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이걸로 하게
할아버지 댁에서의 저녁이 찾아왔다.
마루에 걸터앉은 강현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붉은 노을과 나지막이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마루에서는 오래된 나무 향이 올라오고 있었다.
강현의 집이나 숲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오래된 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풍취.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 댁에서 자 본 적도 오래되었네.’
자주 오긴 했으나, 이세계로 넘어가는 문이나 다름이 없었다.
청소할 때를 제외하면 이렇게 오래 머문 적은 없었다.
강현은 천천히 집을 둘러보았다.
마치 이 집만 세상에서 단절된 것처럼 보였다.
어릴 적에는 이런 적막함이 무섭게 느껴졌다.
이제는 운치가 느껴지니 새삼스레 어른이 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푸드덕, 푸드덕.
갑작스러운 소리에 강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소란과 달리 옆은 평온해 보였다.
강현과 눈을 마주치자 고개를 갸웃하는 설기와 뒹굴고 있는 토리.
무엇 하나 새로울 게 없는 모습.
하지만 강현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이와 같은 평온이 거짓으로 만들어진 걸 알기 때문이었다.
“설기, 뱉어.”
강현의 말에 설기의 몸이 움찔거렸다.
굳어 있는 꼬리를 본 강현이 일어났다.
그 순간, 강현이 말릴 새도 없이 무언가를 꿀꺽 삼켰다.
“맙소사.”
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뭘 먹은 걸까?
해맑게 웃으며 입을 벌리는 설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어필이라고 하려는 건가. 하지만 그걸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탈 날 일이 없다는 것에 안도해야 하나?’
한숨을 내쉰 강현이 마루에 누웠다.
겨우 반나절 있었을 뿐인데 며칠이나 지낸 것 같았다.
“…음.”
여기서 이주 가까이 지내야 하는 걸까?
“너무 긴데.”
“끼잉?”
강현의 말에 설기와 토리가 돌아봤다.
모처럼의 휴가.
집에만 있기에는 아까웠다.
그런 강현의 머릿속에 란돌프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강현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엎드려 있던 설기도 덩달아 일어났다.
눈을 반짝이는 설기.
설기의 눈에서 기대감을 읽은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밥은 아직이야.”
“끼잉.”
실망감에 올라왔던 꼬리가 다시 내려갔다.
피식 웃은 강현은 설기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설기야, 내일은 일찍 나갈 거야.”
“컹!”
이세계로. 강현의 말에 설기가 힘차게 짖었다.
* * *
아침이 되자마자 강현은 짐을 챙겼다.
그런 강현의 모습에 설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와 챙기는 게 다르기 때문이었다.
“컹! 컹!”
설기가 냉장고가 있는 방향으로 짖었다.
시골집에 어울리지 않는 영업용 냉장고.
‘혹시 몰라서 사놓고 안 써서 돈 낭비했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먹을 건 안 가져갈 거야.”
“…!”
설기의 눈이 떨려 왔다.
충격이라도 받은 눈빛으로 강현을 바라보는 설기.
그러한 설기의 모습이 안쓰럽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는 만들러 가는 게 아니라 먹으러 가는 거니깐.
실망한 설기를 본 강현이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을에 언제 도착할지 모르니 도시락 정도는 챙기는 게 나으려나?”
란돌프를 찾으러 마을로 향해야 했다.
강현이 냉장고로 걸어갔다.
그러자 설기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쫓아왔다.
냉장고를 열어 본 강현.
“음….”
도시락은 간편한 게 좋았다. 그러나 재료가 마땅해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강현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래, 도시락은 김밥이지.”
강현이 냉장고 안에 손을 뻗었다.
* * *
막 지어진 흰 쌀밥에 소금과 참기름을 넣고 잘 저어 준다.
그렇게 밑간이 된 밥을 김 위에 고르게 펴 준다.
이제 속 재료를 넣어 주면 된다.
보통이라면 햄과 단무지, 달걀부침이 기본이지만….
‘없으니.’
있는 건 달걀부침 정도였다.
구운 소고기를 얇게 썰어 준다.
이어서 피클을 큼지막하게 다져서 올려 줬다.
햄과 단무지 대신이었다.
거기다 무친 시금치까지 올려 줬다.
“…조금 과한가?”
강현은 두툼한 소고기를 보며 웃음을 흘렸다.
“컹! 컹!”
“괜찮다고?”
강현의 물음에 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식 웃은 강현이 김밥을 말았다.
여기서 포인트는 물이었다. 김이 풀리지 않게 끝부분에 물을 발라 준다.
그리고 잘 말아진 김밥에 다시 참기름 바르면 완성.
바로 썰어서 입에 넣었다.
“…나쁘지 않아.”
강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컹!”
옆을 보자 설기와 토리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강현은 두 덩어리를 자른 후 큰 건 설기에게, 작은 건 토리에게 건넸다.
김밥을 덥석 물더니 한 번에 삼키는 설기.
살랑살랑 꼬리가 기분 좋게 흔들렸다.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김밥을 말기 시작했다.
* * *
이어지는 단순 작업.
그저 반복해서 김밥을 말뿐이었다.
설기와 토리는 흥미가 식었는지 구석에서 쉬고 있었다.
하지만 강현은 지루해하지 않았다.
‘이것도 은근히 재밌네.’
아마 다른 이가 강현의 속마음을 들었다면 고개를 내저었을 거다.
그러나 강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났다.
애당초 요리의 기본은 반복이었다.
양파나 감자를 까는 것부터 칼질까지.
이런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다.
덕분에 너무 집중해 버렸다.
어느새 쌓여있는 김밥을 보며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언제 이렇게 많이.”
혹시 부족할까 봐 새로 앉혔던 밥솥마저 비어 있었다.
‘중간에 고기를 몇 번 더 구웠지?’
두 번? 세 번?
곧 세는 걸 포기했다.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강현은 산처럼 쌓인 김밥을 보며 볼을 긁적였다.
“남으면 마을 사람들 나눠 주면 되니깐.”
강현은 종이 포일을 들었다.
이 정도의 양이면 하나하나 포장하는 것도 일이었다.
그렇다고 용기에 넣기도 애매했다.
빈 용기는 짐이 되기 때문이었다.
‘…마을에 맡기면 되지 않을까?’
곧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나약한 소리였다.
“요리사가 수고를 마다할 수는 없지.”
그나마 자를 필요가 없는 게 어디인가.
강현은 하나하나 포장하기 시작했다.
* * *
그렇게 포장을 끝내고 강현은 이세계로 넘어갔다.
언제나 그렇듯 상쾌한 공기가 강현을 맞이했다.
한국이 쌀쌀해진 탓인지 따뜻하게 느껴졌다.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던 강현이 배낭을 들쳐 멨다.
그리고 곧 묵직한 무게에 실소를 흘렸다.
평소보다 더 무거운 것 같았다.
‘…점점 가벼워질 테니.’
설기가 도와줄 거다. 강현은 허리춤에 있는 목검을 두드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목검. 없으면 허전할 정도였다.
“좋아.”
언제나 란돌프 쪽에서 찾아왔지, 강현이 찾아간 적은 없었다.
조금 설레왔다.
‘란돌프 씨도 놀라겠지?’
강현은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역시, 강현 자네군.”
“엉?”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눈을 껌뻑였다.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사내가 웃고 있었다.
“란돌프 씨? 어째서….”
“아, 마침 근처를 지나는 중이었네. 익숙한 기척이 느껴져서 설마 했지. 음? 그런데 표정이 안 좋군. 무슨 일이 있나?”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강현은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의문도 떠올랐다.
‘…숲에 너무 자주 오는 거 아닌가.’
숲의 짐승을 사냥하는 것도 란돌프의 임무였다. 그러나 그 이외에도 일이 많을 터. 이렇게 쉽게 만날 줄은 몰랐다.
‘고작 한 걸음만 걸었을 뿐인데.’
고개를 갸웃한 란돌프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인가? 자네가 오기엔 아직 이를 텐데?”
란돌프의 말에 강현의 정신이 돌아왔다.
“란돌프 씨를 찾아가려고 했어요.”
“나를?”
란돌프가 의아하다는 듯이 강현을 보았다.
“예. 이야기 좀 여쭤보려고요. 란돌프 씨는 오늘 어쩐 일로….”
“호위라네.”
호위. 그 말에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아무리 찾아도 일행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곧 란돌프가 고개를 돌렸다.
“마침 오는군.”
곧 수풀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호위 대상을 버려 두고 가는 호위가 어디 있나, 대체.”
“로멘 님?”
지팡이를 짚고 오던 로멘이 강현을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 오랜만이군, 강현.”
“예. 안녕하셨어요?”
로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로멘과 인사를 나누고 있자 란돌프가 입을 열었다.
“음, 그럼 일단 자리를 옮기지. 이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좁겠어.”
란돌프의 말에 강현이 의아해했다.
고작 셋이 아닌가.
아니, 설기와 토리까지 다섯.
다섯이 머물기에는 적지 않았다.
하지만 강현은 곧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바아압!”
“스승님!”
수풀 사이로 익숙한 얼굴들이 나타났다.
* * *
숲속 공터가 금세 북적거렸다.
노아와 모나, 하만까지.
이만한 인원이 모인 건 오랜만이었다.
에밀리야만 오면 전에 먹었던 인원이 다 모인 것이었다.
‘…김밥이 남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네.’
다들 전보다 표정이 편했다. 이제는 서로 다른 종족들과 어울리는 것에도 익숙해진 모습.
모나는 설기와 뒹굴고 있었다.
“그나저나, 강현. 물어볼 게 있다고 하지 않았나?”
란돌프의 말에 일행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강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볼을 긁적였다.
“전에 권유해 주신 게 생각나서요.”
“내가?”
란돌프가 눈을 껌뻑였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걸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예. 이번에 시간이 생겨서 여행을 해 보려고요.”
“아, 그거 말인가.”
란돌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란돌프와 달리 다른 일행들은 놀란 눈으로 강현을 보았다.
“여행이라면 여기를 말하는 건가?”
노아의 질문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에 란돌프 씨가 몸을 지킬 수준이 되면 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하셔서….”
강현은 말하면서 란돌프를 힐끗거렸다.
란돌프의 말에 의하면 여긴 워낙 외곽이라 먹는 게 한정적이지만, 왕도에 가까워질수록 다양한 먹거리가 있다고 했다.
“음, 그렇군.”
팔짱을 낀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인들의 마을을 여행하는 것도 좋지만, 인간인 자네에게는 추천하지 못하겠군. 맹약 따위는 잊어버리고 덤비려는 바보들이 있을 테니.”
농담인가 싶었는데, 옆에 있던 하만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때, 잠자코 있던 란돌프가 입을 뗐다.
“강현, 대련을 해 보지.”
“지금요?”
강현의 물음에 란돌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을 힐끗거리자 모두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노아와 하만은 오히려 흥미로운 눈치였다.
대련은 몇 번 해 봤지만,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하는 건 처음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강현은 목검을 들었다.
그러자 란돌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걸로 하게.”
자신의 검을 건네고 목검을 가져오는 란돌프.
강현은 손에 놓인 검을 보며 눈을 껌뻑였다.
묵직한 느낌. 목검보다 무거웠다.
강현은 란돌프의 눈짓에 검을 뽑았다.
시퍼렇게 번뜩이는 검날.
마른침이 삼켜졌다.
“편히 하게. 진검도 목검과 다를 게 없어.”
란돌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게는 비슷했다.
강현은 조심스레 검을 겨눴다.
‘이걸 사람에게 향하는 건가.’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진검이건, 목검이건 상관없었다.
강현의 실력으로는 란돌프에게 스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각오를 다진 강현이 란돌프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결과는 강현의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져서 숨을 몰아쉬는 강현.
그런 강현을 바라보는 란돌프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떤가?”
강현을 향해 묻는 게 아니었다.
“…한참 부족하지만, 적어도 길에서 맞고 다니진 않겠지.”
노아의 시선이 옆에 있던 하만에게 향했다.
하만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활짝 웃었다.
“음, 제 동생들보다 잘 싸워요!”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칭찬인가? 기껏해야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하만이었다.
그녀의 동생들이라면….
그러나 강현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웃음을 터트린 란돌프가 강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작 반년 만에 이 정도면 나쁘지 않지. 견습 기사 정도 되지 않으면 자네를 이기기 쉽지 않을 거야.”
기사도 아니라 견습 기사.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