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저희 쪽에서 대접하죠.
‘사람?’
강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러나 강현보다 먼저 움직인 이가 있었다.
강현의 옆을 지나가는 하얀 털 뭉치.
“설기야. 잠깐만….”
강현은 순식간에 사라지는 설기를 보며 한숨을 내쉬고는 서둘러서 뒤따랐다.
뛰다시피 가다 보니 길 중간에 마차가 넘어진 게 보였다.
마차 앞에 서 있는 건 강현 또래의 사내와 어려 보이는 소녀.
옷차림이 이곳의 사람들과는 달랐다.
둘은 강현이 나타나자 경계 섞인 시선을 던졌다.
낯선 길에서 만나는 이에 대한 당연한 반응일 거다.
그때, 그들의 곁에 있던 설기가 쪼르르 강현의 곁으로 다가왔다.
“기다리랬잖아.”
“컹!”
강현은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소녀 쪽이 놀라움과 부러움의 시선을 던졌다.
강현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쓰다듬으려고 했구나.’
당연히 설기가 허락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설기 덕분에 그들의 경계심도 조금은 옅어졌다.
그러나 강현은 사내의 시선이 강현의 허리춤에 머물다 간 것을 깨달았다.
덕분에 강현도 사내의 허리춤에 검이 걸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냥 지나칠까.’
그러던 강현의 시선에 쓰러진 마차가 보였다.
안의 짐이 쏟아진 상태.
한두 개가 아니었다.
“여행자인 강현입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강현의 물음에 사내와 소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사내가 입을 열었다.
“짐을 싣고 가던 도중 말들이 날뛰었습니다. 그런 녀석들이 아닌데….”
사내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숲에서 맹수라도 봤나 봅니다.”
“아.”
원인이 짐작 갔다.
강현의 시선이 설기에게 향했다가 떨어졌다.
태연스럽게 하품하고 있는 녀석.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천진난만 표정이었다.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설기의 잘못은 아니지.’
강현이 부주의했을 뿐이었다. 설기 덕분에 안전하다는 것만 생각했지, 이런 일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원인을 알게 된 이상, 이렇게 지나칠 수도 없었다.
“먼저 마차를 일으켜 세우죠. 돕겠습니다.”
강현의 말에 둘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낯선 이의 친절을 경계하는 모습. 강현은 둘의 심정이 이해되었다.
“고마우면 나중에 보상해 주세요. 이렇게 놔두면 다른 마차도 지나가지 못할 겁니다.”
“아….”
그제야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달리 소녀는 아직도 의심스러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사내보다 소녀의 경계심이 더 짙은 것이었다.
“부탁드립니다. 이 은혜는 보답하겠습니다.”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소녀 역시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사내를 제지하지 않았다.
강현은 메고 있던 배낭을 벗었다.
자연스레 땅바닥에 떨어진 투구.
투구 안에 든 나뭇잎들을 보자 소녀의 경계심이 더욱 짙어졌다.
‘하긴, 다른 이가 보면 이상하겠지.’
강현은 쓴웃음을 흘리고는 마차의 옆으로 향했다.
“셋에 밀겠습니다.”
강현의 말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셋!”
셋을 외치자마자 둘이 힘을 줬다.
조금씩 들리는 마차. 그러나 쉽지 않았다.
‘뭐가 이리 무거워.’
겉으로 봤을 때보다 짐이 많았다. 올라가던 마차가 다시 내려오고 있었다.
강현은 황급히 옆을 돌아보았다.
강현의 눈빛을 읽은 설기가 후다닥 달려와서 몸으로 밀었다.
다시 조금씩 들리는 마차.
토리도 설기 머리 위로 올라가서 짧은 팔로 밀고 있었다.
“에잇.”
갑작스러운 소리에 옆을 보자 소녀가 밀고 있는 게 보였다.
“다시 셋을 세고 밀겠습니다. 하나, 둘…. 셋!”
“셋!”
“셋!”
이번에는 다 같이 셋을 외쳤다.
그와 함께 마차가 들썩거렸다.
조금씩 넘어가는 마차.
“조금만 더…!”
소녀의 외침에 강현과 사내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쿵!
마차가 완전히 넘어갔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일행들.
강현은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설기와 토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어.’
간지러운지 배를 까고 구르는 토리.
갸르릉.
그리고 설기가 기분 좋은 울음을 토했다. 문뜩, 시선을 느껴서 옆을 돌아보자 소녀가 부러운 듯이 설기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강현과 눈이 마주치자 흥, 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 소녀 옆으로 사내가 다가왔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슈 스테판입니다.”
손을 뻗는 마슈.
강현이 손을 마주 잡자 일으켜 세워 줬다.
“여행자인 강현입니다.”
강현은 다시 한번 자기 소개했다.
그러자 마슈가 옆에 있는 소녀를 보며 말했다.
“여긴 제 동생인 아나 스테판입니다.”
“동생이 아니라 상단주야.”
소녀가 뿌루퉁하게 말했다. 그러자 마슈가 쓴웃음을 지으며 강현을 보았다.
“그렇다네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마슈를 아나가 찌릿 째려봤다.
“상단이요?”
“예. 스테판 상단입니다. 지금은 보다시피 둘뿐이지만요.”
원래부터 둘은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강현의 시선이 마차로 향했다.
“그래서 짐이….”
이렇게 많았던 거구나.
남매의 여행으로 보기에는 어려웠다.
“예. 서쪽의 영주인 로벤투스와 거래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조반테 님이요?”
아는 이름에 강현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남매의 놀라움보다는 작았다.
“조반테 님이라니. 혹시 로벤투스 영주님과 친분이 있으신 겁니까?”
“예, 일단은….”
강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한 강현의 태도에 마슈가 입을 열었다.
“예. 지금이야 이름이 내려갔다지만, 한때는 이 왕국뿐만 아니라 대륙에서도 이름을 알리던 대가문이었잖습니까.”
그랬구나.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과거에 날렸다는 게 빈말은 아니었다.
그런 것치고는 조반테도 그렇고, 성 자체도 화려하지 않아서 자꾸 잊게 된다.
가세가 기울어도 백 년 사이에 성까지 무너졌을 리가 없으니, 원래부터 검소한 가문이란 뜻이었다.
“무슨 소리냐. 우린 로벤투스와 거래를 하는 게 아니다!”
“아나….”
마슈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아나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본 상회는 이종족들과 거래하러 가는 것이다!”
의기양양하게 외치는 아나. 그리고 아나의 말을 들은 마슈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종족이라면….”
“예. 수인과 요정입니다. 일단은 그걸 최우선으로 하고 차선으로….”
마슈가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지금의 시대에 저 말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지 알기 때문이었다.
“차선 따위는 없다! 우리 스테판 상단이 대륙 제일의 상회로 거듭나려면 그 수밖에 없으니라.”
짐짓 엄한 말투로 말하는 아나였지만, 나이가 어린 탓에 귀엽게만 느껴졌다.
강현의 시선이 마슈에게 향하자 마슈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제 동생, 독특하죠?”
차마 부정할 수 없는 강현이었다.
그런 둘의 이야기를 들은 아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강현은 아나가 뭐라고 하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이대로 로벤투스로 향하실 겁니까?”
강현의 시선이 마차로 향했다.
일으켜 세우긴 했지만, 제대로 다닐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마슈도 그걸 알았는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카브리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나마 그쪽이 가까워서.”
“저도 그리 향하고 있으니 돕겠습니다.”
강현의 말에 마슈의 표정이 환해졌다.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마차 때문에 곤란하던 마슈였기에 강현의 제의를 반겼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반드시 갚겠다.”
옆에 있던 아나까지 말을 보탰다.
어린애가 어른을 흉내 내는 말투.
강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강현과 마슈가 양쪽에서 마차를 잡고 끌었다.
기기긱, 기기긱.
조금씩 움직이는 마차.
설기가 끌면 금방이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둘이 어떤 이들인지 모르는데 설기에 대해서 알려서 좋을 게 없었다.
설령 둘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언제 이야기가 퍼질지 몰랐다.
땀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것도 의외로 운동이….’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생각을 하던 강현이 화들짝 놀랐다.
‘란돌프 씨와 노아 씨에게 너무 붙어 있었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상한 쪽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때, 설기가 강현의 앞길을 막았다.
“컹! 컹!”
설기의 다급한 짖음에 마차가 멈췄다. 마슈는 조심스러운 눈길로 주변을 살폈다.
그의 손이 자연스럽게 검으로 향했다.
“혹시 짐승이 온 겁니까?”
간혹 여행자 중에는 동물을 데리고 다니는 이들이 있다.
늑대는 드물지만 개나 새는 종종 있었다.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동물은 인간보다 감각이 예민했다.
아나 역시 익숙한지 마슈의 등 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둘의 반응에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아직도 설기는 불안한 듯 강현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이상이 없다면 이러지 않을 거다.
둘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강현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밥시간이 지나서 그렇습니다.”
“….”
“…아.”
해맑게 웃는 설기를 본 강현은 쥐구멍을 찾고 싶어졌다.
* * *
마차를 옆으로 세워 놓고 모닥불을 피웠다.
설기 덕분에 일행들의 분위기는 전보다 가벼워졌다.
당연하다는 듯이 요리를 준비하려는 강현을 마슈가 제지했다.
“식사는 저희 쪽에서 대접하죠. 식자재를 넉넉하게 챙겨 와서.”
그리 말하며 마차에서 도구와 재료를 꺼냈다.
자연스레 일어났던 강현도 자리에 앉았다.
‘오. 생각보다 본격적이네.’
냄비와 국자뿐만 아니라 도마와 식칼도 나왔다.
그렇게 팔을 걷어붙이는 마슈.
그러나 도마의 앞에는 이미 사람이 서 있었다.
“…아나, 네가 하게?”
어째서인지 불안해 보이는 마슈.
그러나 아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상단이 도움을 받았으니 상단주인 내가 대접하는 게 이치에 맞겠지.”
“하지만 너 요리….”
마슈의 말을 이어지지 못했다.
아나가 째려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 내가 요리를 못하는 건 두말라 왕국에서의 이야기다! 여기 베네스트라면 다르다.”
아나의 말에 마슈는 머뭇거리다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동생인 아나의 고집은 마슈가 잘 알고 있었다.
말려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대신 강현을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못 먹진 않을 거예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말투였다.
그러나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아까 한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요?”
강현이 신경 쓰이는 건 그 부분이었다. 그제야 마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음, 그게….”
“곤란하다면 이야기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곤란할 게 무엇이 있겠느냐. 베네스트 왕국의 요리가 맛없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왕국만 나서도, 아니, 왕도에 가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죄송합니다.”
아나를 대신해서 마슈가 고개를 숙였다.
이 왕국의 사람들에게는 실례되는 말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현은 개의치 않았다.
‘그렇구나.’
인간의 모든 요리가 이곳 마을 같지는 않다는 뜻이었다.
란돌프가 한 말이 조금 이해가 되었다.
왕국의 치부를 알리기 쉽지 않아서 돌려서 이야기한 것이었다.
마슈는 강현이 대수롭지 않게 넘기자 안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슈의 예상처럼 강현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 섞인 눈빛으로 아나를 보았다.
타국에서 온 상인들.
그곳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들의 음식 문화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