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내 맘을 잘 알아
카르보나라 하나, 고르곤졸라 피자 하나, 그리고 돈가스 둘.
카르보나라가 장만기의 것이고 돈가스가 각각 응언과 곽도현이 주문한 것이었다.
피자 역시 장만기가 고른 것이었다.
음식이 나오자 셋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장만기가 떠들고 다른 둘이 이야기를 듣는 식이었다.
“동생! 동생도 바쁘지 않으면 잠깐 나와.”
장만기의 말에 강현이 볼을 긁적이며 테이블로 향했다.
그렇게 강현이 합류한 뒤에도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한참을 떠들던 장만기가 곽도현을 보며 물었다.
“도현이 너는 고등학교 가서도 육상 계속하는 거야?”
장만기의 물음에 방금까지 웃고 떠들던 곽도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고 싶은데, 어려워요.”
“왜? 평창에 학교가 없어서 그래? 다른 동네 가면 되지.”
강현과 응언의 시선도 자연스레 곽도현에게 향했다.
그러자 곽도현이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이번 대회에서 다행히 성적이 좋아서, 춘천의 고등학교에서 제안이 왔어요. 기숙사도 제공해 준다고.”
곽도현의 말에 셋의 눈이 커졌다.
“좋은 일이잖아!”
“축하해.”
장만기와 응언의 축하가 이어졌다. 그러나 강현은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가고 싶은데 어렵다고 했다.
대회에서 성과를 내고, 춘천에서 제안이 온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기 때문일 거다.
“무조건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따로 테스트를 통과해야 해요. 하지만….”
곽도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대회 때 입은 부상이 낫지 않아서 테스트는 힘들어요.”
일행들 입에서 탄성을 흘러나왔다.
그리고 곧 얼마 전 있었던 운동회를 떠올렸다.
“그 인간, 다친 애를 내보낸 거야? 안 되겠어. 내 당장…!”
장만기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벌떡 일어난 장만기. 당장이라도 마을로 달려갈 것만 같았다.
당연히 응언과 강현의 눈빛도 좋지 않았다.
그러자 곽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나갈 수 있다고 했어요. 제가 부상 때문에 뛰지 못하고 있어서 답답해하니깐 이장님께서 권유해 주신 거예요.”
곽도현의 말에 장만기의 엉덩이가 다시 의자로 내려왔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고작 초등학교 운동회니깐 가벼운 마음으로 뛰라고. 제가 말을 안 듣긴 했지만…. 안 그래도 무리했다고 혼났어요.”
곽도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나중에는 전력을 다해서 뛰었다. 그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셋을 만났기 때문에 욕심이 생긴 것이었다.
장만기가 헛기침했다.
그러자 곽도현이 말을 이었다.
“이장님께서 욕심이 좀 많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곽도현의 말에 셋이 멋쩍게 웃었다.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중학생한테 욕심이 많다는 소리를 듣는 것부터 문제가 있긴 하지만….’
결국, 좋은 사람은 아니란 거다.
곽도현은 말이 조금 이상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희 마을 사람들에게는 잘해 주세요.”
아까와 달리 자신 없는 목소리.
그러나 일행들은 알아들었다.
‘자신 때문에 하는 경기란 건 이런 뜻이었구나.’
단순히 곽도현이 육상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줄다리기에 졌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연관이 없진 않겠지만, 여러 복잡한 이유가 섞여 있던 것이었다.
장만기가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고 사내가 벌써 포기하면 안 되지! 테스트가 언제야?”
장만기의 외침에 쉬고 있던 설기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다음 주요.”
“아, 그래? 빠르네….”
곽도현의 말에 일어섰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자리로 돌아왔다.
장만기의 행동에 셋이 웃음을 터트렸다. 방금까지 무겁던 공기가 가벼워졌다.
곽도현도 웃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일반 학교에 들어간다고 해서 못 하는 것도 아니니.”
“근데, 학교가 거기뿐이야?”
장만기의 물음에 곽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대부분 대회 성적보다 내신을 봐요. 전 대회 때문에 수업을 많이 빠져서….”
곽도현이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그런 곽도현의 말에 셋은 고개를 갸웃했다.
“육상 특기생을 뽑는데, 육상 하는 애를 뽑아야지 공부 잘하는 애를 뽑아?”
학교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장만기 역시 곽도현의 사정이 딱하기에 한 말이었다.
곽도현은 쓴웃음만 지었다.
그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강현이 입을 열었다.
“그 테스트란 걸 연기할 수 없어?”
“물어봤는데 힘들다고 했어요. 후보가 저만 있는 게 아니라서….”
셋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었다.
학교 측에서도 한 사람 때문에 다른 이들까지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가을. 날이 추워지면 몸이 굳기 마련이었다.
부상의 위험도 커졌다.
매장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러자 곽도현이 애써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군청에서도 청소년 지원하고 있다고 해서 선생님이 알아봐 주셨어요. 거기에 다니다가 대학교 가서 해도 늦지 않죠.”
“…그렇지. 중요한 건 노력이니.”
장만기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학교에서 지원해 주는 것과 같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식사 자리가 끝이 났다.
* * *
셋이 떠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기훈 작가 일행이 들어왔다.
“아, 오셨어요?”
곽도현의 일을 생각하고 있던 강현이 셋을 맞이했다.
“오늘은 표정이 어둡군. 무슨 일이 있었나?”
황대길이 물었다. 다른 둘의 시선도 강현을 향해 있었다.
“아뇨. 그냥 신경 쓰는 일이 있어서.”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황대길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괜찮으니 편하게 말해 보게. 어젯밤에 노인네들의 푸념을 들어 줬으니 우리도 들어 줘야지.”
옆에 있던 정기훈 작가와 이정환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럴 만한 일은 아닌데….”
강현은 한숨을 내쉬고 낮에 있었던 이야기를 셋에게 했다.
“과연.”
이야기가 끝나자 정기훈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꿈을 가지고 도전하는 어린 꽃봉오리.
미처 피기도 전에 흔들리고 있었다.
셋은 이러한 일을 수많이 보았다. 그렇기에 더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예술계가 유독 심하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음악 쪽은 그나마 아직 실기를 많이 보지만, 체육 쪽은 많이 바뀌었지. 시대가 변하고 있어.”
이정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까지 대학교수로 있었기에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자네가 이렇게 마음을 쓰고 있다니, 그 친구가 제법 마음에 들었나 보군.”
정기훈 작가의 말에 강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예, 착한 친구 같더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정기훈 작가와 이정환.
그러나 황대길은 강현이 신경 쓰는 이유를 알기 때문에 잠자코 있었다.
부상으로 인해서 좋아하는 걸 하지 못한다.
그 부분이 컸다.
고통을 알기에 쉽사리 넘길 수 없었다.
“좋아. 이번 일은 내가 한번 알아보겠네.”
이정환의 말에 강현의 눈이 커졌다. 그와 달리 정기훈 작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면 되겠군.”
“아니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그러나 이정환은 고개를 저었다.
“알아봐 주는 건 어렵지 않네. 나야 대학에 잠깐 있었지만, 아내는 아직 현역이라네.”
“아.”
그랬다. 정기훈 작가 역시 맞장구를 쳤다.
“맞지. 원래 예체능끼리는 알게 모르게 연결되어 있지.”
이정환도 미소 지었다.
“아이들에게 길을 알려 주는 게 어른들의 일이지. 이 정도의 수고 정도는 감수할 수 있네. 물론, 알아봐 줄 뿐이야. 기회를 잡고 나아갈지, 아니면 거기서 끝날지는 그 아이의 역량이라네.”
기회가 와도 준비가 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었다.
이는 셋뿐만 아니라 강현도 잘 알고 있었다.
어리다고 해도 결국, 나아가는 건 자신이었다.
이정환은 곽도현의 이름과 나이를 적었다. 대회에 나간 적이 있다면 기록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 * *
그로부터 이틀 뒤.
이정환이 홀로 찾아왔다. 겉옷을 벗는 이정환의 손에는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강현은 그것이 전에 말했던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이정환은 강현에게 학교에 대해서 짧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끝내자 강현을 바라보았다.
“내가 직접 설명하는 것보다 자네를 통해서 듣는 게 낫겠지. 내 역할은 여기까지네.”
“충분합니다. 감사해요.”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정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오히려 내가 자네에게 받은 도움이 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도 되네. 게다가 이번 일은 자네의 일도 아니지 않은가.”
이정환은 그리 웃고는 매장을 나섰다.
강현은 그러한 이정환의 뒷모습을 보았다.
정기훈 작가도 그러했지만, 이정환 역시 마을에 지내면서 전보다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이 마을에는 이세계처럼 신비한 힘이 깃들기라도 한 건가?
그러한 생각을 하던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망상에 빠졌을 때가 아니었다.
“오늘은 빨리 닫아야겠네.”
조금이라도 빨리 알려 줘야 준비할 수 있을 거다.
그러나 곧 중요한 문제를 깨달았다.
“…도현이가 어디 살더라.”
마을 이름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이네 집은 몰랐지만, 알고 있는 이가 있었다.
다행히 그 사람의 집은 알고 있었다.
나중에 놀러 오라고 몇 번이나 알려 줬기 때문이었다.
* * *
“오, 동생 일찍 왔네? 한잔하자고?”
정만기는 강현을 보자 눈을 빛냈다.
“여보, 누구예요?”
“친한 동생.”
안에서 중년의 여인이 나오자 장만기가 강현의 어깨를 감쌌다.
그러자 중년 여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보랑 친하게 지낼 얼굴은 아닌데요?”
“무슨 소리야! 나도 왕년에 잘나갔어.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강현에게만 들리게 작은 목소리로 뒷말을 붙인 장만기. 그러자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왕년의 장만기 씨는 아는 장만기 씨와는 다른가 보네요. 저도 그분을 한번 보고 싶네요.”
“이 여편네가.”
장만기가 눈을 흘기자 여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장만기 역시 기분 나빠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유쾌한 부부네.’
장만기만 독특한 줄 알았는데 여인도 만만치 않았다.
“이럴 게 아니라 어서 들어오세요.”
“그래, 그래. 들어와.”
둘의 환대에 강현이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여쭤볼 게 있어서 왔어요.”
“여쭤볼 거?”
“예. 도현이네 집 아시죠?”
지난번에 태워 왔다니깐, 알고 있을 거다.
“도현이? 물론 알지. 우리 조카 아닌가.”
또 언제 조카가 된 건가. 강현은 실소를 흘렸다.
“근데 우리 조카는 왜?”
“전해 줄 게 있어서요.”
“응?”
강현은 서류 봉투를 가리켰다. 그러자 장만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강현은 간략히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자 장만기의 눈이 반짝였다.
“내가 데려다줄게. 그런 일은 내가 빠질 수 없지. 여보, 다녀올게.”
고개를 끄덕인 여인이 강현을 돌아보았다.
“강현 씨라고 했죠? 강현 씨도 갔다가 들러 주세요. 제가 간단하게 먹을 안주를 준비해 드릴게요.”
“크으, 역시 우리 마누라. 내 맘을 잘 알아.”
옆에서 장만기의 감탄이 들렸다.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거절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슬쩍, 아래를 보았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인가.
‘…내 간, 괜찮겠지?’
늑대의 축복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