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옵니다
그 뒤로도 장만기와 곽도현은 자주 매장에 들렸다.
매일 같이 마을을 오가다 보니 자주 들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에 만났던 민호의 말에 따르면 아주 열성적으로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시간만 좀 더 여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곽도현이 공부에 집중할 때, 강현 역시 공부하고 있었다.
“잎의 숨을 읽어야 해요.”
“…숨이요?”
“예. 잎과 대화한다고 생각하면 편하실 거예요.”
싱긋 웃으며 말하는 에밀리야.
“강현 씨라면 충분히 하실 수 있어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에밀리야가 가르쳐 주는 다도는 강현의 생각하던 것과 거리가 멀었다.
아니, 거리가 아니라 차원이 달랐다.
강현이 곤혹스러워하자 에밀리야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건 말로 설명하기에는 어려워요.”
그리 말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 씨의 요리를 먹어 보면 재료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활기차더군요. 그런 강현 씨니까, 분명 가능할 거예요.”
강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반짝이는 눈동자에 섞인 기대가 너무나도 무겁게 다가왔다.
강현도 기대에 부응해 주고 싶었지만….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어.’
중학교 교과서를 보는 곽도현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그러나 확실히 알게 된 건 있었다.
“그럼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할까요?”
에밀리야가 새롭게 차를 탔다.
분명 강현 역시 같은 방식으로 했었지만, 에밀리야가 탄 차는 맛이 달랐다.
‘…맛있어.’
차를 먹고 이런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만큼 에밀리야의 차는 무언가 달랐다.
자연을 바라보며 차를 음미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차향이 올라왔다.
술을 마실 때와는 또 다른 운치가 있었다.
시간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몸과 마음에 평온해져 가고 있었다.
저 멀리 소나가 날고 있는 게 보였다.
하늘을 한 바퀴 돌더니 절벽 위에 앉았다.
전과 달리 거리가 가까웠다. 이제는 설기도 놀아 달라고 하지 않자 조금씩 경계를 풀고 있는 것이었다.
강현은 차를 홀짝이며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길게 하품하는 설기.
설기에겐 차를 마시는 시간이 지루해 보였다.
“벌써 다음 주인가요?”
에밀리야의 물음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약속한 날까지 한 주밖에 남지 않았다.
강현의 시선이 수인 마을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괜찮겠지?’
요 몇 주 동안 노아는 물론이고 모나마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걱정되는 게 당연했다.
“전 슬슬 일어나 볼게요.”
“벌써요? 식사는요?”
강현의 물음에 에밀리야가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은 사양할게요. 허울뿐인 호위라지만 그냥 나갈 수는 없죠.”
그리 말한 에밀리야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절벽 위에 쉬고 있던 소나가 날아올랐다.
나무가 흔들리면서 나뭇잎이 떨어져 내렸다.
“그럼 다음 주에 봬요.”
그녀는 그리 말하고는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손을 낚아채는 소나.
그 모습에 강현이 감탄했다.
볼 때마다 놀라웠다.
에밀리야가 떠난 곳을 바라보던 강현이 고개를 돌렸다.
“우리도 슬슬 밥 먹을 준비를 할까?”
“컹!”
해맑게 짖는 설기와 고개를 끄덕이는 토리.
자리에서 일어난 강현이 기지개를 켰다.
* * *
오늘 식사는 어묵탕이었다.
어묵탕을 고른 이유는 간단했다. 설기가 안 먹은 음식 중에 찾아보다 보니 떠올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캠핑에도 잘 어울리지.’
이미 양식 쪽은 많이 먹었다.
설기는 또 먹어도 상관없는 눈치였지만, 강현으로서는 되도록 다양한 요리를 먹여 주고 싶었다.
‘…거의 아빠나 다름이 없네.’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었다.
넓적한 전골냄비에 물과 함께 매장에서 가져온 치킨 스톡을 넣어 줬다.
‘멸치로 육수를 내는 게 좋긴 한데.’
매장도 아니고, 여기서 그런 사치를 바랄 순 없었다.
다시다라는 좋은 수단이 있지만, 차마 요리사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맛술과 간장을 넣고 큼지막하게 썬 무를 넣어 준다.
그 사이 나머지 재료를 손질해 줬다.
양파와 파, 버섯 청양 고추와 홍고추.
이걸로 충분했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다진 마늘을 풀어 주고 썰어 놓은 재료를 넣어 준다.
재료가 한 번에 들어가자 끓어올랐던 물이 잠잠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끓기 시작했다.
강현은 숟가락으로 간을 봤다.
‘약간 삼삼하네.’
싱거운 맛. 그러나 이걸로 충분했다.
어묵에도 간이 배어있으니 끓이다 보면 자연스레 간이 맞을 거다.
그리고 따로 어묵을 찍어 먹을 간장도 있었다.
강현은 가지고 온 어묵을 꺼냈다.
꼬치로 어묵을 꽂았다. 사 분의 일 정도만.
나머지는 먹기 좋게 자른 후 냄비에 넣었다.
어차피 꼬치로 먹는 건 강현뿐이었다.
‘벗겨 주는 게 더 번거롭지.’
설기라면 꼬치 채로 씹어먹겠지만, 혹시 모르니 빼 주는 게 나았다.
그렇게 어묵을 넣자 설기가 킁킁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강현은 그런 설기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기인지 아닌지 헷갈리는구나.’
설기가 강현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강현은 답을 알려 줄 생각이 없었다.
직접 먹어 보고 느끼는 게 중요했다.
냄비에 넣은 어묵을 불면서 부피가 커졌다. 어느새 냄비 가득 차오르는 어묵을 본 설기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설기 뿐만 아니라 토리도 놀란 눈으로 냄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현은 웃음을 참으며 불을 조절했다.
그리고 꼬치 하나를 들어 올려서 후후 불어 보았다.
강현의 취향으로는 좀 더 불리는 게 좋았으나, 어차피 먹다 보면 알아서 불 거다.
한입 베어 문 강현이 뜨거움에 입을 벌렸다.
식힌다고 식혀봤지만 아직 뜨거웠다.
입 위로 하얀 김이 올라왔다.
우여곡절 끝에 어묵을 삼킨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간장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간이 딱 맞았다.
흔히 생각하는 어묵 맛이었다.
그러나 강현은 만족스러웠다. 모든 요리가 특별할 필요는 없었다.
‘어묵탕이 특별하긴 힘들지.’
가공품이라 한계가 있었다.
“컹!”
옆에 있던 설기가 짖자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빨리 자신도 달라는 것이었다.
“알았어. 줄게.”
강현은 국자로 크게 떠서 대접에 옮겨 줬다.
방금 끓였던 것이라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제는 설기가 데일 리가 없다는 걸 잘 알았다.
킁킁 냄새를 맡더니 바로 뜨거운 국물에 코를 박는 설기.
이어서 할짝거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강현은 피식 웃고는 꼬치 하나를 더 꺼냈다.
그리고 포크로 잘라서 작은 접시에 올렸다.
이건 토리의 몫이었다.
토리는 장난치듯 손으로 쿡쿡, 찔러 보더니 조심스레 입으로 가져갔다.
둘이 먹기 시작하자 강현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어 봤다.
특유의 시원함이 목을 타고 느껴졌다.
강현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푸르른 숲.
언제처럼 한결같았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좀 아쉬웠다.
“여기도 눈이 오면 좋을 텐데.”
따뜻한 어묵 국물을 먹으니 저절로 눈이 떠올랐다.
강현의 말에 설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란돌프의 말에 따르면 지금보다 조금 더 추워지긴 하나 한국처럼 겨울은 없다고 했다. 그러니 설기도 눈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아니, 산이 있었구나.”
강현의 시선이 산 위로 향했다.
새하얀 운해와 정령 나비. 그곳이라면 눈 덮인 산만큼이나 매력적일 거다.
강현의 말을 들은 설기의 눈이 빛났다.
산에 갈 거야? 그리 묻고 있는 듯했다.
강현은 피식 웃고는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직은 말고.”
좀 더 준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급한 일부터 정리해야 했다.
강현은 대접 채로 들어서 어묵 국물을 마셨다.
* * *
순식간에 또 한 주가 지나갔다.
다시 이세계로 건너온 강현을 맞이한 건 에밀리야였다.
그러나 평소와 모습이 달랐다.
얇은 허리 양옆으로 놓인 단검과 등에 찬 활.
엉덩이 쪽에는 화살통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어깨 위에 올라가 있는 소나까지.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암살자.’
그녀를 봤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다.
옷 자체는 녹색 빛이라 어둡지 않았지만, 숲에서는 이쪽이 더 은신하기 편할 거다.
그녀는 빙그르르 돌더니 후드를 내렸다.
그러자 옅은 연두색의 머리카락이 물결처럼 흘러내렸다.
“어떤가요? 무기를 쓸 일은 없겠지만, 모처럼이니 기분을 내 봤어요.”
“멋지네요.”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강현 씨도 짐이 많네요?”
그녀의 물음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혹시 몰라서 먹을 것과 차를 준비했어요.”
회의가 길어질 수도 있었다. 강현의 말에 에밀리야의 눈이 반짝였다.
“아, 강현 씨네 차인가요?”
이미 에밀리야도 강현이 다른 세상의 사람이란 걸 알고 있었다.
“예.”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밀리야가 아쉬움을 드러냈다.
오늘은 강현의 호위로 따라왔기 때문이었다.
호위가 같이 차를 즐길 순 없었다.
“안 그래도 선물로 드리려고 에밀리야 씨 것도 챙겨 왔어요.”
“정말요?”
강현의 말에 에밀리야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예, 나중에 드셔 보세요. 에밀리야 씨가 탄 차보다는 못하겠지만.”
“아니에요. 새로운 경험은 늘 설레는 법이죠.”
그리 말한 에밀리야가 강현을 향해 싱긋 웃었다.
“그럼 가 볼까요?”
약속 장소는 여기서 거리가 있었다.
일부러 일찍 오긴 했지만, 여유 부려서 좋을 건 없었다.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밀리야가 후드를 썼다.
그것만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강현은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에밀리야의 모습을 보고 영향을 받았는지 턱을 세우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나름 늠름해 보이려고 한 것 같은데, 강현의 눈에는 귀엽게만 보였다.
‘왼쪽에는 에밀리야 씨, 오른쪽에는 설기라.’
든든했다.
그때, 가슴 쪽에서 토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평소와 다르게 어딘가 불만스러워 보이는 토리.
강현은 웃으며 토리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래, 너도 잊지 않았어.’
그제야 기분이 풀렸는지 토리가 몸을 비볐다.
그렇게 일행들은 약속 장소로 향했다.
* * *
일행들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인간들이 먼저 와 있었다.
“왔는가?”
직접 가져왔는지 숲 가운데 놓인 테이블.
그 중앙에 앉아 있던 영주, 조반테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조반테 뒤로 익숙한 얼굴들도 보였다.
란돌프와 로멘이 살짝 고개를 숙여 아는 체를 했다.
강현도 고개를 숙여 그들에게 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이 역시 강현의 기억에 있었다.
새하얀 사제복.
‘바하람 주교였나?’
그는 마을에서 그랬던 것처럼, 강현을 향해 못마땅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조반테의 일행은 그걸로 전부였다.
달랑 셋.
영주의 호위라고 생각하기에는 조촐한 인선이었다.
‘하긴.’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신의 맹약이 있는 이상, 영주에게 해코지를 할 리가 없었다.
많은 수를 이끌고 나와 봤자 상대를 자극하는 꼴이었다.
정작, 앉아 있는 영주는 강현의 옆에 있는 이를 향해 호기심을 드러냈다.
“단장이 말했던 요정이 그쪽인가 보군. 난 영주 조반테라네.”
“….”
그러나 에밀리야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바하람 주교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조반테는 에밀리야의 뜻을 읽었다.
“그렇군. 요정이 아니라 호위로 온 건가. 참으로 든든한 호위야.”
조반테의 칭찬에 에밀리야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조반테도 그녀의 뜻을 존중해서 더 묻지 않았다.
“약속 시간까진 아직 남았군. 강현, 자네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가?”
대신 강현을 향해 말을 걸었다.
강현이 대답하려는 찰나, 란돌프가 입을 열었다.
“영주님, 옵니다.”
누가라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이곳에서 일행들이 기다리는 건 하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