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여전하구나.
잠에서 깬 강현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무려 16일이나 지나 있었다.
‘이 정도면 공사는 끝났겠네.’
아니나 다를까.
공사가 완료되었다는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사람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연락을 자주 주고받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이 주 정도 되니 양이 상당했다.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하나하나 답장을 보내려면 시간이 걸릴 거다.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 급해 보이는 것만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음식도 잘 받았다고 연락해야지.’
그렇게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을 집어넣은 강현은 쌀쌀한 공기에 몸을 떨었다.
어제 장작을 다 넣긴 했지만, 밤새 다 타버린 것이었다.
힐끗, 안을 보자 설기가 자는 게 보였다.
꿈에서 달리기라도 하는 걸까.
네 다리가 한 번씩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피식 웃은 강현은 겉옷을 걸치고 마당으로 나왔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하늘 위로 올라갔다.
강현은 남은 장작을 넣어서 아궁이에 불을 피웠다.
양이 적긴 하지만, 아침을 보내긴 충분했다.
‘어차피 점심은 돌아가서 먹을 테니깐.’
온기가 서서히 퍼져가자 정신도 맑아졌다.
강현은 물을 끓여와서 마루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한 모금.
커피나 차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지만, 아침에는 이렇게 물만 마시는 게 좋았다.
멍하니 마당 너머를 바라보고 있자 옆에 무언가가 꼼지락거렸다.
토리였다.
마루 위로 올라온 토리가 강현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졸린 지 길게 하품했다.
강현은 웃으며 토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물 줄까?”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강현은 다시 물을 홀짝였다.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자 어느새 물이 식어 있었다.
그제야 강현이 몸을 일으켰다.
옆에 있던 토리가 고개를 돌려서 강현을 보았다.
이제 어느 정도 정신이 든 모양.
“아침 준비할까?”
슬슬 설기가 일어날 때가 되었다.
일어나면 밥부터 찾을 거다. 강현의 말에 토리가 쪼르르 달려와서 어깨에 올라탔다.
그렇게 강현은 토리와 함께 주방으로 향했다.
밥을 올리고 어제 먹고 남은 나물을 접시에 가지런히 놓아준다.
그러고 있으니 깨어난 설기가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머리를 흔들어서 잠을 날린 설기가 강현을 올려다보았다.
밥 먹는 거야?
그런 눈빛.
강현은 그런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스토브를 보았다.
‘나물만으로는 허전하니깐.’
강현 혼자라면 충분했다.
하지만 설기에게는 고기반찬이 필수였다.
강현은 냉장고에서 큼지막한 고기를 꺼내서 팬에 올렸다.
그러자 설기의 귀가 쫑긋 올라왔다.
* * *
아침을 먹은 강현은 바로 떠날 준비를 했다.
냉장고와 냉동고에 넣어놓은 식자재를 꺼내던 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만 가져올걸.’
이 주 동안 먹을 양을 챙기느라 짐이 한가득 쌓였다.
떠날 때만 해도 이세계에서 이 주를 전부 보낼 줄은 몰랐으니 어쩔 수 없었다.
‘택시 한 대로는 부족하겠네.’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면허를 따야 하나?’
서울에 있을 때는 차가 없어도 불편함이 없었다.
오히려 지하철과 택시가 더 편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달랐다.
차가 없으면 어딜 이동하기도 불편했다.
‘학원에 다니려면 읍내로 나가야 하는데….’
매번 나가기도 번거로웠다.
결국, 이렇다 할 답을 찾지 못한 채 짐을 정리했다.
옆을 보자 설기가 할아버지 댁 주변을 제집처럼 휘젓고 다녔다.
후다닥.
빨빨거리며 주변을 돌아다니는 설기.
가끔, 멈춰서 무언가를 씹는 것 같았지만.
강현은 모른 척 외면했다.
그리고 토리는 강현 주변을 맴돌았다.
그렇게 정리가 끝나갈 때쯤, 멀리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택시는 아직 안 불렀는데?’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차가 여기까지 올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짐을 내려놓은 강현이 언덕 아래를 바라보았다.
“컹! 컹!”
설기 역시 다가와서 언덕 아래를 향해 짖었다.
강현은 설기의 꼬리를 보고 눈을 껌뻑였다.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뒷산에서 주워 먹은 것 때문이 아니었다.
반가움의 표시였다.
꼬리를 바라보던 강현의 시선이 다시 아래를 향했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차 소리.
그리고 얼마 뒤, 강현의 눈이 커졌다.
소리의 정체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곧 차가 할아버지 댁 앞에 멈춰 섰다.
익숙한 모양의 트럭.
트럭 안에서 내리는 건 민호였다.
“어쩐 일이세요?”
강현이 놀라움과 반가움을 담아서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민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침에 문자를 보고 왔습니다. 아무래도 차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민호의 시선이 쌓아놓은 짐으로 향했다.
딱 필요할 때 오긴 했다.
“...제가 일정이 있으시면 어쩌시려고.”
여행에서 돌아왔다고만 했지, 마을로 돌아간다는 말은 없었다.
“그때는 모처럼이니 얼굴이나 한 번 보는 됩니다.”
민호가 멋쩍게 말했다. 그리고는 강현을 힐끗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어차피 이제부터 한가할 때라 괜찮습니다.”
그리 말한 민호가 미소 지었다.
그러한 민호의 모습에 강현 역시 따라서 웃었다.
“여러 가지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친구 아닙니까.”
민호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친구였다.
그때, 옆에 있던 설기가 슬금슬금 민호의 곁으로 다가갔다.
“컹! 컹!”
반갑게 짖는 설기.
그런 설기를 본 강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기가 이리도 반길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민호도 잠깐 놀라더니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휙, 설기가 고개를 피했다.
‘...그럼 그렇지.’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꼬리를 흔드는 설기.
저럴 거면 왜 다가간 건가.
민망해하며 뻗은 손을 거두는 민호.
“...여전하네요.”
“그렇죠.”
강현과 민호.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서 갑시다. 다들 많이 찾았어요.”
마을 사람들을 이야기했다.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민호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설기는 열린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킁킁, 냄새를 맡고 있었다.
강현은 치는 꼬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프진 않지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설기 나름대로 집으로 온 반가움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강현은 설기를 들어다가 다시 무릎에 앉혔다.
“위험하니깐, 얌전히 있어.”
“끼잉?”
설기가 고개를 돌려 강현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위험한지 모르는 눈치였다.
‘하긴.’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기라면 달리는 차에서 떨어져도 멀쩡할 거다.
그렇다고 해서 놔둘 생각은 없었다.
강현이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자 얌전히 몸을 낮췄다.
그러나 시선은 여전히 창문 밖으로 향한 상태였다.
강현도 굳이 창문을 닫지 않았다.
그런 설기의 머리 위로 토리가 기어 올라갔다.
설기는 토리가 잘 올라올 수 있게 머리를 살짝 숙였다.
이제는 서로에게 익숙해진 모습.
강현이 그런 둘을 바라보고 있자 운전하던 민호가 입을 열었다.
“여행은 어디로 가셨던 거예요?”
“아.”
어디라고 말해야 하나.
“해외요. 유럽이긴 한데,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서 모르실 거예요.”
이게 강현이 답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민호는 강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셨어요?”
민호의 물음에 강현은 턱을 긁적였다.
강현의 머릿속에 그동안의 여정이 떠올랐다.
강현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힘들긴 했지만,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강현의 대꾸에 민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예.”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 대화가 끊겼다.
어색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둘에게는 이게 더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정말 오랫동안 알고 지내 온 친구처럼 편했다.
* * *
어느 순간 도로가 사라지고 시멘트 길이 나왔다.
주변을 오가는 차들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멘트 길조차 얼마 지나지 않아서 흙길로 바뀌었다.
그렇게 굽이진 언덕길을 지나자 군데군데 집들이 보였다.
마을에 도착한 것이었다.
겨우 진정했던 설기의 꼬리가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강현의 마음도 설기와 다르지 않았다.
익숙한 길. 익숙한 경관.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 이러할까.
실제 고향은 서울이었지만, 이런 감정을 느끼진 못했다.
곧 민호의 차가 강현의 매장 앞에 섰다.
고작 이 주만인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차에서 짐을 내리는 강현.
그때, 멀리서 흘러나왔다.
[치익, 아아, 마을회관에서 알립니다.]
이장의 목소리였다.
짐을 내려놓던 강현의 움직임이 멈췄다.
도와주던 민호 역시 마찬가지.
[이강현은 즉시 마을회관으로 오도록. 도착한 거, 다 아니깐 얼른 오도록. 아, 그리고 오늘은 마을회관에서 잔치가 있을 예정입니다. 이상. 치지직.]
그 말을 끝으로 방송이 끝났다.
시간도 말해주지 않는 불친절한 방송.
눈을 껌뻑이던 강현이 민호를 돌아보았다.
혹시 자신이 오는 걸 알렸냐는 물음이었다.
그러나 민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짐을 내리는 걸 누가 봤나 보네요.”
민호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워낙 작은 마을이니.’
그리고 그보다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이장님. 사투리 안 쓰시네요?”
어색하고 억양도 제 멋대로이긴 하나, 전에 쓰던 말투와 달랐다.
물론, 그렇다고 표준어로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사투리도 표준어도 아닌 이상한 말투가 되었다.
그러자 민호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얼마 전에 옆 마을에 놀러 갔다가 거기, 이장이 방송하는 걸 듣더니 저러세요.”
“아….”
강현은 어디 마을인지 짐작이 갔다.
“저러다가 곧 돌아올 겁니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강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듣는 이들조차 어색하게 느껴지는데, 말하는 이장은 오죽할까.
이장이 계속하겠다고 고집을 피워도 다른 이들이 받아주지 않을 거다.
‘정말 여전하구나.’
평소의 마을이었다.
웃음을 흘린 강현의 눈에 짐들이 보였다.
강현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 방금 이장의 방송 때문이었다.
그런 강현의 기색을 알아챘는지 민호가 입을 열었다.
“천천히 정리하고 오세요. 제가 이장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잔치를 준비하려면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럼, 부탁드려요.”
강현의 말에 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차를 타고 떠나가는 민호를 배웅한 강현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짐 대부분은 집으로 올려야 했다.
하지만.
강현은 발걸음은 매장으로 향했다.
문을 연 강현은 눈을 깜빡였다.
공사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시멘트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낡은 텔레비전 옆에는 못 보던 게 보였다.
작은 집 모양.
누구의 집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친절하게 설기라고 이름도 적혀 있었다.
투박한 글씨. 그러나 그게 더 정겹게 느껴졌다.
“...이제 매장 안에 집까지 생겼네.”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집 안에는 설기가 쓰던 쿠션이 그대로 들어가 있었다.
자신이 머물던 자리에 놓인 낯선 물건.
킁킁, 냄새를 맡은 설기가 강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집이야.”
강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머뭇거리던 설기가 쏙,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집 밖으로 나온 설기.
그러길 몇 번이나 반복했다.
‘마음에 든 모양이네.’
강현은 웃음을 흘리고는 매장을 둘러봤다.
바뀐 건 설기의 집만이 아니었다.
낡아서 삐걱거리던 테이블과 의자들이 고쳐져 있었다.
먼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시공 업체가 해줬을 리는 없었다.
마을 사람 누군가가 고쳐놓은 것이었다.
테이블과 의자를 어루만지는 강현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온기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