하나뿐이었다.
“저….”
“그래, 우리가 너무 붙잡고 있었군. 가서 인사하게.”
강현이 입을 떼자 할 말을 알아챘는지 정기훈 작가와 이정환이 길을 피해 줬다.
“…난 대화 못 했는데?”
“이따 이야기하면 되네.”
뒤에서 이장의 허망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강현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역시나 설기와 토리의 앞에는 아기가 있었다.
하은이였다.
강현을 보자 방긋 웃는 하은이.
강현도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고개를 들었다.
“나오셨어요?”
“예, 강현 씨가 왔다는데 나와야죠.”
수진이 강현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강현도 반가움에 고개를 끄덕이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먼저 출발한 민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 그이라면 옆 마을로 고기 사러 갔어요.”
강현이 탄성을 뱉었다.
심부름 간 것이었다.
“저기 오네요.”
수진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돌렸다. 마을 회관 입구에 차가 멈췄다.
양손에 짐을 한가득 들고 있는 민호.
강현과 눈이 마주친 민호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차에서 나온 건 민호뿐만이 아니었다.
아저씨 두 분도 함께였다. 그들도 민호처럼 짐이 가득했다.
사람들이 달라붙자 금세 상이 차려졌다.
“주인공도 왔고, 고기도 왔으니 시작할까? 아직 안 온 사람 있으면 손들어 봐. 없지?”
이장이 주변을 돌아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당연히 이 자리에 없는 이들이 손을 들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곧 이장이 앉아 있는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뭣들 혀? 어서 잔 안 돌리고.”
이장의 말에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리고는 술잔을 따랐다.
* * *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강현은 머리를 흔들었다.
전날 술자리가 늦게까지 벌어진 것이었다.
농사철이 아니라서 아침 일찍 일할 필요도 없으니, 다들 마음 놓고 즐긴 것이었다.
강현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곤히 자는 설기와 토리.
아직 일어날 시간이 아니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강현이 기지개를 켰다.
그것만으로 숙취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강현의 눈이 반짝였다.
이제 매장을 열 때가 되었다.
설렘.
그동안 요리를 못한 건 아니었지만, 매장에서 하는 것과 달랐다.
빨리 팬을 잡고 싶어서 손끝이 간지러웠다.
* * *
해가 떴음에도 마을은 조용했다.
어제의 후유증이 남은 것이었다. 강현은 굳게 닫힌 문을 보며 볼을 긁적였다.
‘예정보다 일찍 열긴 했는데….’
벌써 점심이 끝나 가고 있었다.
강현의 시선이 주방 테이블로 향했다. 혼자 들뜬 나머지 평소보다 많이 준비했다.
“…다 설기 밥이 되겠네.”
강현의 혼잣말에 설기의 귀가 쫑긋 솟았다.
반짝이는 눈동자.
꼬리 역시 살랑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꼬리가 멈췄다.
밖을 보더니 다시 머리를 쿠션 위에 올리는 설기.
강현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멀리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곧 차가 매장 앞에 멈춰 섰다.
딸랑.
방울 소리와 함께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동생! 오랜만이야.”
환하게 웃고 있는 이는 장만기였다. 그의 뒤로 곽도현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삼촌.”
장만기는 그런 곽도현의 등을 쳐서 앞으로 나오게 했다.
“이 녀석이 동생이 오는 걸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예?”
눈을 껌뻑인 강현이 곽도현을 보았다.
그러자 쑥스러운지 뒷머리를 긁적이는 곽도현.
장만기의 턱짓에 곽도현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봉투에 담긴 서신이었다.
“저, 이거요.”
강현은 의아해하면서 서신을 꺼냈다.
그리고 곧 강현의 눈이 커졌다.
강현이 서신과 곽도현을 번갈아 보자 곽도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합격했어요.”
“축하해. 정말 고생했어.”
서신의 정체는 입학 허가서였다.
강현이 웃으며 곽도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강현은 곽도현이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기 때문에 진심으로 축하해 줬다.
곽도현은 어색하면서도 강현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자기 입으로 말하고 싶다고 얼마나 단속시키던지.”
“삼촌!”
장만기의 말에 곽도현이 눈을 흘겼다.
그런 둘을 보며 강현이 미소 지었다.
어제 수진을 만났음에도 알려 주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그럼 제대로 축하해 줘야지. 먹고 싶은 거 있어?”
강현의 말에 곽도현의 눈이 커졌다.
슬쩍 장만기를 바라보는 곽도현.
혹시나 민폐가 아닐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런 곽도현의 기색을 알아챘는지 장만기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마음껏 골라. 이런 기회 잘 없다?”
장만기의 말에 강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곽도현이 수줍게 입을 열었다.
“그럼, 피자요.”
키는 컸지만, 역시나 아이는 아이였다.
“그래, 그리고 햄버거도 해 줄게.”
“…감사합니다.”
강현은 그런 곽도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장만기를 보았다.
“난 오일 파스타! 매콤하게 부탁해.”
“예, 알겠어요.”
강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으로 향했다.
손을 씻고 화구 앞에 선 강현.
‘첫 손님부터 좋은 소식을 가져왔네.’
강현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곽도현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는 자리였다.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곧 강현의 손이 바빠졌다.
* * *
차례대로 나오는 음식에 곽도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피자와 햄버거뿐만 아니라 파스타와 스테이크도 올라왔다.
“사, 삼촌 너무 많은데….”
“남은 건 싸 가서 부모님이랑 먹어.”
강현은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자 머뭇거리던 곽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옆에 있던 장만기가 입을 열었다.
“동생, 도현이가 부탁이 있데.”
“예?”
고개를 갸웃한 강현이 다시 곽도현을 보았다.
그러자 머뭇거리던 곽도현이 입을 열었다.
“저, 방학 때 여기서 공부해도 될까요?”
“응? 시험은 합격한 거 아니야?”
강현의 물음에 곽도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슬아슬하게 합격했어요. 기숙사 지원금을 받으려면 더 공부해야 해요.”
부모님의 부담을 줄여 드리고 싶은 것이었다.
강현은 곽도현의 심정을 이해했다.
“학교보다 이곳이 공부가 잘돼요. 그리고….”
“수진 씨네 집도 가깝고. 그렇지?”
강현의 말에 곽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합격한 후에도 계속 찾아가기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혹시 방해가 안 된다면 오고 싶어요.”
곽도현의 말에 강현은 팔짱을 꼈다.
그러자 곽도현이 숨을 죽이고 강현을 바라보았다.
사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테이블이 다 찬 적은 손에 꼽으니.’
테이블 하나 내어 주는 게 대수겠는가.
강현이 걱정하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다른 애들도 올지 모르는데 괜찮겠어?”
상후와 미영이.
여름방학 때도 그랬듯이 겨울방학 때도 올 것이다.
“예! 상관없어요!”
강현의 허락에 곽도현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매장 문이 열렸다.
“삼촌! 저 왔어요!”
“아, 안녕하세요.”
문을 활짝 열고 들어오는 남자아이와 수줍게 인사하는 여자아이.
바로 상후와 미영이었다.
강현은 손을 흔들며 곽도현을 힐끗 보았다.
그제야 곽도현도 강현이 말했던 아이들이 저 둘이란 걸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은 그런 곽도현의 어깨를 두드리고 상후와 미영이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