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벌써 일어났는가?
돌아온 란돌프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강현, 역시 자네는 멋진 친구야.”
“예?”
“아닐세. 밤이 짧으니 어서 가지.”
란돌프가 강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늘 제대로 마셔 보자고.”
의아해하는 강현과 달리 사정을 알고 있는 로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란돌프는 그런 로멘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아니, 이 사람이.”
로멘의 눈썹이 올라갔지만, 곧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멋대로 하라는 듯이 힘을 뺐다.
그렇게 일행들이 성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진 상태였다.
“난 영주님께 보고하고 오겠네.”
란돌프의 시선이 로멘에게 향했다.
로멘은 고개를 저었다.
란돌프와 달리 영주에게 임무를 받은 게 아니었다. 굳이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럼, 강현을 부탁드립니다.”
“알았으니 다녀오게.”
다급해 보이는 표정. 화장실이라도 급한 걸까?
로멘의 말이 끝나자마자 란돌프가 달려 나갔다.
그렇게 란돌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로멘이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강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강현, 자네도 어서 결혼하게.”
“예?”
“그럼 알 거야.”
대체 뭘 안다는 걸까.
그러나 로멘은 답을 알려주지 않고 강현을 보며 고개를 한 번 젓더니 휘적휘적 걸어갔다.
“컹!”
고개를 돌리자 설기가 로멘의 흉내를 내듯 고개를 젓고는 걸어갔다.
어안이 벙벙해진 강현이 눈만 껌뻑였다.
* * *
성안으로 들어가자 곳곳에서 램프들이 마을을 밝히고 있었다.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불빛들.
낮에 왔을 때와는 다른 마을처럼 느껴졌다.
설기도 신기한지 킁킁 냄새를 맡고 있었다.
강현이 두리번거리자 로멘이 재촉했다.
“이쪽일세.”
강현은 로멘을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 외곽에 있는 골목길.
희미한 불빛이 더 스산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현대에 살던 이에겐 당연한 일일 거다.
그렇게 로멘을 따라 걷다 보니 어디선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골목길 가운데 유난히 불빛이 밝은 곳이 있었다.
로멘은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낡은 문이 열리자 소란스러움은 더욱 커졌다.
안에서 떠들던 이들이 로멘을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마법사님.”
“편히들 있게.”
로멘은 일어나려는 이들에게 손짓하고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제야 강현은 이곳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주점이구나.’
마을에서 안면이 있던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강현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이쪽을 힐끗거리던 이들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때, 건장한 체격의 중년인이 다리를 절뚝이며 다가왔다.
“마법사님, 오랜만에 오셨군요.”
중년인은 험악해 보이는 인상과 어울리지 않게 앞치마를 매고 있었다.
중년인뿐만 아니라 앉아있는 손님들도 다들 체격이 건장했다.
곧 중년인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이 분이 소문의 그분이군요.”
소문의?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중년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로멘이 입을 열었다.
“주문은 일행이 오면 할 테니 벌꿀주 두 잔만 먼저 주시게.”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떠나는 중년인을 보던 강현이 로멘을 돌아보았다.
“자주 오셨나 봐요?”
강현이 알기로 로멘은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한 강현의 물음에 로멘이 쓴웃음을 지었다.
“단장의 단골집이라네.”
“아.”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자주 올 수밖에 없을 거다.
강현의 시선이 중년인이 사라진 주방으로 향했다.
그런 강현의 시선을 깨달은 로멘이 실소를 흘렸다.
“여기서도 요리 생각인가?”
“…궁금해서요.”
강현이 멋쩍게 웃었다.
“오늘은 바쁜 것 같으니 다음에 한번 부탁해 보겠네.”
“아뇨. 굳이 그럴 필요는….”
“정말로?”
로멘의 시선에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중세 시대의 주방.
흥미가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로멘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정도의 친분은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나.”
그때, 주방에서 중년인이 술잔을 들고나오는 게 보였다.
일행에게 다가온 중년인은 테이블 위에 술잔을 올려놓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잔.
술잔에서 달콤한 향이 올라왔다.
전에 마을에서도 마신 적이 있는 벌꿀주.
로멘이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여기 벌꿀주는 음식과 달리 제법 먹을 만할 걸세.”
로멘의 말에 강현이 놀라서 중년인을 힐끗거렸다.
그러자 중년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마법사님, 그런 이야기를 제가 없을 때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사실이지 않나? 내 말이 못마땅하면 자네 아내에게 요리를 좀 배우게. 주점의 주인이라는 양반이 요리를 그리 못해서 쓰나.”
“옳소!”
“맞아. 술은 인정하지만, 요리는 너무했어.”
로멘의 말에 곳곳에서 호응 소리가 들려오자 중년인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로멘이 웃으며 입을 뗐다.
“이 친구에게 잘 보이게. 혹시 아는가? 쓸만한 요리를 알려 줄지?”
“이분 말입니까? 수인과 거래 책임자 아닙니까?”
중년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로멘이 혀를 찼다.
“에잉, 주점의 주인이란 이가 그리 정보가 느려서야. 이 친구는 요리사야. 영주님도 인정했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지.”
로멘의 칭찬에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영주한테 요리를 해 준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짚이는 게 없었다.
그러는 사이 중년인은 놀란 눈으로 강현을 바라보았다.
“진짜입니까?”
“아니….”
강현이 입을 열려는 찰나 주점 문이 벌컥 열렸다.
문이 꽉 찰 정도로 거대한 덩치.
바로 란돌프였다.
란돌프를 본 이들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떠올랐다.
“단장님.”
“단장님.”
란돌프가 손을 흔들었다.
로멘이 들어왔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곧 손님 중 하나가 입을 뗐다.
“단장님이 이 시간에는 어쩐 일입니까? 오늘 야간이셨습니까?”
“이게 근무하는 복장으로 보이나? 톰, 자네야말로 슬슬 들어가 봐야 하는 게 아니야? 지난번처럼 쫓겨나려고 그러나?”
입을 뗐던 이의 눈이 움찔하고 떨려왔다.
“…안 그래도 슬슬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단장님은?”
란돌프는 손님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던졌다.
그러자 손님의 얼굴이 굳었다.
“오늘의 나는 다르다네.”
두 손을 올리는 란돌프.
곳곳에서 탄식과 함께 부러운 시선이 쏟아졌다.
심지어 음식을 나르던 중년인조차 부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 자. 들어가야 하는 이들은 어서 들어가게. 시간이 늦었어.”
란돌프의 말에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키는 이들.
곧 구석에 있는 누군가를 발견한 란돌프의 눈이 번뜩였다.
“페드로.”
“저, 저도 허락을 맡았습니다.”
“내가 확인해 볼까?”
란돌프의 물음에 페드로라고 불린 사내가 울상을 지었다.
그도 일어나자 란돌프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좋아. 이제 자유로운 늑대들만 남았군.”
“낑?”
란돌프의 말에 설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봐도 늑대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강현이 웃으며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은 내가 내지! 마음껏 즐기게.”
란돌프의 말에 환호성이 울렸다.
“물론, 내일 아침 근무인 이들은 알아서 조절하게. 근무에 지장이 생기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단장님.”
“맞습니다.”
그 모습을 본 강현의 눈이 커졌다.
“설마, 여기 있는 이들 전부….”
로멘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이나 병사들일세.”
그제야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던 이유를 깨달았다.
‘어쩐지, 다들 인상이….’
강현은 머리를 흔들어서 떠오르는 생각을 날려 버렸다.
저들에게 실례였다.
그와 함께 란돌프가 저리도 좋아하는 사정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거구나.’
하지만 의문이 생겼다.
“…술은 낮에도 마시지 않습니까?”
그게 저리도 좋아할 만한 일인가. 그저 낮과 밤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런 강현의 말에 로멘이 혀를 찼다.
“자네도 결혼하면 알 걸세.”
성에 오기 전에 로멘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강현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설마 로멘 님도….”
그러자 로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나이가 몇인데 가정이 없겠는가.”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밌게 하고 계십니까?”
란돌프가 둘에게 다가왔다.
“내 가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네.”
“아하.”
란돌프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족분들은….”
말을 꺼내던 강현이 입을 다물었다.
평소 로멘이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던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속사정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자 로멘이 웃음을 흘렸다.
“그리 눈치 보지 않아도 되네. 우리 집안은 마법사 가문이야. 마법사들은 개인적인 성향이 강하지. 자식들도 다 커서 제 앞가림하고 있을 뿐이네.”
란돌프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강현은 모르고 있었지만, 마법사는 고급 인력이었다.
가문 전체가 같은 영지에서 일하는 게 드문 편이었다.
거기까지 이야기한 로멘이 고개를 돌렸다.
중년인이 왔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먹던 걸로 십 인분 주게.”
“십 인분이나요?”
중년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란돌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잘 먹는 이가 같이 왔거든. 그걸로 부족할 수도 있네.”
중년인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중년인의 시선을 읽은 강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란돌프가 이야기한 건 강현이 아니라 설기였다.
중년인이 돌아가고 란돌프가 잔을 들어 올렸다.
“어떤가? 이런 곳도 나쁘지 않지?”
떠들썩한 주점.
마을에서 마실 때와는 달랐다.
란돌프의 물음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의 온기가 느껴졌다.
“진작에 자네를 데려오고 싶었지.”
그렇게 술을 마시고 있으니 중년인이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
거대한 쟁반에 담긴 고기.
‘직화로 구웠구나.’
언젠가 란돌프가 구웠던 고기를 떠올리게 하는 투박함이었다.
“여기서는 이게 그나마 먹을 만할 걸세.”
“….”
란돌프의 말에 강현의 시선이 다시 중년인에게 향했다.
“…단장님마저.”
중년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방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 들게.”
란돌프는 그런 중년인을 놔두고 고기를 썰었다.
그리고 큼지막한 덩어리를 설기 앞에 놓았다.
“….”
고기를 확인한 설기가 강현을 돌아보았다.
이미 냄새만으로 고기의 맛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강현은 모른 척 고기를 썰었다. 이제부터 여행을 다닐 거다.
이곳의 입맛에 익숙해져야 했다.
“끼잉.”
앓는 소리를 낸 설기가 고기를 물었다.
그걸 본 강현도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음.’
질기고 밍밍했다. 그리고 올라오는 누린내까지.
하지만.
‘수인들의 마을에서 먹던 것보단 낫네.’
벌꿀주로 입을 축였다.
이제는 이세계에 익숙해진 강현이었다.
* * *
다음날, 강현은 눈을 뜨자마자 여관 밖으로 나왔다.
란돌프가 잡아 준 숙소.
강현의 집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텐트에서 자는 것보단 나았다.
성벽 너머로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과 거리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이세계에 왔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강현, 벌써 일어났는가?”
고개를 돌리자 웃통을 벗고 있는 란돌프가 보였다.
새벽부터 운동이라도 했던 걸까.
땀으로 몸이 번들거렸다.
“조금만 기다리게. 아침은 내성에서 먹을 테니.”
란돌프의 말에 강현의 눈이 커졌다.
내성.
바로 영주가 사는 곳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