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맛있네
숲에 도착하자 짙은 풀 내음이 강현을 반겼다.
바람을 따라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이 마치 반갑다고 인사를 건네는 것만 같았다.
숲으로 돌아온 강현은 현대에서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올 때도 입었던 옷이었지만, 새 옷을 입은 것처럼 간지러웠다.
그리고 설기와 토리는 기분이 좋은지 숲 여기저기를 오갔다.
‘토리가 저러는 건 처음 보네.’
땅속에서 올라와서 풀 위를 뒹굴고 있었다.
체취를 풀에 묻히려는 건가?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었다.
둘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강현도 기분이 좋아졌다.
강현은 숲을 천천히 걸어갔다.
설기와 토리가 충분히 즐길 수 있게.
‘노아 씨랑 에밀리야 씨는 숲에 없나 보네.’
있다면 진작에 찾아왔을 거다.
모처럼이니 얼굴을 보고 가려고 했지만,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간 걷다 보니 토리가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벌써 끝났어?”
강현의 물음에 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지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설기가 온 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강현 곁으로 다가와서 꼬리를 흔들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 귀도 연신 쫑긋거리고 있었다.
아직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것이었다.
강현은 피식 웃으며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설기의 얼굴을 이리저리 쓰다듬었다.
설기가 간지럽다는 듯이 몸을 비틀었다.
“잘 놀았어?”
“컹!”
설기가 짖었다.
“집에 안 다녀와도 돼?”
강현의 집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이 주가 넘게 숲에 돌아오지 않았다. 설기네 부모님도 걱정할 거다.
강현의 물음에 설기가 잠시 멈칫하더니 산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
“아우우우우!”
하울링.
그에 화답하듯 산 위에서 하울링이 들려왔다.
하울링이 끝나자 설기가 강현을 돌아봤다.
됐지?
하는 눈빛.
강현은 실소를 흘리고는 일어났다.
“그래, 가자.”
강현은 문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 * *
현대로 돌아온 강현.
그런 강현을 가장 먼저 맞이한 건 찬 공기였다.
“…와.”
강현은 저도 모르게 팔을 쓰다듬었다.
고작 이 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날씨가 바뀌어 있었다.
‘이 정도면 겨울인데?’
강현은 힐끗 옆을 돌아보았다. 강현과 시선이 마주치자 설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
복슬복슬한 설기의 털을 본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기가 태어난 산은 이보다 더 추웠다.
당연히 추위에 익숙할 거다.
하지만 토리는 상황이 달랐다.
주머니 속에 있는 토리가 몸을 동그랗게 마는 게 느껴졌다.
불을 다루다 보니 추위에 취약한 것이었다.
강현은 서둘러서 할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댁도 밖이랑 다를 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보일러를 켜 놓고 갈걸.”
강현은 한숨을 내쉬고 보일러 스위치를 찾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일러 스위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잠깐만.”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여기, 보일러가 있었나?”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
당연했다. 요즘 보일러 없는 집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강현은 여기서 씻을 때도, 요리할 때도 전부 찬물밖에 쓰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그리고 요리 역시 버너로 했다.
‘그러고 보니.’
청소할 때, 보았던 걸 떠올렸다.
강현은 건물 옆으로 걸어간다.
설기와 토리가 그런 강현을 뒤따랐다.
옆에 놓인 솥과 아궁이.
‘…요리용이 아니었어.’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시대에 아궁이라니. 상상도 못 했다.
강현의 동네도 연탄이나 가스를 사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주방이 따로 있기에 이제는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옆을 보니 장작이 놓인 게 보였다.
대부분 썩었지만, 하루 정도는 충분할 거다.
‘창고에 낡은 가구들도 있으니.’
버리려고 쌓아 둔 가구.
부족하면 그것들을 태워도 되었다.
강현은 장갑을 끼고 장작들을 아궁이 넣었다. 옆에 있던 설기도 강현을 도와서 장작을 옮겼다.
그러자 토리가 쪼르르 내려와서 불을 뿜었다.
캠핑을 다니면서 수도 없이 했던 일.
합이 잘 맞았다.
곧 아궁이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온기가 서서히 퍼져 가고 있었다.
“토리야, 그 정도면 충분해.”
강현의 말에 토리가 고개를 돌렸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세계와 달리 여기서는 힘을 쓰기 힘든 것이었다.
강현은 그런 토리를 들어서 무릎 위에 올렸다.
그리고 강현도 바닥에 앉았다.
“조금 있다가 들어가자.”
어차피 방 안이 따뜻해지려면 시간이 걸릴 거다.
그러자 설기가 옆으로 다가왔다.
장작을 옮기느라 입 주변에 흙이 잔뜩 묻었다.
강현은 설기의 입 주변을 닦아 줬다.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강현의 손에 묻은 재까지 설기에게 묻어 버렸다.
“끼잉.”
울상을 짓는 설기.
하지만 그 모습이 귀여운 탓에 강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나중에 씻자.”
설기뿐만 아니라 강현의 꼴도 말이 아니었다.
강현이 말에 설기가 배를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렇게 셋은 멍하니 타오르는 장작을 바라보았다.
타닥, 타닥.
올라오는 불길을 보고 있자니 집에 온 걸 실감했다.
* * *
아궁이에서 충분히 몸을 녹인 강현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화들짝 놀랐다.
“…효과가 좋네.”
따끈따끈했다.
뜨겁게 느껴질 정도. 이렇게 따뜻할 줄은 몰랐다. 그러다가 이상한 걸 느끼고 옆을 돌아보았다.
기우뚱기우뚱 걷는 설기.
눈동자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뜨거워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거실 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심지어 앞발과 뒷발이 같은 발끼리 나가고 있었다.
어딘가 망가진 모습.
마치 갓 태어난 송아지가 뛰는 것처럼 보였다.
그걸 본 강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해 보니 설기는 더위에 약했다.
“잠깐만 기다려 봐.”
강현이 방에서 낡은 이불을 가져왔다.
그 위에 올라가고 나서야 설기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불에 몸을 파고드는 설기.
설기와 달리 토리는 아궁이 난방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이미 바닥과 한 몸이 되어 늘어져 있었다.
“씻는 건 나중에 해야겠네.”
이 상태라면 온수도 없을 거다. 솥에다가 물을 끓여서 씻어야 했다.
그러던 강현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언제부터 있었지?”
마루 위에 놓인 커다란 상자.
왜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컸다.
강현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두툼한 이불과 함께 겉옷 두 벌이 들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강현에게는 커 보이는 옷.
강현은 상자 구석에 놓인 쪽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강현 씨가 자리를 비웠길래 놓고 갑니다. 음식은 마을 분들이 조금씩 싸 주셨습니다.]
투박한 글씨.
글씨체만 보고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민호.
날씨가 추워진 탓에 걱정되어서 가져다준 것이었다.
강현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러다가 곧 다른 것에 생각이 미쳤다.
“음식?”
상자 안에는 보이지 않았다.
일어나서 냉장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렇게 냉장고를 열어 본 강현은 숨을 삼켰다.
김치와 나물뿐만 아니라 멸치볶음이나 두부조림 같은 밑반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이거 너무 많잖아.”
강현은 실소를 흘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한 사람이 만든 게 아니었다. 다들 강현을 생각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날씨는 추워졌지만, 마음은 더 따뜻해졌다.
강현은 나물을 꺼내서 냄새를 맡아 봤다.
빨리 상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상태는 멀쩡했다. 신경 써서 만들어 줬는데 버려야 하는 상황은 피해야 했다.
“서둘러서 먹어야겠네.”
혼자였다면 일주일 내내 먹어야 하겠지만, 설기가 있었다.
냉장고 안을 둘러본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메뉴가 결정 된 것이었다.
점심을 굶었기에 설기도 배가 고플 거다.
“역시 집이 좋네. 그렇지?”
강현의 물음에 설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맨바닥과 달리 이불 위는 괜찮은지 평소의 설기로 돌아와 있었다.
피식 웃은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씻고 밥 먹을 준비하자.”
밥이란 말에 설기의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토리 역시 몸을 돌려 강현을 바라보았다.
* * *
솥에다 물을 끓여서 찬물과 섞었다.
미지근한 물. 그러나 씻을 때, 불편함은 없었다.
그렇게 씻고 나온 강현은 바로 밥을 안쳤다.
곧 밥 냄새가 집안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밥을 안치는 사이 냄비에다 된장을 풀었다.
거기다가 다진 마늘 한 큰술과 국간장을 넣어 줬다.
곧 물이 끓으면 큼지막하게 썬 배추와 양파를 넣어 준다.
그리고는 물이 다시 끓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물이 다시 끓으면 홍고추와 청고추, 파를 넣고 불을 줄여 준다.
간을 본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극적이지 않고 수수한 맛. 배추의 싱그러움이 국물에서도 느껴졌다.
배추가 너무 흐물흐물해지기 전에 불을 끈다.
이어서 장을 만들었다.
다진 고기를 팬에 볶는다.
그리고 기름을 충분히 빼 준 후 고추장, 다진 마늘, 올리고 당을 넣고 섞어 줬다.
그렇게 양념장까지 만든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차.”
가장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강현이 팬을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재료까지 완성한 강현이 미소 지었다. 이로써 준비는 끝났다.
밥이 익기만을 기다리면 되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 * *
상 위에 만들어진 요리를 올려놓자 설기의 귀가 쳐졌다.
된장국과 흰 쌀밥. 넓은 대접에 밥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양념장도 있었지만 설기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강현은 그런 설기를 보며 웃었다.
“잠깐만 기다려 봐.”
그리고는 안에 있는 나물들을 꺼내 왔다.
나물들을 차례대로 밥 위에 올린다. 그리고 멸치볶음까지.
다 올린 후에 양념장을 한 숟가락 덜어 내고 참기름을 두른다.
‘마지막으로.’
강현은 달걀을 그 위에 올렸다.
알록달록한 색감.
비빔밥이 완성되었다.
“이제 이걸 비비면···. 내가 비벼야 하는구나.”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만들 때는 좋았는데,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설기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처음과 달리 제법 모양이 그럴싸하기 때문이었다.
숟가락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자.”
강현이 다 비빈 대접을 설기에게 건넸다.
아까 같은 그럴싸함은 사라졌지만, 설기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컹!”
설기가 대접에 머리를 박았다.
허겁지겁 먹는 설기.
“괜찮아?”
강현의 물음에 답하듯 설기의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피식 웃은 강현은 자신의 대접에 나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설기에게 준 것보다 간이 약하게.
그렇게 다 비빈 강현은 조그마한 대접에 한 숟가락 덜어 냈다.
토리의 몫이었다.
토리도 대접이 놓이자마자 먹기 시작했다.
다들 배고팠던 모양인지 먹는 데 정신이 없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강현도 비빔밥을 한 입 떠먹었다.
입안 가득 퍼져 가는 양념장의 맛.
이어서 나물의 맛이 하나씩 느껴졌다.
그리고 씹을 때마다 섞여 갔다.
“…맛있네.”
재료 하나하나에 정성이 느껴졌다.
강현은 배추 된장국도 한 입 떠먹었다.
따뜻한 온기가 목을 타고 내려왔다.
얼마 만에 먹어 보는 한식인가.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다시 숟가락을 들어 올리는 강현.
그때.
“컹!”
어느새 대접을 비운 설기가 해맑게 쳐다보고 있었다.
“…음.”
강현은 대접을 들어서 밥과 나물을 올렸다.
아까의 반복.
그리고 그게 두 번쯤 지났을 때 생각했다.
‘…볶음밥으로 할 걸 그랬나.’
슬슬 팔이 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