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모험은 끝났다
수풀 사이로 나타난 이들은 다섯 사내였다.
그중 한 사내는 강현의 눈에 익었다.
‘…저 사람.’
중년의 사내.
두건을 쓰고 있지 않지만, 확실했다.
눈빛뿐만 아니라 옷차림도 똑같았다. 나타난 이들도 일행들이 있을 걸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혹스러워했다.
“실력으로 빠져나온 것 같진 않고. 미리 퇴로를 만들어 놓은 건가?”
아녜스가 태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강현은 놀란 눈으로 아녜스를 돌아보았다.
‘왜 도발을….’
그녀의 말이 정답이었는지 사내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급하게 왔는지 사내들의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숨이 거칠었다.
곧 사내들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이후의 일을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숫자는 비슷했다.
하지만 이쪽은 병사 둘에 노인과 여인, 그리고 강현이었다.
게다가 가운데 있는 사내는 강현과 노인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는지 일행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화르르르륵.
거대한 불꽃이 그들의 앞에 떨어졌다.
“…!”
“…!”
사내들뿐만 아니라 일행들마저 놀라서 돌아봤다.
아녜스.
지팡이를 든 그녀가 차가운 시선으로 사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숲이 타지 않게 공중에서 타오르는 불꽃.
“조심해. 다 타고 싶지 않으면.”
“…마법사.”
사내들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때, 뒤가 소란스러워졌다.
“…!”
멀리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걸 들은 사내들의 눈에 다급함이 떠올랐다.
“젠장, 뚫어!”
선두에 있던 이들이 달려갔다.
그 모습에 아녜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꼭 데여 봐야 뜨거운지 알지.”
불꽃이 사내들을 덮쳤다. 그 순간, 예상했다는 듯이 사내들이 흩어졌다.
각자 흩어져서 도망치려는 것이었다.
놀란 병사들이 사내들을 쫓았다.
그중 둘이 향하는 곳은 오헨하우어가 있는 방향이었다.
‘또?’
강현은 반사적으로 오헨하우어 앞을 가로막았다.
사내들은 놀란 눈으로 강현을 바라보더니 그대로 달려들었다.
이대로 방향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었다.
그러나 사내들보다 강현 본인이 더 놀랐다.
‘어째서….’
막았을까? 시퍼렇게 빛나는 칼날을 보자 후회가 들었다.
란돌프와 훈련을 해 보긴 했지만 실전은 달랐다.
강현은 미처 검을 뽑지 못하고 검집 채로 들어 올렸다.
“우왓.”
탕!
뒤로 밀려나는 강현.
찌릿, 손바닥이 아려 왔다.
하지만 또 다른 칼날이 강현을 노리고 있었다.
지팡이로 사내들을 노리던 아녜스가 혀를 차더니 지팡이를 내렸다.
강현과 오헨하우어가 휘말릴 수 있어서 함부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곳의 지형도 한몫했다.
강현은 날아오는 칼날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강현의 시선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헥헥.
혀를 빼고 앉아있는 설기.
병사들이 몰려왔을 때와 달랐다. 해맑은 표정으로 강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도와주는 건가?
순간 배신감이 몰려왔지만, 곧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텅!
다시 뒤로 밀렸다. 설기를 보고 나니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이어서 날아오는 칼날.
하지만.
텅!
강현의 검집에 막혔다.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쉬워.’
칼날이 날아오는 게 눈에 보였다. 란돌프나 노아와 비교하면 너무나도 느렸다.
설기가 나서지 않는 이유.
‘…위협이 아니라고 생각한 거야.’
텅, 터덩! 탕!
날아오는 칼들을 차분하게 받아쳤다.
검집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검집이 완전히 부서졌다.
그리고 나타난 검날.
검집이 사라진 덕분에 강현의 움직임이 한층 가벼워졌다.
게다가 자신감마저 붙었다.
강현이 걸음을 내디뎠다.
* * *
챙, 채챙.
날붙이끼리 부딪쳐서 불똥이 튀었다.
싸움이 멈췄다. 도둑들을 붙잡은 병사들은 물론이고 아녜스와 오헨하우어마저 놀란 눈으로 강현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강현과 싸우는 사내들만큼 당혹스러워하진 않을 거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눈이 떨려 왔다.
“젠장!”
마구잡이로 휘두른 칼날.
그러나 강현은 손쉽게 막아 냈다.
이젠 사내들도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은 강현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숨을 헐떡이는 자신들과 달리 강현의 표정은 담담했다.
옆에 있던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칼날을 휘둘렀다.
“좀 쓰러져!”
아니면 자신들을 제압하던가.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이미 체력의 한계였다. 팔다리가 부르르 떨려 왔다.
그러나 강현은 칼을 막아 내더니 다시 둘을 쳐다보고 있었다.
멀뚱멀뚱 바라보는 강현.
공격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벌써 몇 번째인가.
공격할 기회가 있음에도 하지 않았다.
‘…우릴, 가지고 놀고 있어.’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욕설을 삼킨 사내가 다시 검을 들었다.
옆에 있던 사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숨이 턱 끝까지 올라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내들의 오해였다.
강현에게 있어서 이건 첫 실전이었다. 지금 강현은 공격을 막아야 한다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먼저 공격한다는 건, 머릿속에 없었다.
그리고 란돌프와 노아와의 대련에서도 막느라 바빴지, 공격은 익숙하지 않았다.
다시 시작된 전투.
아니, 전투라기보다 대련에 가까웠다.
뒤늦게 도착한 기사와 병사들도 멈춰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한 기사의 손에는 다른 방향으로 도망쳤던 도둑이 들려 있었다.
이로써 다섯 모두 잡힌 것이었다.
곧 자신들이 포위되었다는 걸 알아챈 사내가 칼을 내던졌다.
“빌어먹을.”
이미 틀렸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그리고 강현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 악마 같은 놈.”
“…예?”
옆에 있던 이도 강현을 노려보며 칼을 내려놨다.
그러자 병사들이 달려와서 둘을 포박했다.
그리고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강현은 자신이 왜 욕을 먹는지 몰랐다.
‘도망치는 걸 막아서 그런가?’
강현이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그뿐이었다.
당혹스러워하는 강현의 곁으로 아녜스가 다가왔다.
“보기보다 성깔이 있군. 마음에 들어.”
“예?”
강현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심지어 병사들마저 힐끗힐끗 강현을 보고 있었다.
“컹!”
설기만이 해맑게 웃으며 꼬리를 흔들 뿐이었다.
* * *
돌아가는 길은 설기도 함께였다.
중간에 묶어놨던 말들이 다 사라져서 굳이 따로 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 범인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설기 말고 없지.’
강현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일행들 뒤로는 밧줄에 묶인 도둑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 숫자만 해도 서른이 넘었다.
그때, 한 기사가 다가왔다.
“강현, 이라고 했던가. 견습 기사였나?”
“아뇨.”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기사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럼 검은 어디서…. 아, 로벤투스 출신이었군.”
기사는 강현이 답하기도 전에 혼자서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이 떠나가는 기사를 멀뚱멀뚱 바라보자 아녜스가 피식 웃었다.
“로벤투스 출신이라면서 거기에 대해서는 모르나 봐?”
강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녜스는 그러한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안에서만 있으면 그럴 수도 있지.”
고개를 끄덕인 아녜스가 다시 입을 뗐다.
“로벤투스는 두 종족의 영역과 맞닿아 있어. 평화로울 때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을 때도 많았지.”
아녜스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주억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곳에서 사는 이들이 평범할 리가 없잖아. 다들 몸을 지킬 수단 하나쯤은 익히고 있어.”
전쟁이 터질 때마다 로벤투스는 최전선이었다.
당연히 그들의 선조들은 수많은 전쟁을 겪었다.
“맹약 이후로 명성이 옅어지긴 했지만, 이 근방에서 로벤투스를 무시할 수 있는 영주는 없어.”
몰랐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대단한 사람들이었구나.’
감탄하던 강현은 곧 무언가를 떠올렸다.
‘잠깐만.’
강현의 신분패를 만들어준 건 조반테였다.
로벤투스의 영주.
즉, 보증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처음부터 내 신분패를 보였으면 되는 거 아니야?’
이야기를 들어 보니 서신도 필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덕분에 그들이 강현을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너무 과보호잖아.’
마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와 같았다.
강현은 숲에서 만난 인연들을 떠올리며 웃음을 흘렸다.
고작 일주일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벌써 숲이 그리워졌다.
* * *
마을에 도착한 강현은 바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런 강현을 아녜스가 찾아왔다.
“가려고? 영주가 저녁에 밥 먹자는데?”
마치 동네 친구가 한잔하자고 했다는 듯이 가벼운 말투.
그러나 강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 저녁이 되려면 시간이 남았다. 더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제안을 거절하면 실례일까요?”
강현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아녜스가 미소 지었다.
“여기 주민이면 실례지. 하지만 그쪽은 아니야. 그 정도로 쪼잔한 영주도 아니고.”
아녜스의 말에 안도할 수 있었다.
“오헨하우어 님은….”
“거기라면 영주관에 머물기로 했어. 영주가 직접 가르침을 청했대.”
도둑들을 잡은 덕분에 오헨하우어의 지갑도 찾았다.
하지만 다른 문제도 생겼다.
도둑들이 달려들 때, 놀란 나머지 허리를 삐끗한 것이었다.
덕분에 꼼짝없이 며칠은 요양해야 했다.
아녜스의 말을 들은 강현은 걱정되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혀를 다쳐서 조용하지만, 회복된다면….
그런 강현의 걱정을 읽었는지 아녜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양반 정말로 대단한 양반이야. 영주라고 해도 함부로 할 수 없어.”
아녜스의 말을 들으니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런 이랑 말을 섞을 수 있는 것 자체가 영광이지.”
말과 달리 아녜스는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계약으로 맺어진 사이라고 했지만, 영주에게 받은 불만이 상당한 것 같았다.
‘하긴, 직장 상사 같은 거니.’
그녀의 심정이 이해되었다.
곧 그녀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자.”
“이건?”
작고 긴 통.
“말했잖아. 보상에 쩨쩨한 영주가 아니라고. 안에 서신이 들어 있어. 아버지나 그쪽 영주에게 전해 주면 알아서 보상해 줄 거야.”
아녜스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직접 보상을 주는 게 아니란 말인가?
“그렇게 볼 필요 없어. 거기 영주에게도, 너에게도 좋은 거야.”
그녀가 거짓을 말하진 않았을 거다.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서신을 품에 넣었다.
“그럼, 다음에 보자고.”
강현의 어깨를 두드린 아녜스가 방을 나섰다.
강현은 떠나는 아녜스를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음에?’
그저 인사치레라고 하기에는 느낌이 묘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강현의 시선이 옆방으로 향했다.
오헨하우어의 방. 그러나 그 주인은 영주관에서 요양 중이었다.
‘인사를 못 나누는 게 아쉽네.’
그러나 로벤투스로 온다고 했으니, 또 만날 수 있을 거다.
강현이 옆을 돌아보았다.
강현과 눈이 마주치자 설기의 눈이 반짝였다.
잔뜩 기대하는 눈빛.
설기 머리 위에 있는 토리도 같은 눈빛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밥이 아니었다.
“그럼, 이제 집에 갈까?”
“컹!”
모험은 끝났다.
이제 정말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강현의 물음에 설기가 힘차게 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