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벌써 오는군
란돌프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란돌프가 강현을 보며 미소 지었다.
“검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 겨눠지는 것만 그런 줄 알았는데, 겨눌 때도 마찬가지더군.”
강현의 눈이 커졌다.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수습 기사들보다 나아. 검을 많이 다뤘기 때문인가, 아니면 늑대의 축복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건 큰 재능이야.”
옆에 있던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강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로멘이 입을 뗐다.
“정 불안하면 저 아가씨랑 가는 건 어떤가?”
“저, 저요?”
갑작스러운 지목에 하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와 꼬리만 가리면 수인인 걸 모르겠지. 둘을 공격하려고 하면 천벌이 내려올 거야.”
그리 말한 로멘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맙소사.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당황하던 하만이 곧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 조금 무섭지만, 열심히 해 볼게요!”
그런 하만의 반응에 로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농일세, 농.”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하만.
맞는 말이었다. 자칫하면 하만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맹약이란 게, 정말로 까다롭네.’
강현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로멘이 웃자 긴장이 풀어진 하만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곧 둘밖에 웃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의외로 괜찮은 방법일지도.”
“나쁘지 않다.”
란돌프에 이어서 노아까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말을 꺼낸 로멘의 표정이 당혹스러워졌다.
그리고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양쪽을 바라보는 하만.
란돌프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만을 놀린 것이었다.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볼을 부풀리는 하만.
“미안하네.”
란돌프가 하만을 향해 사과했다.
그러나 노아는 고개를 저었다.
“난 진심이었다. 음, 그런 식으로도 이용할 수 있겠어.”
골똘히 생각에 잠긴 노아. 일행들은 그런 노아를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강현, 자네에게는 설기가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걸세. 저리 보여도 맹수 중에 맹수야.”
자신을 말한다는 걸 알아챘는지 도도하게 고개를 드는 설기.
자신만 믿으라고 어필하는 것 같았다.
귀여운 모습에 일행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설기는 기사들이라고 해도 쉽게 이기지 못할 거야.”
란돌프의 말에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설기가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란돌프가 저리도 높게 평가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우리 왕국은 치안이 좋은 편이지. 큰일은 없을 거야.”
옆에 있던 로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강현도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뜩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럼 대련할 필요 없던 거 아닌가.’
그런 강현의 기색을 읽었는지 란돌프가 강현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하지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나쁠 게 없지.”
란돌프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몸을 지킬 수단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그럼, 나머지는 마을에서 마저 이야기하고….”
란돌프의 시선이 강현의 옆으로 향했다.
란돌프를 따라서 고개를 돌린 강현의 입에서 탄성을 뱉었다.
한쪽에 세워 놨던 강현의 배낭.
“맞다. 드시면서 하시죠.”
강현이 배낭을 열자 란돌프가 멋쩍게 웃었다.
“아까부터 신경이 쓰이더군.”
“저, 저도요!”
하만이 손을 번쩍 들었다.
동시에 하만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아우….”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는 하만.
코가 예민한 만큼 배낭 안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강현은 배낭에서 김밥 한 줄을 꺼냈다.
“이건 벗겨 먹….”
탁!
하만이 잡기도 전에 작은 그림자 하나가 김밥을 낚아챘다.
울상을 짓는 하만.
“미안하군.”
노아가 짧게 사과를 건넸다. 고개를 돌리자 종이 포일 채로 김밥을 쑤셔 넣는 모나가 있었다.
한입 물더니 퉤, 퉤 하고 종이를 뱉어내는 모나.
한숨을 내쉰 노아가 모나에게 걸어갔다.
급히 김밥을 숨기는 모나.
하지만 노아의 손을 피할 순 없었다.
“겉에만 벗기면 되나?”
“예.”
노아의 물음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는 종이 포일을 벗긴 후에 앞으로 던졌다.
후다닥.
금세 달려가서 낚아채는 모나.
웃음을 흘린 강현은 새롭게 김밥을 꺼냈다. 그리고 혹시 몰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설기야, 네 건 금방 줄게.”
“컹!”
씩씩하게 대답하는 설기. 모나와 달리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아침에 먹어 봤기 때문이었다.
강현은 하만을 시작으로 일행들에게 김밥을 하나씩 나눠 줬다.
일행들은 김밥을 들고 강현을 보았다.
강현의 시범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노아가 벗기는 걸 보았지만, 제대로 된 모습은 아니었다.
초롱초롱한 눈빛들.
‘이럴 만한 건 아닌데.’
강현은 흘러나오는 웃음을 삼키고는 김밥을 벗겼다.
“이렇게 벗기고 먹으면 됩니다.”
앞에서 한 입 베어 물자 오오, 하고 감탄이 들려왔다.
덕분에 강현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람들은 김밥을 먹기 시작했다. 강현은 김밥 하나를 새로 까서 설기에게 건넸다.
덥석.
바로 김밥을 삼키는 설기.
“맛있어요!”
“음, 색다른 느낌이야.”
금세 사라지는 김밥. 아쉬워하는 하만을 보며 강현이 배낭을 뒤집었다.
“많으니까 더 드셔도 됩니다.”
일행들의 눈이 반짝였다. 일행들의 손이 분주해졌다.
란돌프는 하나씩은 성에 안 차는지, 두 개를 벗기고 한 번에 물었다.
‘썰지 않기를 잘했네.’
두 개의 김밥을 삼킨 란돌프가 감탄을 토했다.
“크으, 역시 자네의 요리는 최고야. 로멘 님, 안 그렇습니까?”
“맞네.”
란돌프의 말에 고개를 로멘이 진지한 표정으로 강현을 돌아보았다.
“여행 가서는 함부로 요리해주지 말게. 자네의 실력을 알면 다른 귀족들이 탐낼 거야.”
로멘의 말에 강현이 멋쩍게 웃었다.
뭘 그렇게까지.
그러나 란돌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왕도 탐낼 겁니다.”
둘의 표정을 보면 농담을 건네는 게 아니었다.
‘…진짜야?’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그러나 이미 둘의 시선은 다시 김밥으로 향한 뒤였다.
또 한 줄의 김밥을 먹은 란돌프가 입맛을 다셨다.
“술이 없는 게 아쉽군.”
“제가 가져올까요?”
란돌프의 말에 하만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란돌프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날도 있어야지. 나중의 즐거움을 위해 참을 줄도 알아야 하네.”
강현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던지는 란돌프.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강현에게서 시선을 뗀 란돌프가 노아와 하만을 보았다.
“언젠가 자네들도 마을에 초대하고 싶군.”
갑작스러운 말에 노아와 하만의 눈이 커졌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랬으면 좋겠네요.”
노아에 이어서 하만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로멘이 입을 뗐다.
“머지않아 가능할 걸세. 신들도 우릴 보고 있을 테니.”
로멘의 시선이 강현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언젠가 에밀리야가 했던 말과 비슷했다.
“그전까진 여기서 어울리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음.”
고개를 끄덕이는 일행들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어있었다.
그때, 노아가 몸을 일으켰다.
벌써 가려는 건가?
하지만 일어난 노아는 강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를 채웠으니 몸을 움직여야지. 검술 실력을 확인했으니 이제 체술이다.”
“…예?”
강현은 눈을 껌뻑였다.
대련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대련이란 말인가.
게다가 설기가 있으니 괜찮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른 분들은 아직 식사 중이니….”
“음?”
강현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수북하게 쌓인 종이 포일들.
‘언제….’
이미 김밥은 남아 있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배가 볼록하게 올라온 설기와 모나가 보였다.
둘은 나무 그늘에 누워 있었다.
“우린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네.”
“그래, 편하게 하게.”
란돌프에 이어서 로멘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눈을 빛내고 있는 하만까지.
한숨을 내쉰 강현이 몸을 일으켰다.
“길에서 만난 강도라고 생각하고 진심으로 와라.”
길에서 강도를 만난 적이 없어서 어떤 느낌인지 모르겠지만, 강현은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열심히 바닥을 굴렀다.
* * *
“음…. 강현, 괜찮나?”
“…아뇨.”
마을로 돌아가는 길. 로멘이 강현을 향해 걱정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강현의 대답에 로멘이 혀를 찼다.
“에잉, 좀 살살 하지.”
그러나 강현은 자신이 넘어질 때마다 일어나라고 외치던 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강현의 시선에 로멘이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다.
“하늘이 정말 맑군.”
로멘의 말과 달리 하늘은 평소보다 어두웠다.
“끼잉.”
설기가 다가와서 몸을 비볐다.
괜찮냐는 물음.
그러나 설기를 보는 강현의 시선도 로멘을 볼 때와 다를 게 없었다.
‘너도 마찬가지야.’
강현이 바닥을 구르고 있는 동안 설기는 꿀잠을 잤다.
얼마나 푹 잤는지 침까지 흘리고 있었다.
설기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하핫,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게. 노아도 자네를 걱정해서 평소보다 강하게 한 것이야.”
“…알고 있습니다.”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강현도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다른 감정도 있긴 했지만.’
란돌프와의 대련을 보고 자극받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강현을 위한 것이란 건 사실이었다.
그렇게 앞서 걷던 란돌프가 하늘을 보며 입을 열었다.
“몸은 좀 회복되었나?”
“예.”
“그럼 속도 좀 높이지. 이대로라면 마을에 도착하면 밤이겠어.”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슬쩍 로멘을 보았다.
사실 좀 더 빨리 걸을 수 있었는데, 로멘의 걸음에 맞춘 것이었다.
란돌프 역시 로멘을 보고 있었다.
둘의 시선에 로멘이 한숨을 내쉬더니 힘없이 걸어갔다.
“…살살 부탁하네.”
“맡겨주십시오.”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란돌프.
강현은 뒤에 벌어질 일을 예상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란돌프가 로멘을 들쳐 멨다.
‘어쩐지 익숙해 보이더라.’
노아보다 편했다.
이걸 승차감이라고 해야 하나, 승인감이라고 해야 하나.
란돌프의 어깨에 실린 로멘이 앓는 소리를 냈다.
“…내가 언젠가 이동 마법을 개발하고 만다.”
“로멘 님이라면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란돌프의 응원에 로멘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와 함께 란돌프가 달리기 시작했고, 강현 역시 란돌프를 뒤따랐다.
이미 배낭은 비어 있는 상태.
둘은 숲 사이를 가로질렀다.
* * *
마을의 모습이 보이자 란돌프가 걸음을 멈췄다.
뒤따라가던 강현은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잠깐 여기서 기다리게. 아내에게 말하고 올 테니.”
갑작스러운 란돌프의 말에 강현은 눈을 껌뻑였다. 같이 가는 게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미 란돌프는 마을을 향해 뛰어가는 중이었다.
‘…더는 못 뛰어.’
강현은 결국, 란돌프를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란돌프의 어깨에 실려 왔던 로멘은 뛰어온 강현보다 심하게 헐떡였다.
“에구구. 나 죽네, 죽어.”
“…괜찮으세요?”
“아니….”
아까도 나눴던 대화. 그러나 사람이 바뀌었다.
“마법사에겐 허리가 생명이거늘. 배려가 부족해.”
“컹!”
“이것 봐라. 설기도 아는 걸….”
로멘의 우는 소리를 듣던 강현은 새로운 걸 깨달았다.
어느샌가 설기를 하얀 늑대가 아니라 설기로 부르고 있었다.
‘로멘 님뿐만이 아니었어.’
그러고 보면 란돌프도 설기라고 불렀다.
그만큼 친해진 것이었다.
강현은 설기를 보았다.
해맑게 웃고 있는 설기. 천진난만한 모습에 강현도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로멘이 쉬고 있던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오는군.”
로멘의 말대로 마을에서 달려오는 란돌프의 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