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겠지
멀리서 불어온 바람이 강현의 머리카락을 흔들고, 이마를 간지럽혔다.
가벼운 발걸음.
굳이 나침반을 쓸 필요도 없었다.
신이 난 토리가 앞장서서 걷고 있기 때문이었다. 흔들리는 꼬리를 따라서 걷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풍경이 나타났다.
강현은 저 멀리 보이는 성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이제 곧 로벤투스였다.
‘저 성이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그러한 기분을 느낀 건 강현만이 아니었다.
“컹! 컹!”
강현을 재촉하듯 짖은 설기가 그대로 달려 나갔다.
강현은 굳이 설기를 말리지 않았다.
대신 멀어지는 설기를 쫓기 위해 발걸음을 빨리했다.
* * *
낡은 성벽.
곳곳에 상처들이 가득했다.
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이제는 새롭게 다가왔다.
자연적으로 생긴 게 아니었다.
과거의 흔적들이었다.
강현이 성벽을 보며 걷고 있자 성문을 지키던 병사가 손을 흔들었다.
“어서오세요, 감사관님.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정중한 말투에 강현이 놀라자 병사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강현은 병사가 술집에 있던 이들 중 하나라는 걸 알아챘다.
강현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덕분에요.”
강현의 대꾸에 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딱 맞게 오셨군요.”
“…딱 맞게요?”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병사는 웃으며 길을 열어 줄 뿐, 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강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성안으로 들어갔다.
카브리의 마을과 비교하면 삭막해 보이는 마을.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표정은 어느 마을보다 밝았다.
몇몇 이들은 강현을 알아봤는지 인사를 건넸다.
살짝, 목을 숙여서 그들의 인사를 받던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설기 이 녀석은 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숲까지 돌아간 걸까?
“강현, 여길세.”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란돌프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 란돌프 씨. 잘 지내셨어요?”
“나야 똑같지. 왜 그쪽으로 가나?”
란돌프의 물음에 강현이 시선을 돌렸다. 강현의 향하는 곳에는 영주가 머무르는 내성이 있었다.
“음, 그래도 일단 보고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요?”
이곳에서의 강현은 로벤투스 소속이었다.
‘덕분에 많은 도움도 받았으니.’
게다가 란돌프와 로멘도 내성에 있다고 생각했다.
‘서신도 전해 줘야 하고.’
카브리의 영주에게 받은 서신.
그러한 강현의 말에 란돌프가 웃음을 흘렸다.
“그럴 필요 없네. 영주님이나 로멘 님은 내성에 없어.”
“예?”
혹시 일 때문에 밖에 나가셨나?
“다들 술집에서 모여 있네. 자네의 모험담을 들으려고 말이야. 어서 가세.”
란돌프가 강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강현은 얼떨떨해하면서 란돌프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란돌프가 향하는 곳은 전에도 갔던 곳이었다.
그렇게 걷던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 모여 계시다고요? 제가 오는 걸 어떻게 알고….”
강현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언가 장치라도 있는 건가.
강현의 물음에 란돌프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강현을 보았다.
“당연히 설기가 불렀네. 나도 그 녀석이 영주성 집무실까지 들어올 줄은 몰랐어. 참 대단한 녀석이야.”
웃음을 터트리는 란돌프를 본 강현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안 보이더니 그런 짓을 했구나.’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강현과 설기는 한 몸이나 다름이 없었다.
성에 있던 이들은 설기를 보자마자 강현이 오고 있음을 알아챈 것이었다.
“그나저나….”
갑작스러운 말에 강현의 시선이 란돌프에게 향했다.
란돌프는 강현을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제법 사내다워졌어.”
“예?”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위아래로 훑었다.
뭔가 바뀌었나?
‘그대로 인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강현을 보며 란돌프가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 * *
강현이 란돌프와 함께 술집에 들어가자마자 환호성이 들려왔다.
“어서 오게.”
고개를 돌리자 영주인 조반테가 보였다.
옆에는 로멘이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둘뿐만이 아니었다. 곳곳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가, 감사합니다.”
강현은 이리 환대를 받을 줄은 몰랐다.
고작 일주일 조금 넘은 시간이 아니었던가.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서 조반테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두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현과 란돌프의 자리였다.
강현이 자리에 앉자 로멘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들 자네의 모험담이 궁금해서 그러는 것이니 놀랄 것 없네.”
란돌프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녀석들도 수두룩하니 궁금할 거야.”
란돌프의 말에 강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테이블 밑에 있는 설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강현과 눈이 마주치자 해맑게 웃는 설기.
그러나 강현의 눈빛은 차가워졌다.
설기의 입이 기름으로 번들거리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을 부른 거네.’
강현이 한숨을 내쉬는 사이 토리가 쪼르르 내려와서 설기의 곁으로 갔다.
“물론 술 마실 핑계를 찾아서 온 녀석들이 대부분이지만. 안 그래?”
란돌프의 물음에 곳곳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모습에 강현도 슬며시 미소지었다.
그때, 강현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예상하지 못한 얼굴.
바로 영주성에서 보았던 토마스였다.
영주성의 요리장.
그가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억지로 끌려온 건가?
조반테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적었다.
“저 친구는 신경 쓰지 말게. 여기서 요리해 보겠다고 주방에 들어갔다가 쫓겨났어.”
조반테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반테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토마스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강현은 조반테의 말을 듣고 주방 쪽을 봤다.
열심히 음식을 나르는 술집 주인.
전과 느낌이 달랐다.
‘…주인이 아니라 직원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주방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이것도 부탁해요.”
“으, 응. 알겠어.”
주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여성의 목소리. 강현이 눈을 크게 뜨자 옆에 있던 란돌프가 입을 열었다.
“내가 부탁했지. 돌아오자마자 저 녀석이 만든 걸 먹일 순 없지.”
란돌프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맞습니다.”
“그럴 순 없죠.”
주방으로 들어가려던 주인이 눈을 흘겼다.
그러나 영주인 조반테마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였구나.’
강현의 시선이 밑으로 향했다.
고기를 뜯어 먹고 있는 설기.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로멘이 지팡이로 바닥을 찍었다.
쿵.
“자자, 조용히 하게. 이제 모험담을 들어 봐야지.”
로멘의 말에 술집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다들 입을 닫고 강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현은 그들의 시선에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모험담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닌데….”
고작 이 주.
사건이 있어 봤자 얼마나 있겠는가.
‘기껏해야 상인 남매를 만나고, 숲의 현자와 이야기 나누고, 그 뒤에 기사들과 도둑 일당을….’
기억을 더듬던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많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경험을 했다.
강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강현의 이야기가 이어질 때마다 주변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남매를 이야기할 때는 안타까워하고, 숲의 현자와 대학자를 만났을 때는 다들 흥미로워했다.
그리고 도둑 일당을 토벌한 이야기가 끝나자 술집이 조용해졌다.
“그, 그것참 대단했군.”
“…이 정도면 진짜 모험담이라고 할 수 있겠어.”
로멘과 란돌프의 얼굴에서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강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들은 그들의 예상을 넘어선 것이었다.
만일 강현이 아니라 다른 이가 말한 것이었다면, 허풍 떨지 말라고 했을 거다.
실제로 병사나 기사 몇몇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강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둘은 강현이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토벌 이야기가 끝났을 때, 강현은 잊고 있던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아, 영주님. 드릴 게 있습니다.”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의아해하던 조반테는 서신을 읽고 실소를 흘렸다.
“정말이군. 카브리의 영주가 직접 감사를 표했어.”
의심하던 이들의 눈이 커졌다. 영주가 직접 서신을 보낼 정도면 강현의 이야기가 사실이란 뜻이었다.
조반테가 웃으며 강현을 보았다.
“보상은 걱정하지 말게. 덕분에 골머리를 앓던 일이 하나 풀렸어.”
“아뇨. 굳이 해 주지 않으셔도….”
강현의 말에 조반테가 고개를 돌렸다.
“이건 체면에 문제라네.”
진지하게 말하는 조반테. 그의 모습에 강현도 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곧 조반테가 강현을 보며 미소 지었다.
“첫 모험이 이 정도이니 다음엔 어떤 모험을 할지 더욱 기대가 되는군.”
조반테의 말에 강현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이번 여행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강현으로서는 사건, 사고 없는 여행이 더 좋았다.
그런 강현의 생각을 모르는 조반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위대한 모험가가 될 강현을 위해.”
조반테의 말이 끝나자마자 호응하듯 사람들이 잔을 들어 올렸다.
“모험가 강현을 위해!”
“위대한 모험을 위하여!”
사람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강현도 술잔을 들어 올렸다.
“…모험가가 될 생각은 없는데.”
하물며 위대한 모험이라니.
그 과정이 얼마나 험난할까?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강현의 혼잣말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 사라졌다.
* * *
술자리는 밤까지 이어졌다.
조반테와 로멘을 비롯해 몇몇은 일이 있다고 들어갔지만, 새로운 이들이 합류했다.
강현은 몇 번이고 모험담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강현의 이야기가 끝나자 란돌프가 웃음을 흘렸다.
“이제는 이야기꾼 못지않아. 들을 때마다 놀라워.”
“…벌써 다섯 번째니깐요.”
강현은 한숨을 내쉬고는 벌꿀주로 목을 축였다.
강현도 말할 때마다 이야기가 매끄러워지는 게 느껴졌다.
강현의 대꾸에 란돌프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란돌프가 입을 열었다.
“다들 무료해서 그러네. 이런 외딴곳에서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뻔해. 예전에는 상인들이라도 왔었지만, 이제는 그조차 없으니.”
란돌프의 이야기를 들은 강현은 다시 술집을 돌아보았다.
웃고 떠드는 이들.
그들 대부분이 강현의 모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란돌프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새롭게 다가왔다.
“…이제는 다시 찾아오겠죠.”
수인과의 거래가 시작되었으니 전보다 상황이 나아질 거다.
강현의 말에 란돌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말없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벌꿀주를 들이킨 강현의 시선이 설기에게 향했다.
배를 뒤집어 까고 있는 설기.
너무 먹은 탓에 엎드리는 게 힘든 것이었다.
이렇게 시끄러운데도 잘만 자고 있었다.
가족끼리는 닮는다고 했던가. 크기만 다를 뿐, 옆에서 자고 있는 토리와 똑 닮았다.
‘…너, 맹수 아니었냐.’
맹수가 저리 쉽게 배를 보여도 되는 건가.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밤이 지나갔다.
* * *
여관에서 나온 강현은 기지개를 켰다.
옆에 있던 설기도 길게 하품했다.
어제 그렇게 자 놓고도 피곤한 모양이었다. 설기에게서 시선을 뗀 강현이 내성 쪽을 보았다.
‘인사는 어제 나눴으니.’
바로 떠나면 되었다.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곧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강현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뭐지?’
이제는 익숙해졌다지만, 강현은 이방인이었다.
당연히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강현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작은 그림자들이 다가왔다.
바로 마을 아이들이었다.
마을 아이들이 먼저 다가온 적은 처음이라 강현은 당혹스러워했다.
“아저씨, 아저씨. 정말로 혼자서 도적떼를 잡았어요?”
“응?”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도적떼가 오십 명이 넘는다고 했어.”
“아니야, 백이야!”
아이들은 곧 자기들끼리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놀란 강현이 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 혼자가 아니라….”
“아저씨, 아저씨. 정말 숲의 현자랑 만났어요?”
“으, 응? 만나긴 했는데.”
“왕실에 있는 유명한 학자님도요?”
“일단은?”
그러자 아이들의 표정이 변했다.
“것봐, 사실이잖아.”
“우와. 멋져요!”
“아니, 그런데 아까 말한 건….”
하지만 강현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아이들은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과 강현의 이야기를 들은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더 커졌다.
‘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변한 거야.’
강현이 황당한 표정으로 떠나가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슬그머니 다가오는 설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너.”
아이들이 오자마자 자리를 피했던 것이었다.
강현의 시선에 설기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강현은 한숨을 내쉬고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람들 사이에 있던 사제 하나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급히 어디론가 달려갔다.
전에 바하람과 함께 있었던 사제였다.
방향을 보니 신전이 있는 방향이었다.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여기서 말을 고치는 것도 이상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겠지.’
어제 강현의 이야기를 들은 이들은 진실을 알 거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강현은 숲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