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한잔해야지
쉬는 날, 강현은 다시 이세계로 향했다.
평소와 다르게 가벼운 옷차림.
오늘은 캠핑하러 온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문을 넘자마자 설기가 몸을 털었다.
그리고 설기 위에 있던 토리 역시 기지개를 켰다.
지구에 많이 적응했다고 해도 역시나 고향이 좋아 보였다.
토리가 설기의 머리에서 내려오더니 강현의 어깨에 올라탔다.
강현은 그런 토리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목걸이를 꺼냈다.
수인들을 부르는 신호.
강현이 호각을 불려는 찰나, 수풀이 흔들렸다.
그리고 튀어나온 작은 그림자.
“바압!”
“…이젠 인사가 그거냐?”
강현은 두 팔을 들어 올린 모나를 보며 실소를 흘렸다.
말을 배운 게 아니라 저 단어만 배운 건가?
그러는 사이에 네발로 엉금엉금 기어 오더니 강현의 앞에 섰다.
평소처럼 안아 달라는 건가?
그러나 멀뚱멀뚱 쳐다볼 뿐 손을 뻗지 않았다.
아니,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모나의 시선이 향한 곳은 강현의 어깨.
‘…안 보이는 거 맞아?’
모나가 노려보자 토리가 슬그머니 강현의 머리 위로 도망쳤다.
모나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강현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손잡아 달라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위에 올라가는 걸 더 좋아했는데, 오늘은 내키지 않아 보였다.
‘동물적인 감각이란 건가?’
콧노래를 부르며 손을 흔드는 모나를 보며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음, 오늘은 여기서 밥 안 할 건데.”
“응?”
손을 흔들던 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뒤늦게 강현이 다른 손에 쥐고 있던 호각에 눈이 갔다.
순간, 모나의 몸이 굳었다.
모나의 눈동자가 물결쳤다.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떨려 오는 눈.
강현은 곤란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슬그머니 호각을 내려놨다. 모나는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고 있었다.
“…그래, 가자.”
이대로 수인들을 부를 순 없었다.
‘산책이라도 해야겠네.’
밥은 해 주지 못해도 그 정도는 가능했다. 강현이 걸음을 옮기자 그제야 모나의 경계심도 사라졌다.
다시 환하게 웃는 모나를 보며 강현은 웃음을 흘렸다.
* * *
숲속을 천천히 걷는다.
선선한 바람과 함께 풀과 나무의 냄새가 올라왔다.
기분 좋은 바람.
모나나 설기나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놀렸다.
강현은 모나를 힐끗거렸다.
‘밥 달라고 떼를 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얌전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고 쪽쪽 빨고 있었다.
모나 손톱의 날카로움을 알고 있는 강현은 잠깐 걱정이 되었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저러다 다치면 하지 않을 거다.
‘생선 뼈도 씹어 먹는 아이니.’
입안도 단단할 거다. 그때, 강현의 머리 위에만 있어서 심심했는지 토리가 강현의 팔을 타고 슬그머니 내려왔다.
팔꿈치까지 오자 모나가 고개를 휙 돌렸다.
고양이를 닮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움찔한 토리가 다시 후다닥 도망쳤다.
“응?”
킁킁, 냄새를 맡는 모나.
그러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깨 위에서 오들오들 떠는 토리.
강현은 슬쩍 토리를 들어서 설기의 머리 위로 옮겨 줬다.
두리번거리던 토리가 설기의 털을 타고 내려와서 땅바닥으로 쏙 들어갔다.
땅속이 편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강현의 걸음이 멈췄다.
자연스레 모나와 설기의 발걸음도 멈췄다.
강현은 앉아서 모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오늘은 장비가 없어서 밥을 해 줄 수 없어.”
강현이 매고 있는 배낭을 툭툭 건들었다.
“대신 모나네 같이 가자. 어때?”
강현의 질문에 손가락을 입에 문 모나가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은 그런 모나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사람들 부른다?”
목걸이에 손을 가져가자 움찔거렸지만, 전처럼 거부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제야 강현이 호각을 불었다.
삐이이이―
낮게 울리는 호각 소리.
그리고 자리에 앉아서 수인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무가 흔들리더니 검은 그림자 하나가 떨어졌다.
나타난 이는 강현에게도 익숙한 이였다.
“노아 씨.”
강현이 반갑게 맞이했다.
짧게 고개를 끄덕여서 인사를 건넨 노아의 시선이 모나에게 향했다.
“모나를 데려가면 되는 건가?”
담담하게 말하는 노아. 모나가 캬악,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노아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예. 그리고 저도요.”
강현의 말에 노아의 눈이 커졌다. 그런 노아를 보며 강현이 말을 이었다.
“카샨 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음!”
노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지 못한 반응에 강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곤란한가요?”
강현의 물음에 노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겠지.”
그리 말한 노아가 강현을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 강현의 허리를 잡았다.
이제는 익숙한 감각에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망설였는데.’
강현은 몸이 뜨는 걸 느끼며 두 눈을 감았다.
그런 강현의 귓가에 신이 난 설기의 소리가 들려왔다.
* * *
다시 들린 마을은 전과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대부분은 전과 다르지 않았지만, 몇몇은 강현을 향해 곱지 않은 눈초리를 던졌다.
‘어째 전보다 경계심이 심해진 거 같은데.’
노아가 망설였던 이유가 이 때문인가?
그러나 일부일 뿐이고, 대부분은 강현을 반겼다.
그중에는 강현에게 요리를 배운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놀고 있던 아이들의 눈도 반짝였다. 자신을 고깝게 보는 이들과는 다른 의미로 무섭게 다가왔다.
자신도 모르게 슬쩍, 옷 냄새를 맡아 보는 강현이었다.
“스승님!”
저 멀리서 반갑게 손을 흔드는 하만. 강현 역시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넨 후 노아를 돌아보았다.
“마을에 무슨 일이 있나요?”
강현의 물음에 노아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족장님께 직접 듣는 게 나을 거다.”
노아의 말에 강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카샨을 만날 거다. 궁금증은 그때 풀어도 늦지 않았다.
커다란 천막에 들어가자 피곤한 표정의 카샨이 있었다.
“오, 이게 누구야. 내 술친구 아닌가?”
언제 술친구가 된 거지?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그런 강현을 보며 카샨이 씩, 웃었다.
“한잔하자고 온 건가?”
“아뇨. 상담할 게 있어서요.”
“상담?”
카샨의 눈이 커졌다. 그러더니 곧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오호라. 우리 수인족 중에 맘에 드는 아가씨가 있는 모양이로군. 설마 하만인가?”
“…아닙니다.”
“뭐? 하만이 마음에 안 들어?”
“….”
강현이 한숨을 내쉬자 카샨이 껄껄 웃었다.
일부러 놀리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은 후에나 자세를 고쳤다.
“그럼 무슨 일이지?”
그런 카샨을 향해 강현의 입이 열렸다.
* * *
강현은 이 마을에 왔다 갔을 때부터 인간들의 영지를 간 일, 그리고 영주를 만났던 것까지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 갔다.
장난스러운 표정이 사라지고 진지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듣는 카샨.
노아 역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금세 진지해졌다.
강현의 이야기가 끝나고 한참이 지나도록 둘은 말이 없었다.
자리가 지루했는지 설기와 모나가 한쪽 구석에서 놀고 있었다.
“…그렇군. 인간들의 영주는 이쪽과 교류하고 싶어 한다고?”
“예. 직접 그리 말씀하셨어요.”
“흐음.”
카샨이 턱을 쓸어내렸다. 강현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곧 그녀의 시선이 노아에게 향했다.
“어떻게 생각해?”
“…공교롭군요.”
“그렇지?”
노아의 대답에 카샨이 입꼬리를 올렸다.
둘만 아는 대화에 강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마을 분위기가 변한 것과 관계가 있는 겁니까?”
강현의 질문에 카샨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알아챘나? 외부인인 너까지 알 정도라면 다들 알고 있겠군.”
고개를 끄덕인 카샨.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대수로운 일은 아니야. 단지 변화를 두려워하는 녀석들이 있을 뿐이지.”
변화. 그 말에 강현은 집히는 게 있었다.
“…향신료 때문이군요.”
카샨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이로운 일이라고 해도 모두가 반기는 건 아니었다.
“핑계일 뿐이지. 언제부터의 전통이야? 백 년 전만 해도 요정들의 과일도, 인간들의 곡식도 받았잖아.”
강현의 눈이 커졌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조반테 역시 같은 말을 했었다.
백 년 전에 교류를 독점하는 덕분에 가문이 번창했다고.
그렇다면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들의 문물을 받아들였다는 뜻이었다.
“결국,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같잖은 핑계로 애들이나 꼬드기고.”
“그렇다고 이대로 지켜볼 수는 없습니다. 다른 부족과도 접촉하고 있습니다.”
“고리 부족이지?”
카샨의 말에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그 노친네, 욕심이 많다니깐….”
혀를 차는 카샨. 강현은 조용히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외부인이 끼어서 좋을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잘 됐지. 전부터 눈에 거슬렸는데. 이 기회에 맘에 안 드는 녀석들을 싹 정리하면 되잖아.”
카샨이 사납게 웃었다. 그녀를 본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타 종족들과 싸움이 금지된 거지, 같은 종족 간의 분쟁까지 금지된 건 아니었다.
그리고 수인족은 싸움을 즐기는 호전적인 종족이었다.
수인은 걸어온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곧 카샨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인간의 영주와 만나자고 해. 교류할지 말지는 만나 보고 이야기하자고.”
그리 말한 카샨이 슬쩍 노아를 보았다.
“테무 영감이 이 소식을 들으면 펄쩍 뛰겠지?”
“오히려 좋아할 겁니다.”
담담한 노아의 대답에 카샨의 미소가 짙어졌다.
“좋아. 오랜만에 재밌어지겠어.”
테무. 강현에게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노아와 같은 전사장.
“그쪽에 잘 흘려 봐.”
“알겠습니다.”
즐거워하는 카샨. 카샨은 이번 만남을 단순히 인간과의 교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반란자들을 처단할 수단으로 이용할 생각이었다.
강현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다른 세상이네.’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보던 일이 이곳에서는 실제로 일어난다.
그때, 카샨의 팔이 강현의 어깨를 감쌌다.
“그럼 그쪽 이야기는 끝났으니 내 일을 볼 차례군.”
카샨의 말에 강현이 의아해했다.
“제게 무슨 용무가 있나요?”
왔을 때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강현의 물음에 카샨이 손을 들어 올렸다.
까딱, 까딱.
술잔을 마시는 모양새.
“모처럼 만났는데 한잔해야지. 안 그래, 노아 전사장?”
카샨의 물음에 노아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샨 역시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가서 겁쟁이들에게 보여 주자고. 우리 사이가 얼마나 돈독한지 말이야.”
휘적휘적.
강현을 어깨동무한 채 천막 밖으로 향했다.
그러자 놀고 있던 설기와 모나의 시선도 카샨에게 향했다.
“오늘은 맘껏 먹어라.”
카샨의 말에 설기와 모나의 눈이 반짝였다.
“컹!”
“바압!”
마치 영화에서 봤던 좀비처럼 카샨의 뒤를 쫓았다.
천막 밖으로 나오자 수인들의 시선이 몰렸다.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을 전수해 준 친구가 왔다! 얼마나 잘 배웠는지 보여 줘야지? 가서 사냥해라! 불을 피워라! 축제다!”
카샨의 외침에 사방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중에 몇몇이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를 빠져나가는 게 강현의 눈에도 보였다.
강현이 알아챌 정도니 카샨도 봤을 거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그들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제 나도 모르겠네.’
강현도 수인들을 따라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날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