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우리도 집에 갈까?
작은 잔에 술을 퍼서 건넨 카샨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그쪽이 란돌프겠지? 전사장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술을 좀 한다며?”
란돌프가 조반테를 돌아보았다.
아직 임무 중이기 때문이었다. 조반테는 고개를 끄덕여서 허락했다.
란돌프도 알아서 자제할 걸 알기 때문이었다.
“좋아.”
카샨이 싱글벙글 웃으며 술을 펐다. 당연히 카샨이 먹던 대접이었다.
란돌프 역시 거리낌 없이 잔을 받았다.
로멘은 작은 잔에 받았고, 바하람은 아예 잔을 거절했다.
그러나 카샨도 개의치 않아 했다.
“요정, 그쪽은 어때?”
일행들의 시선이 한곳에 향했다. 강현 뒤에 있던 에밀리야가 후드를 벗었다.
아름다운 외모에 곳곳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래, 저게 당연한 거지.’
자주 보니 익숙해졌다.
“한 명 정도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는 게 좋겠죠. 제가 지켜볼 테니 여러분들은 편히 즐겨 주세요.”
그녀의 말에 카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무심코 카샨을 따라서 고개를 끄덕이려던 강현의 눈에 바하람이 들어왔다.
술을 마시지 않는 바하람.
그러나 일행들은 그 존재조차 잊고 있었다.
‘…심지어 영주님도.’
영주 역시 감동했는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쯤 되니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신경도 안 쓰는 듯 오만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한 사람만 빼고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에밀리야가 말을 이었다.
“마침, 강현 씨가 차를 가져오셨으니 같이 어울리기만 할게요.”
“그럼 그러도록 해. 강현, 넌 마실 거지?”
“저도 작은 잔에 부탁드려요.”
강현의 대답에 카샨이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겸손하군.”
그게 어째서 겸손한 게 되는 건가. 강현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술잔을 받은 강현이 힐끗, 에밀리야를 보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온화한 표정이었지만, 강현은 그녀의 눈빛에 든 열망을 읽을 수 있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다는 건 핑계가 아닐까?’
사실은 그저 차가 마시고 싶었을 수도 있었다.
강현은 배낭을 열어서 보온병을 다시 꺼냈다. 잔에 커피를 따른다.
은은하게 퍼져가는 커피 향.
강현은 에밀리야의 귀가 움찔하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걸 알아챈 이는 없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다른 쪽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아!”
갑작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린 강현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맙소사.”
생크림이 범벅된 모나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는 부족했는지 쿠키를 향해 손을 뻗다가 카샨의 시선을 받고 멈췄다.
결국, 카샨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보냈어야 했는데.”
“괜찮소. 따님이 참 귀엽구려. 내 딸도 저 나이 때는 말썽꾸러기였지.”
조반테가 모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다른 이들의 시선도 조반테와 다르지 않았다.
“그나저나 안주가 엉망이 되었군.”
“케이크라면 더 있습니다.”
강현이 남은 케이크를 쿠키를 꺼냈다. 혹시 몰라서 넉넉하게 준비했다.
‘…안주로 준비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잘 먹으니 된 거 아닌가.
케이크가 나오자마자 달려들려는 모나를 카샨이 낚아챘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에 앉혔다.
이제 꼼짝없이 카샨이 주는 것만 먹어야 했다.
그렇게 술잔이 오가는 사이 커피를 마신 에밀리야가 눈을 껌뻑였다.
“어떤가요?”
강현이 묻자 그녀가 고운 이마를 찌푸렸다.
그녀는 난제를 만난 것처럼 신중히 입을 열었다.
“열매… 같긴 한데, 독특하네요. 향도 맛도 처음 겪는 것이에요.”
맛도 향도 모르면서 열매란 걸 알아맞힌 건가.
강현은 그러한 사실이 더 놀라웠다.
곧 에밀리야가 강현을 보며 싱긋 웃었다.
“고마워요. 확실히 재미있는 맛이네요. 열매를 직접 볼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챙겨 온 게 있으니 이따 드릴게요. 생 열매는 아니고 볶은 것이지만.”
어차피 에밀리야를 주려고 가져온 것이었다. 일부는 갈아서 왔지만, 나머지는 원두 그대로 가져왔다.
원두가 보존이 편하기 때문이었다.
강현의 이야기를 들은 에밀리야의 눈이 반짝였다.
“상관없어요!”
너무 소리가 컸던 탓인가. 사람들의 시선이 둘을 향했다가 떨어졌다.
에밀리야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말 기대되네요.”
그녀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이리도 기뻐할 줄 몰랐다.
강현은 그런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재미있는 맛이라.’
역시 그녀의 기준에 적합하진 않았다.
그때, 노아가 둘의 곁으로 다가왔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그보다 이렇게 와도 되는 건가요?”
노아는 대답 대신 카샨이 있는 방향을 눈짓했다. 돌아보자 란돌프뿐만 아니라 조반테와 로멘을 붙잡고 술을 따르고 있었다.
그 모습만 보면 오래된 친구들처럼 보였다.
처음에 당혹스러워하던 조반테는 금세 카샨과 어울렸다.
슬쩍 미소 지은 강현이 노아를 돌아보았다.
“일은 잘 끝나셨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노아. 그리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테무 전사장과 손을 잡았던 부족도 우리 부족 밑으로 복속되어서 영역이 더 넓어졌다.”
전쟁에서 이긴 것이었다. 그러나 노아의 얼굴에는 기뻐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노아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반란을 주도했던 테무 전사장을 놓쳤다. 이건 강현, 그대도 아는 게 좋겠지.”
노아의 말에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그러나 곧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저를 찾아올지도 모르겠군요.”
이번 일의 원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노아가 입을 열었다.
“그래. 맹약 때문에 직접 공격하는 일은 없겠지만, 주의하는 게 좋겠지.”
“그래서 강현 씨에게 감사관이란 직책을 내린 거군요.”
옆에 있던 에밀리야가 입을 열었다.
노아는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현으로서는 그 두 개가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었다.
무뚝뚝한 노아를 대신하여 에밀리야가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강현 씨는 인간들에게도 외부인이에요. 당연히 란돌프 씨나 로멘 씨가 돕는 데도 한계가 있어요. 하지만 수인족 대표로 마을을 방문하면 대우를 달리할 수밖에 없어요.”
귀빈이었다. 당연히 호위가 붙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무엇보다, 다른 이들이 쉽사리 노릴 수 없었다.
영주가 임명한 관리를 해하는 건, 영주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기에.
에밀리야의 설명에 강현이 짧게 탄성을 뱉었다.
“우리는 상관없지만, 인간들에겐 그러한 지위가 중요하다더군.”
노아의 말에 에밀리야가 힐끗, 카샨을 쳐다보았다.
“그녀도 강현 씨가 다른 곳에서 온 걸 아나 보네요.”
지구. 이곳 사람들에게는 이세계였다.
그 사실을 아는 건 란돌프와 로멘, 그리고 노아와 에밀리야뿐이었다.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강현, 그대가 이 세계의 법칙을 벗어난 존재란 걸 아실 거다.”
대체 어떻게. 강현의 시선에 노아가 모나를 봤다.
“전에 모나에게 상처 입었던 적이 있었지? 게다가 마을 아이들과도 잘 놀아 주더군.”
“아.”
강현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그리고 에밀리야조차 놀란 눈으로 강현을 돌아보았다.
그녀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강현은 신들의 정해 놓은 계약에 벗어난 존재였다.
아니라면 아이들이나 강현, 어느 쪽이든 천벌이 떨어졌을 거다.
강현은 스스로 부주의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에 아는 이들이 적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아채는 이들도 있을 거다. 그리고 인간 중에는 그걸 싫어하는 이도 있지.”
노아의 시선이 바하람에게 향했다가 떨어졌다.
신전.
에밀리야도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반응에 강현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감사관이란 감투는 강현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강현이 고개를 돌리자 마침 술잔을 들어 올리던 카샨과 눈이 마주쳤다.
카샨이 건배를 하듯 잔을 들었다. 그리고 강현 역시 들고 있던 잔을 들었다.
* * *
술자리는 길지 않았다.
인간이나 수인이나 맹약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행들을 떠나보낸 강현은 맹약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강요로 만들어진 평화.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건가?
그러한 강현의 상념은 이어지지 않았다.
“다 왔네요.”
“아.”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강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에밀리야가 생긋 웃고 있었다. 에밀리야 옆에 소나와 설기의 모습도 보였다.
“죄송해요.”
잊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강현이 넘어온 문이 보였다.
강현은 급히 배낭을 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에밀리야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그 자리에서 건네려고 했지만, 에밀리야가 문까지 배웅해 준다고 하여 같이 온 것이었다.
강현은 배낭에서 네모난 가방을 꺼냈다. 안에는 원두와 함께 핸드 드립 주전자와 거름망이 들어 있었다.
물을 넣은 주전자를 스토브 위에 올려줬다.
그리고 물을 끓이는 동안 원두를 꺼냈다.
“커피콩을 볶은 겁니다. 얘를 여기 그라인더에 넣고 갈아 주시면 이렇게 가루가 나와요.”
미리 갈아놓은 커피 가루를 꺼냈다.
“확인해 봐도 될까요?”
“예.”
강현이 원두와 커피 가루를 건네자 진지한 눈빛으로 둘을 살폈다.
“향이 좋네요. 볶아서 가는 건 생각도 못 했는데.”
열성적인 모습에 강현이 웃음을 흘렸다.
그 사이 주전자가 끓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녀도 원두에게서 시선을 뗐다.
“물을 끓이면 이렇게 종이 필터를 넣고 한 번 적셔 주면 돼요.”
강현은 천천히 필터에 물을 부었다.
이러면 종이 향을 날려 줄 뿐만 아니라 잔도 예열할 수 있었다.
“물이 완전히 빠져나가면 이렇게 커피 가루를 넣어 주면 됩니다. 그리고.”
바닥을 툭툭 쳐서 수평을 맞춘 강현이 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천천히 가운데부터 부어 주면 됩니다.”
원을 그리듯이 주전자를 움직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같은 속도로 세 번을 부어 준 후에나 거름망을 치웠다.
“완성이에요.”
강현이 커피를 에밀리야에게 건넸다. 그러자 에밀리야가 조용히 향을 맡았다.
“…확실히, 아까 마셨던 것보다 향이 짙네요.”
그녀가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열매는 같은데, 마치 다른 사람이 탄 것 같네요?”
당연했다. 강현이 담아 온 건 기계로 내린 것이었다.
“열매의 굵기뿐만 아니라 온도나 물의 양, 속도에 따라서 맛이 달라지겠군요.”
그녀는 금세 드립 커피의 원리를 이해했다.
강현은 꺼냈던 주전자와 거름망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에밀리야에게 건넸다.
“이건 선물입니다.”
강현의 말에 에밀리야의 눈이 커졌다.
“…괜찮나요?”
“예, 전 다른 것이 있어요.”
더 크고 좋은 기계가.
애당초 선물하려고 산 것이었다. 당연히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핸드 드립 세트를 받았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예. 원두나 거름망이 떨어지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강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면 혹시 볶은 게 아니라 생 열매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그녀의 물음에 강현이 생각에 잠겼다.
생원두를 파는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커피도 대중화가 되었다. 구하긴 어렵지 않을 거다.
“알겠어요. 시간이 걸릴 수도 있는데, 한번 구해 볼게요.”
“예, 고마워요.”
그녀가 싱긋 웃었다.
그렇게 선물을 받고 떠나가려던 에밀리야가 고개를 돌렸다.
“강현 씨.”
“예?”
“오늘 하신 일은 잘하셨어요. 아마 신들도 교류가 끊기길 원한 건 아닐 거예요. 그리고 만일 원하지 않았다면 계시를 주셨을 거예요.”
그리 말한 에밀리야가 하늘을 보았다.
“지금도 우리를 보고 계실 테니.”
그녀는 강현이 무엇을 고민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강현은 멋쩍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속내를 들킨 것 같아서 쑥스러웠다. 그렇게 그녀의 모습이 숲속으로 사라졌다.
곧 강현이 옆을 돌아보았다.
“우리도 집에 갈까?”
“컹!”
설기와 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