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제가 살게요
타닥, 타닥.
모닥불 위에 올려진 고기가 익어 가고 있었다.
혹시 몰라서 주머니칼을 챙겨 왔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이것도 힘들었을 거다.
옆에는 설기가 기대 섞인 눈빛으로 익어 가는 고기를 보고 있었다.
기름과 함께 설기의 침도 바닥에 떨어졌다.
“끼잉.”
“이제 거의 다 되었어.”
설기의 애처로운 표정에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어제부터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얼마 먹지 않았다.
그 때문에 배가 고픈 것이었다.
‘그래도 일반 성인보다는 많이 먹었지만.’
덕분에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강현은 고기의 살을 주머니칼로 갈라 보았다.
육즙과 함께 분홍빛 살이 드러났다.
꼬르륵.
“응?”
강현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소리가 들려온 곳은 설기의 뱃속이었다. 그러나 설기는 알아채지 못했는지 고기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웃음을 흘린 강현은 고기를 입안으로 가져갔다.
“음.”
고개를 끄덕이는 강현. 그러자 설기의 눈이 반짝였다.
“이제 먹어도 돼. 잘라 줄게, 잠시만.”
강현은 주머니칼로 고기를 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칼날이 짧은 탓에 쉽지 않았다.
막 익은 고기에 닿은 손이 화끈거렸다.
‘…이것도 해결해야겠네.’
손질할 때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고기 한 덩어리를 잘라서 설기에게 넘긴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준비가 너무 부족했다.
‘다른 검이 있긴 한데.’
강현이 힐끗, 자신의 허리춤을 보았다.
이건 반대로 너무 길었다.
게다가 선물 받은 검을 이런 일에 쓰고 싶진 않았다.
‘가장 좋은 건 이대로 가져가서 보관하는 거지.’
이번 여행에서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게 강현의 바람이었다.
‘그래, 이런 게 여행이지.’
처음부터 모든 게 완벽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하나둘 맞춰가야 했다.
강현은 고기 한 점을 썰어서 입에 넣었다.
입안으로 퍼져 가는 육즙.
역시나 밍밍한 맛.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강현은 새소리를 들으며 고기를 씹었다.
* * *
할짝할짝.
식사를 마치고 쉬고 있던 강현의 손을 설기가 핥았다.
아까 고기를 자르다 화상을 입은 곳이었다.
문제라면 식사를 마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설기의 입 주변에도 기름이 번들거렸다.
“…고마워.”
“컹!”
실소를 흘린 강현은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설기의 꼬리가 흔들렸다.
덕분에 따끔거리던 게 사라졌다.
물로 손을 씻은 강현이 먹은 자리를 정리했다.
“그럼 가 볼까?”
“컹!”
강현은 다시 발을 내디뎠다.
그렇게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 둘.
특히나 설기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앞서가면서 킁킁거리며 주변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나무와 풀까지.
평소보다 과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꼬리.
호기심에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지나가는 벌레를 쫓는 설기를 보며 강현이 미소 지었다.
‘설기도 여기까지 나온 적은 처음이겠구나.’
이곳이 생소한 건 설기도 마찬가지였다.
강현뿐만 아니라 설기에게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주변이 어두워졌다.
“음.”
강현의 걸음이 멈추자 설기의 눈빛이 반짝였다.
멈춘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점심 먹은 지 얼마 안 지난 것 같은데.”
벌써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재료를 손질하고 정리하는 데 시간을 너무 잡아먹은 것이었다.
한숨을 내쉰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설기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손질하기 쉽게 작은 녀석으로…. 이미 갔네.”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점심이 끝나자마자 잠깐 쉬었다가 다시 저녁 준비.
장소만 바뀌었을 뿐, 하는 일은 변함이 없었다.
“저녁 먹으면 곧 밤인가.”
이참에 야영할 장소까지 찾아 놓는 게 나을 거다.
강현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설기가 사라졌을 뿐인데 주변의 분위기가 바뀐 것 같았다.
그때, 꼼지락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고개를 내리자 아까까지 설기 머리 위에 있었던 토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래, 너도 있구나.”
강현은 웃음을 흘리고는 토리를 어깨 위에 올렸다.
강현의 어깨 위로 올라온 토리가 좌우로 몸을 흔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옆에서 느껴졌다.
강현은 그런 토리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설기는 알아서 찾아올 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강현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길목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잔디밭이 보였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잔디. 곳곳에 돌부리가 보였지만, 하룻밤 머무르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강현은 바로 배낭을 열어 텐트를 꺼냈다.
새로운 텐트.
설레는 마음으로 텐트를 펼쳐 보았다.
“음.”
분명 로멘이 개조한 새로운 텐트이건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강현의 텐트를 보고 영감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A형 텐트네.”
올리브색의 텐트. 흔히 국방색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잊고 있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얘도 군용 텐트라고 했던가.’
세상은 달라도 이런 건 비슷한 건가.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색까지 같을 필요는 없는데.”
이곳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산악지형이라서 그런 건가.
강현은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덕분에 설치하는 방법을 공부할 필요는 없었다.
폴대를 들어 올린 강현은 생각 외로 가벼워서 놀랐다.
여섯 개로 나눠진 폴대를 끼우자 두 개의 큰 폴대가 나왔다.
크다고 해도 기껏해야 강현의 허리춤까지였다.
순식간에 그럴싸한 텐트가 세워졌다.
“나쁘지 않네.”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막의 재질은 군대에서 쓰던 것보다 좋았다.
천막 아래 얇은 천이 하나 더 붙어있었다. 덧붙인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위의 천과 달리 깨끗했다.
‘설마, 직접 하신 건가?’
깔끔하게 된 박음질을 본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낡은 천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모포를 올려 준다.
“얘도 새로 산 거네.”
보들보들한 감촉.
절대로 군용으로 쓸 수 없는 것이었다. 강현을 위해 산 게 분명했다.
로멘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중에 보답해야겠어.’
강현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배낭을 텐트 안에 정리하던 강현의 눈이 커졌다.
배낭 안에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가죽?’
꺼내 보니 안에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다.
강현이 조심스레 열어 봤다.
안에 그림과 함께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그걸 본 강현의 눈이 커졌다.
‘지도구나.’
조반테가 챙겨 준 것이었다.
지도 한 편에 동그라미 쳐진 곳이 보였다. 옆에 작은 마을의 표시와 성의 표시도 보였다.
동그라미 쳐진 곳은 바로 강현이 있던 숲이었다.
나침반이 있기에 길을 잃진 않겠지만, 편의성은 지도가 나았다.
로멘에 이어서 조반테까지.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주변에서 이렇게 신경 써 줄 줄은 몰랐다.
그렇게 지도를 품에 넣은 강현은 텐트 밖으로 나왔다.
그에 맞춰서 수풀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설기인가?’
이제 슬슬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수풀 사이로 고개를 내민 건 설기가 아니었다.
둥근 눈망울.
길쭉한 다리.
‘사슴?’
그것도 어린 사슴이었다. 강현과 눈이 마주친 사슴이 움찔거렸다.
길을 잘못 든 걸까.
‘…그러고 보니 늑대 이외의 동물을 보는 건 오랜만이네.’
매번 숲속에 오지만 동물을 마주칠 일이 적었다.
잠시간의 대치.
움직인 건 사슴도 강현도 아니었다.
토리가 슬쩍 사슴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렇게 토리가 사슴에게 닿으려는 순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사슴이 바로 도망쳤다.
토리는 떠난 사슴을 보며 눈을 껌뻑였다.
그와 함께 수풀 사이로 하얀 털 뭉치가 튀어나왔다.
설기였다.
강현은 설기의 입에 물려 있는 멧돼지를 보며 실소를 흘렸다.
강현의 덩치보다 더 커 보이는 멧돼지.
숲에서 동물을 보지 못하는 이유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설기랑 함께 있는데 다른 동물이 접근할 리가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설기를 본 강현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가서 작은 녀석으로 바꿔 와.”
주머니칼로 얘를 손질했다가는 날이 샐 거다.
강현의 말에 해맑게 웃고 있던 설기의 꼬리가 축 처졌다.
* * *
이틀 동안 이어진 야영.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강현은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성과 비교할 순 없지만, 란돌프가 사는 마을보다는 커다란 규모였다.
“저 정도 크기라면 장비를 구할 수 있겠어.”
“컹!”
강현의 말에 설기의 눈이 반짝였다.
구이에 질린 건 설기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벌써 며칠째 못 씻었다. 슬슬 몸이 가려웠다.
자연스레 강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강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높게 솟은 목책.
그 앞에 서 있는 경비병들의 모습.
강현에게는 낯선 광경이었다.
‘일반 마을에도 경비를 서는 건가?’
성문에도 경비가 있었지만, 검문을 받은 적은 없었다.
란돌프와 함께였기 때문이었다.
긴장되는 게 당연했다.
“컹! 컹!”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설기 덕분에 정신을 차린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계속 서 있으면 더 수상하게 보일 거다.
그렇게 마른침을 삼킨 강현이 발걸음을 옮겼다.
곧 앞에 있던 경비병들과 눈이 마주쳤다.
“잠시 신분 확인이 있겠습니다.”
“아, 예.”
강현은 품에서 신분패를 꺼냈다.
그러자 신분패를 확인한 경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벤투스에서 오셨군요.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그게 끝이었다.
긴장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쉽게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목책 안으로 들어온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설기가 그런 강현을 돌아보았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아직 이르긴 하지만 밥부터 먹을까?”
“컹!”
마을 자체는 컸지만, 음식은 소야라고 불리던 마을과 큰 차이는 없었다.
재료의 손질부터 끓이는 방식까지.
특별할 게 없었다.
‘…이제 두 번째 마을이니.’
벌써 실망하긴 일렀다. 강현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는 설기도 얌전히 음식을 먹었다. 이제 점점 적응되고 있는 것이었다.
“내일부터는 속도를 높여야겠네.”
여유로운 것도 좋지만, 이대로라면 란돌프가 말한 다양한 요리를 먹어 보기도 전에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그 전에.’
강현은 포크를 내려놨다.
* * *
전날 목욕을 한 덕분에 아침은 개운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따뜻한 물도 아니라 그저 미지근한 물이었지만, 이마저도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아침 일찍 일어난 강현이 향한 곳은 대장간이었다.
쓸만한 장비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처럼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냄비? 그만한 냄비를 어디다 쓰려고. 냄비라면 자고로 이 정도의 크기는 돼야지.”
수염이 검게 그을린 사내가 옆에 있던 냄비를 두드렸다.
커다란 냄비.
강현의 몸통보다 커다랬다.
저 정도 크기라면 십 인분도 끓일 수 있을 거다.
‘저걸 들고 다니는 건 힘들지.’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가족 중심의 사회이다 보니 식기도 그에 맞춰서 만드는 것이었다.
‘더 큰 마을을 찾아가야겠네.’
큰 마을이라면 작은 가구를 위한 식기도 있을 거다.
여기서는 식칼을 구한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또 한동안은 어쩔 수 없이 구이만 먹어야겠군.’
그래도 식칼이 있으니 손질은 편해질 거다.
그렇게 대장간을 나서려던 강현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사장님, 저건 뭐죠?”
“사장? 이상한 호칭이구먼. 뭐긴 뭐야 투구지. 전에 온 여행자가 하도 부탁하길래 사 줬는데, 영 쓸데가 없어.”
벽에 걸린 건 은색의 투구였다.
“좋네요.”
“그렇지. 녹여서 쟁기나 만들…. 뭐?”
“딱 좋아요. 저 냄, 아니, 투구 제가 살게요.”
투구를 바라보는 강현의 눈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