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뛰어가서 수도 계량기를 잠근 강현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전조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요즘 물 나오는 게 시원찮더니.’
당시에는 크게 문제 될 게 없어서 지나쳤지만, 이런 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물은 막았는데.”
강현이 홀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설기가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을 헤엄치는 토리까지.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나마 다행은 주방은 큰 피해가 없다는 건가.’
물이 들어가긴 했지만, 잠길 수준은 아니었다.
“물이 더러우니까 둘 다 나와.”
화장실과 홀 구석에 있던 오랜 먼지까지 섞여 있었다.
“끼잉?”
물놀이하던 설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강현이 짐짓 엄한 표정을 짓자 그제야 슬그머니 나왔다.
문제는 토리였다.
‘…헤엄치고 있는 게 아니구나.’
설기가 나가려고 하자 발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그러나 나아가기는커녕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설기의 등에 있다가 그대로 빠진 모양이었다.
한숨을 내쉰 강현이 바지를 걷어 올렸다.
토리를 구출해서 바닥에 내려놓자 궁둥이를 붙이고 털썩 주저앉았다.
넋이 나간 모습.
강현은 설기와 놀고 있다고 생각했던 강현은 괜히 미안해졌다.
‘저번에 헤엄쳤던 건 진흙이라 그렇구나.’
토리가 안쓰러워 보였으나 달래 줄 시간은 없었다.
바로 바구니를 들고 물을 푸기 시작했다.
발목까지 잠긴 물.
퍼도 퍼도 끝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푸고 있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휴, 이게 뭐여?”
고개를 돌리자 이장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새벽부터 어쩐 일이세요?”
“뭔 새벽이여, 이제 아침이구먼.”
이장의 말에 강현이 시계를 돌아보았다.
‘언제 이렇게 흘렀지.’
이장의 말대로 벌써 아침이었다.
“그짝이 물을 안 잠갔을 리는 없고. 수도가 터진 거여?”
역시나 이장. 한눈에 상태를 파악했다.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장의 눈이 번뜩였다.
“그렇다고 혼자 이러고 있나, 미련한 양반아. 혼자 이걸 어떻게 치워? 에휴, 기다려 봐.”
혀를 찬 이장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을 사람들이 매장 앞으로 모였다.
“아이구. 난리네, 난리.”
“많이도 쏟아졌어.”
“아니, 구경하러 왔어? 빨랑빨랑 움직여.”
이장의 닦달에 사람들이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손에는 걸레와 바가지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강현이 놀란 눈으로 사람들을 보고 있자, 옆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민호 씨?”
“좀 쉬고 계세요.”
민호가 강현의 어깨를 두드리고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람들이 일하는데 어찌 혼자만 쉴 수 있겠는가.
게다가 여기는 강현의 매장이었다.
강현도 팔을 걷어붙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도와준 덕분에 점심이 끝날 무렵에는 정리가 끝났다.
강현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정말 감사해요.”
“무슨 감사여. 이렇게 돕는 거지.”
“맞습니다. 강현 씨도 전에 도와주셨잖아요.”
“그렇지, 그렇지.”
사람들이 손을 내저었다. 강현은 그런 이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문뜩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럴 게 아니라 식사라도…. 아, 못하는구나.”
매장을 확인한 강현이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물을 못 쓰니 요리도 힘들었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웃음이 잦아들 때쯤 이장이 입을 뗐다.
“그짝이야말로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잖어. 밥은 곧 올 거여.”
곧 오다니?
강현이 의아해할 때, 민호가 입을 열었다.
“저기 오네요.”
민호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선두에서 서서 반갑게 손을 흔드는 이는 수진이었다.
아기 보자기를 둘러매고 있었다.
그 뒤로는 황대길과 정기훈 작가, 이정환과 함께 아주머니들의 모습도 보였다.
다들 한 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왔었다.
“점심 드시고 하세요!”
수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 * *
주먹밥에 된장국, 그리고 막걸리.
사람들은 삼삼오오 바닥에 주저앉아서 주먹밥을 먹기 시작했다.
다른 곳이라면 낯선 광경이었지만, 이 마을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이이가 그렇게 말했다니깐?”
“어허, 내가 언제 그랬어?”
“이 양반 봐. 언니한테 물어볼까? 저기 앉아 있네.”
“커험. 안 했다면 안 한 줄 알지. 뭣 하러 번거롭게 묻기까지….”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는 광경이었다.
강현은 주먹밥을 먹으며 옆을 봤다.
“세 분은 어떻게….”
강현의 물음에 정기훈 작가의 눈이 동그래졌다.
“허, 자네 보기보다 못 됐구먼. 우린 마을 사람 아닌가?”
“맞네. 자네도 타지에서 왔으면서 이리 텃세를 부려서 쓰나. 저번에 운동회도 우릴 쏙 빼고.”
정기훈 작가의 말에 이어서 이정환이 대꾸했다.
둘의 반응에 강현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강현이 당혹스러워하자 셋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강현도 셋이 자신을 놀리는 것이란 걸 알아챘다.
한숨을 내쉬는 강현.
‘전에는 이런 분들이 아니셨는데.’
좀 더 체면을 차렸다. 그러나 그때보다 지금이 더 보기 좋았다.
웃음을 멈춘 황대길이 입을 열었다.
“우리도 자네에게 도움을 받지 않았는가. 서로서로 도와야지.”
“암, 그게 시골의 정이지.”
황대길의 말에 정기훈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머쓱해진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마을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좋으신 분이네요.”
모두가 자기 일처럼 도왔다.
“자네도 마찬가지야.”
강현이 돌아보자 이정환이 인자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가 좋은 사람이기에, 이렇게 좋은 이들이 곁에 있는 걸세.”
정기훈 작가와 황대길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차 소리가 들렸다.
처음 보는 차.
차를 확인한 이장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차에서 중년인 하나가 내렸다.
“아니, 전화를 언제 했는데 이제 와?”
“이장님, 저도 일정이 있어요. 최대한 빨리 온 겁니다.”
“허, 이젠 말대꾸까지. 늙었다고 무시하는 거여?”
“또, 또.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십니까.”
말투와 달리 둘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떠올라 있었다.
마을 사람들도 안면이 있는지 중년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중년인은 인사를 나누며 강현이 있는 쪽까지 걸어왔다.
“새로 오셨다는 분 맞죠? 김준석입니다.”
강현은 한눈에 자신을 알아본 김준석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김준석이 입꼬리를 올렸다.
“만기한테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아.”
장만기.
갑자기 등장한 익숙한 이름에 탄성을 뱉었다. 그러자 김준석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만기 친굽니다. 이야기 듣고 한 번 오려고 했는데, 이렇게 올 줄은 몰랐네요.”
“어여 확인하지 않고 뭐 혀?”
“예에, 예. 갑니다요.”
이장의 부름에 김준석이 대답한 후 강현을 돌아보았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죠.”
그리고는 매장으로 향했다. 장만기의 친구답게 붙임성이 좋았다.
강현 역시 김준석을 따라서 매장으로 따라갔다.
* * *
화장실부터 주방,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김준석.
“어휴, 이거 타일을 들어내 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렇게 해 주세요.”
김준석이 밖에서 도구를 가져왔다.
옆에서 지켜보던 강현과 이장은 그를 방해하지 않게 매장 밖으로 나왔다.
옆에서 본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땀과 시멘트 가루로 엉망이 된 김준석이 나왔다.
“어떻게 됐어?”
이장의 다급한 물음. 마을 사람들까지 다가왔다.
그러자 김준석이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갔어요.”
“왜? 이 건물 지은 지 얼마 안 됐잖어.”
그래도 십 년은 넘었다.
“언제 지었는지는 상관없어요. 이 건물, 안 쓴 지 오래됐죠?”
“그렇긴 하지. 삼 년 되었나?”
옆에 있던 노인 하나가 대답했다.
“삼 년은 무슨. 사 년이지.”
“벌써 그리됐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김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되더라도 관리해 주면 괜찮은데, 이건 너무 오래 안 썼어요.”
“그럼 어떻게 혀?”
이장의 물음에 강현도 김준석을 바라보았다.
“이건 제가 못 고쳐요. 바닥을 다 들어내고 다시 해야죠.”
김준석의 말에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들어오면서 주방 배수 쪽을 손보긴 했지만, 화장실은 타일만 교체한 게 실수였다.
그러고 보니 당시에 공사를 하던 사람도 비슷한 경고를 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당시에는 이렇게 본격적으로 장사할 생각은 없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내려왔으니.’
결국, 강현의 업보였다.
그때를 떠올리니 새삼스럽게 자신의 변화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도 겨울 되기 전에 안 게 다행이네요. 겨울에 터졌으면 문제가 더 컸을 거예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이장이 눈을 부라리자 김준석이 슬쩍 뒷걸음쳤다.
강현은 그런 이장을 말렸다.
“괜찮습니다.”
“하이구, 이게 뭔 날벼락이여.”
이장이 답답한지 가슴을 두드렸다. 쓴웃음을 지은 강현이 김준석을 돌아보았다.
“공사는 오래 걸릴까요?”
“공사 자체는 일주일은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바로 공사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쪽도 일정이 있을 거다.
“제가 아는 곳이 있는데, 연락해 볼까요?”
“예. 부탁드려요”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김준석. 통화를 나눈 뒤, 머리를 긁적였다.
“적어도 나흘 뒤에나 공사 들어갈 수 있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렇게 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곳을 찾아봤자 그보다 빠르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렇게 김준석이 떠나가자 사람들이 다가왔다.
“아니, 뭔 일주일씩이나.”
“그럼 그동안 씻는 건 어떻게 혀?”
“그동안 우리 집에라도 오겠는가? 빈방이라면 넉넉하다네.”
정기훈 작가 역시 말을 건넸다.
그러나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근처에 친척 집이 있어요. 지금은 쓰지 않으니 그곳에 머무르면 됩니다.”
“그려?”
이장이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셨다.
지금은 강현이 한 번씩 청소해 주고 있었지만, 그전까지는 부모님이 관리했었다.
이런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을 거다.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모처럼이니 푹 쉬고 와. 공사 오면 내가 들려서 확인할 테니 걱정 붙들어 매고.”
이장이 강현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그렇게 사람들이 떠나가고 홀로 남은 강현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짐을 챙겨야겠어.”
* * *
거의 이주에 가까운 시간 동안 머물 짐은 양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굳이 택시를 부를 필요는 없었다.
민호가 데려다준 것이었다.
민호는 강현의 할아버지 댁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깨끗하군요.”
단순히 강현의 짐을 옮겨주기 위해서 온 게 아니라 걱정돼서 따라온 것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니 안심하는 눈치였다.
‘…미리 청소하길 잘했네.’
가을을 맞이해서 이곳도 한 번 청소했다.
덕분에 상태가 양호했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 주세요.”
“예, 고마워요.”
그렇게 인사를 나눈 민호가 떠나갔다.
민호가 떠나가자 주변이 고요해졌다.
강현과 설기, 토리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곧 무언가를 발견한 설기가 뛰어갔다. 뭘 쫓나 싶었는데, 쥐였다.
“…생각지도 못하게 휴가를 얻었네.”
한숨을 내쉰 강현이 토리를 돌아보았다.
‘이제 뭘 하지?’
이 주 동안 가만히 있는 것도 고욕이었다.
강현의 시선에 토리가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