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동생, 잘 있었나?
며칠 뒤.
강현은 정식으로 이정환의 집에 초대되었다.
그 때문에 일부러 아침 일찍 읍내까지 나갔다가 왔다.
‘빈손으로 갈 순 없으니깐.’
그렇다고 음식을 해서 갈 수도 없었다.
이정환의 집에는 황대길도 같이 있었다. 그렇게 이정환의 집에 도착한 강현을 맞이한 건 이정환이었다.
“어서 오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선물입니다.”
“음? 뭘 이런 걸….”
이정환이 웃으며 선물을 받았다.
강현이 건넨 건 전통주였다. 와인을 살까 고민도 했지만, 황대길을 생각해서 전통주로 골랐다.
“일단 쉬고 있게. 아직 준비가 남았어.”
이정환은 그리 말하고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자 강현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와.”
상 위에 온갖 음식 늘어져 있었다.
갈비찜부터 육전, 잡채까지.
그야말로 잔칫상이었다.
“왔는가?”
먼저 온 정기훈 작가가 손을 흔들었다. 강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또 누가 오는 겁니까?”
이번에 부른 건 강현과 정기훈 작가뿐이라고 했다.
강현의 물음에 정기훈 작가가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나도 놀랐네.”
그도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당혹스러운 둘과 달리 뒤따라온 설기는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킁킁.
먹지도 않았는데 꼬리가 춤을 췄다.
자리에 앉은 강현은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집의 외관은 전통적인 한국 저택이었으나 안은 느낌이 달랐다.
양식 저택에 가까웠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거실에 놓인 거대한 피아노.
그리고 벽면에는 상장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놀라운 건 이정환만의 것이 아니었다.
‘가족 전체가 음악가구나.’
바이올린을 들고 웃고 있는 소녀와 심드렁한 표정으로 연미복을 입고 있는 소년.
그 뒤에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여인과 이정환이 같이 찍힌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정환의 모습은 지금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거의 십 년도 더 지난 사진 같았다.
그 외에도 곳곳에 음악에 관련된 장식이 눈에 띄었다.
‘서양식으로 꾸밀 수밖에 없었네.’
놓인 물건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한국 전통 가옥처럼 만들어도 이상할 거다.
그때, 접시들을 들고나오는 이정환이 보였다.
놀란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이정환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네.”
“맞아. 손님이니 편히 있게나.”
이정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대길 선생님.”
강현은 황대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황대길은 개량 한복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그 사이 집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둘은 주방에 몇 번이나 다녀온 후에나 자리에 앉았다.
넓은 테이블에 가득 올라가 있는 음식들.
더군다나 이 하나하나가 황대길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정말 호화스럽네.’
보고서도 믿기지 않았다.
“자, 어서 들게나. 집주인 놔두고 내가 할 말은 아니군.”
말을 꺼낸 황대길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끼잉.”
“그래, 너도 있었구나.”
설기가 앓는 소리를 내자 황대길이 커다란 대접을 들고 왔다.
그리고 음식을 골고루 담았다.
막무가내로 넣는 게 아니라 정갈하게 담은 듯 보였다.
곧 설기가 자신의 앞에 놓인 접시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빼꼼.
설기 등에 타고 있던 토리도 슬쩍 내려왔다.
그와 함께 정기훈 작가가 먼저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북엇국.
한 숟가락 떠먹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시원하군!”
그제야 다른 이들도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강현 역시 젓가락으로 갈비찜을 집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음!’
입안에서 부서지는 살코기.
그와 함께 풍미가 입안 가득 퍼져 나갔다.
이어서 잡채를 먹었다.
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간이 절묘했다.
‘…대단하네.’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강현으로서는 오르지 못한 산 너머를 본 느낌.
황대길은 일행들이 먹는 걸 기다렸다가 물었다.
“맛은 어떤가?”
“최고네. 정말 맛있군.”
“맞아. 이런 호사를 누릴 줄이야.”
정기훈 작가와 이정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황대길의 입가에도 주름이 피어났다.
요리사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기쁨은 없었다.
그건 대가라 불리는 이도 마찬가지였다.
곧 황대길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강현, 자네는 어떤가?”
맛있다고 대답하려던 강현은 황대길의 눈빛에 멈칫했다.
진지한 눈빛.
황대길이 물음이 앞의 둘과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강현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육전 하나를 입으로 가져갔다.
황대길 역시 그러한 강현을 기다려 줬다.
자연스럽게 정기훈 작가와 이정환의 젓가락질도 멈췄다.
둘 다, 강현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거실에는 설기가 먹는 소리만 들려왔다.
곧 강현의 입이 떨어졌다.
“…너무나 완벽하네요.”
말과 달리 강현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렇지?”
황대길도 씁쓸히 웃었다. 의아해하던 정기훈 작가와 이정환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뜻을 이해했다.
“…그렇군. 너무 완벽해.”
한 분야에서 정상에 오른 이들이었다. 강현의 말에 숨은 뜻을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너무 완벽하다.
강현으로서 더 올라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여기에서 무엇을 개선해야 할까? 강현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멈춰 설 수는 없었다.
강현은 황대길이 고민하던 게 무엇인지 알아챘다.
강현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황대길이 웃음을 흘렸다.
“괜찮네. 그래도 여기 온 덕분에 어느 정도 감을 잡았어. 자네 덕분이야.”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대길이 찾은 답이 무엇인지 듣고 싶었지만, 설령 듣는다고 해도 지금의 강현이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분위기가 가벼워지자 이정환이 일어났다.
“이럴 게 아니라 반주라도 하지. 강현이 좋은 선물을 들고 왔어.”
이정환이 강현이 건네줬던 선물을 꺼내 왔다.
하얀 호리병을 본 정기훈 작가의 눈이 빛났다.
“이강주군!”
이강주.
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명주였다.
“잔을…. 아니, 내가 가져오지.”
정기훈 작가가 일어나서 직접 잔을 가져왔다.
잔도 고풍스러워 보였다.
‘저리 좋아하실 줄은 몰랐는데.’
잔에 술이 찼다.
은은하게 올라오는 생강의 향. 이 냄새를 싫어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향과 다르게 맛은 부드럽고 깔끔했다.
일행들은 음식을 먹으면서 술잔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술이 얼큰하게 취하자 정기훈 작가가 입을 열었다.
“더 먹지 못하는 게 아쉽군.”
어느샌가 젓가락이 멈추고 술잔만 오가고 있었다.
설기와 토리도 식사를 끝내고 한쪽 구석에서 쉬고 있었다.
황대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한식의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네.”
일행들의 시선이 황대길로 향했다. 살짝 취기가 오른 황대길이 상 위에 올라온 요리들을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한식은 조화를 생각하네. 찬을 많이 내올수록 상대를 귀히 대접하는 것이지.”
강현은 황대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예상했다.
황대길은 육전 위에 무말랭이를 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이처럼 취향껏 자유롭게 먹을 수도 있지만.”
“…나중에는 섞여서 하나하나의 맛을 구별하기 힘들어지죠.”
강현의 말에 황대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달리 양식은 코스 요리에 익숙했다.
전채 요리부터 후식까지, 하나하나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하지만 한식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 하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따로 있네. 이처럼 가정집에서라면 남은 음식을 보관할 수 있지만….”
“매장은 다르죠.”
황대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음식을 다 버리게 된다. 일반 식당의 경우에는 반찬 수를 줄이지만, 아직도 정찬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은 반찬 대부분이 버려진다.
황대길은 나물 하나를 집었다.
“이 아이들도 귀하거늘. 난 아직도 무엇이 옳은지 모르겠네.”
강현은 황대길의 심정이 짐작이 갔다.
곁들어 먹는 반찬이라고 해서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건 아니었다.
자신이 애써 만든 요리가 그대로 버려지는 건 요리사에게 있어서 고통이었다.
그렇다고 기존의 방식을 바꿀 수도 없었다.
그러자 정기훈 작가가 입을 열었다.
“옳은 건 없네. 옳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야.”
“그렇지.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 방식이 다를 뿐이야.”
이정환 역시 말을 보탰다.
황대길은 그런 둘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가…. 다를 뿐인가.”
황대길이 씁쓸히 잔을 들어 올렸다.
답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었다.
황대길의 이야기가 끝나자 이번에는 이정환이 입을 열었다.
평소에 가지고 있던 고민을 던졌다.
다음은 정기훈 작가가.
하지만 그것들 모두 명확하게 답을 내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말한다고 해결될 문제 역시 아니었다.
그저 넋두리에 불과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해답을 원하는 게 아니란 걸 잘 알았다.
술을 마시기에 떠들 뿐이었다.
누군가 들어 줄 사람이 있기에 말하는 것이었다.
강현은 밤이 깊어질 때까지, 빈 술잔에 술을 따라 주면서 셋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 * *
다음날 매장에 나온 강현은 어제 황대길이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강현의 경우, 손님이 음식을 남기면 왜 남겼는지 이유를 생각한다.
무언가 부족했나?
입맛에 맞지 않았나?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출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요리사이기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대길은 달랐다.
애초부터 남겨질 걸 알면서 요리해야 한다.
“…어렵네.”
볼을 긁적인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어제 정기훈 작가와 이정환이 말한 것처럼 옳고 그른 게 아니었다.
그저 방식의 차이일 뿐이었다.
그러한 강현의 상념은 이어지지 못했다.
매장 문이 열리고 손님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세…. 어?”
손님을 확인한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동생, 잘 있었나?”
환하게 웃고 있는 중년인. 얼마 전 운동회에서 만났던 장만기였다.
혼자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쑥스러운 듯이 인사하는 곽도현과 반갑게 손을 흔드는 응언도 있었다.
“다 같이 어쩐 일이세요?”
“집에 있었는데 만기 씨께서 찾아왔습니다.”
응언의 말에 곽도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전에 온다고 했었잖아. 그럼 와야지. 마지막까지 함께한 사인방 아닌가!”
장만기의 말에 강현이 웃음을 흘렸다.
마지막까지가 아니라 마지막만 함께 했다.
그리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장만기는 뛰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런 건 상관없었다.
장만기가 슬쩍 강현의 눈치를 살폈다.
“아, 곤란한가?”
“설마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강현의 말에 장만기가 웃음을 터트리더니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정말 이런 곳에 식당이 있었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장만기가 강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급히 고개를 저었다.
“동생, 오해하지 마. 우리 마을도 여기랑 비슷하거든. 우리 마을에는 식당이 없어서 그래.”
“오해 안 할 테니 편히 앉으세요.”
강현은 셋을 자리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장만기가 둘을 돌아보았다.
“자, 맘껏 시켜. 이 아저씨가 제대로 한 턱 낼게.”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둘을 보더니 강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만 먹어서 미안하네. 동생은 담에 술 한번 진하게 하자고.”
장만기가 손가락으로 술잔 모양을 만들더니 입에 털어 넣었다.
정말 유쾌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