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잘 부탁해?
그렇다고 해서 강현이 밭 전부를 할 순 없었다.
게다가 누굴 해 주고 또 누구는 안 해 주면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
강현의 시선이 토리에게 향했다가 떨어졌다.
결국, 이장과 이야기하여 진짜로 도움이 필요한 집들만 도와주기로 했다.
그리고 이장의 이야기를 들은 마을 사람들은 아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도 매장을 운영해야 하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강현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이장을 통해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렇게 오전에 잠깐씩 나서서 밭을 돌다 보니 어느새 추석이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강현은 다시 민호의 집으로 향했다.
강현의 과일 바구니를 본 수진의 눈이 커졌다.
“이런 건 안 가져오셔도 되는데….”
“그래도 빈손으로 오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강현의 대꾸에 수진이 살포시 웃더니 입을 열었다.
“어서 들어오세요.”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향했다.
들어가기 전에 설기의 발도 깨끗하게 닦아줬다.
간지럽다는 듯이 몸을 비트는 설기.
그 모습에 수진의 눈이 부드러워졌다.
“너무 안 그러셔도 돼요.”
농사일하다 보면 흙이 자주 들어온다. 그러한 수진의 설명에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남의 집이니 예의는 지켜야 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자 거실에 있던 민호와 민호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잘 오셨어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현의 인사에 민호 아버지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 두리번거리던 설기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하은이라면 작은 방에서 자고 있어.”
수진의 말에 설기의 눈이 반짝였다. 토리는 낮에 설기와 놀아 주다 지쳤는지,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웃음을 흘린 수진이 작은 방을 열어줬다.
강현은 방으로 쏙 들어가는 설기를 보며 다급히 손을 뻗었지만 수진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하은이도 설기를 좋아해요.”
수진의 말에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설기의 행동을 생각하면 일부러 깨우거나 하진 않을 거다.
‘그래도 신기하네.’
몇 번 관심을 가지고 끝날 줄 알았다.
설기가 먹을 것 이외에 저렇게 관심을 보이는 건 드물었다.
아이가 신기한 건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자 옆에 있던 민호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앉으쇼.”
“아, 예.”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옆자리에 앉았다.
“그럼 전 식사를 준비할게요.”
“나도 도울게.”
“괜찮아요. 앉아서 강현 씨 말동무나 해 줘요.”
일어났던 민호가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말동무. 민호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민호가 빠지면 민호 아버지와 강현만 남게 되었다.
분위기가 어떨지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민호가 입을 열었다.
“저희 때문에 고생했다고 들었습니다.”
“예?”
뜬금없는 말에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분들 밭도 도와주시러 다녔다고….”
“아, 그거요?”
강현이 웃음을 흘렸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한가할 때 잠깐잠깐 도와주는 거예요.”
문제가 생기지 않게 이장이 잘 조율해 주고 있었다.
그러한 강현의 대답에 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수진이 커다란 쟁반을 들고 주방에서 나오는 게 보였다.
민호가 황급히 일어나서 수진의 쟁반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수진이 눈을 흘겼다.
“이젠 괜찮다니깐요.”
“그래도….”
민호의 말에 수진이 한숨을 내쉬고 쟁반을 건넸다.
그러나 말과 달리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곧 상 위에 푸짐한 반찬들이 올라왔다.
각종 전과 갈비찜, 잡채 그리고 소고기뭇국까지.
정말로 추석에나 볼 수 있는 음식들이 한가득 올라왔다.
강현의 눈이 커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걸 다 준비하신 거예요?”
“민호 씨가 많이 도와줬어요.”
수진의 말에 민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강현 씨 덕분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때, 작은 방에 있던 설기가 슬그머니 걸어 나왔다.
밥때가 된 걸 알고 온 것이었다.
‘그래도 아기보다는 밥이 먼저네.’
강현은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반찬이 깔리자 민호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하지만 민호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강현은 의아해했지만 곧 민호 아버지가 일어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돌아오는 민호 아버지의 손에는 녹색 병과 소주잔이 들려 있었다.
반주를 하려는 것이었다.
잔은 모두 세 개.
민호 아버지는 말없이 강현에게 잔 하나를 건넸다.
맑은 잔 위에 투명한 액체가 차올랐다.
그리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깻잎전을 한 입 베어 문 강현은 소고기뭇국을 떠먹었다.
이런 식사는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시원하게 넘어가는 소고기뭇국.
강현을 자신을 바라보는 수진을 향해 미소 지었다.
“정말 맛있네요.”
“그래요?”
강현의 대답에 수진의 표정이 환해졌다.
“열심히 만든 보람이 있네요. 더 있으니 많이 드세요.”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려한 맛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정겨운 맛이었다.
강현의 요리에서는 보기 힘든 맛.
물끄러미 식탁을 바라보던 강현은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민호 아버지.
모른 척 시선을 피하는 민호 아버지. 강현은 민호 아버지의 잔이 비어 있는 걸 깨닫고 소주잔을 들었다.
“험, 고맙소.”
술잔이 다시 차올랐다.
민호와 수진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쑥스러워진 강현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고, 민호 아버지 역시 작게 헛기침했다.
서로 술잔이 오가는 사이에 식사 자리가 끝났다.
숟가락과 젓가락이 멈추자 수진이 다시 일어났다.
“정리하고 후식 준비해 드릴게요.”
“아, 도와드리겠습니다.”
강현이 일어나려고 하자 수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수진 대신 민호가 입을 열었다.
“제가 도울 테니 앉아 계십시오.”
둘의 그릇을 정리해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민호 아버지와 강현, 둘만 남게 되자 거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민호 아버지가 입을 뗐다.
“…고맙소.”
“예?”
강현이 민호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민호 아버지는 여전히 술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농사일이라면 괜찮습니다. 저도 민호 씨와 수진 씨한테 많이 도움받았어요.”
그러나 민호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민호 말이오. 말은 안 하지만, 친구들도 다들 도시로 떠나가고 제 어미까지 잃었으니 외로울 거요.”
민호 아버지는 술잔에 술을 따랐다. 강현이 손을 뻗었지만, 이번에는 손을 거절했다.
술잔이 차오르자마자 들이켰다.
그리고는 주방 너머를 바라보았다. 민호 아버지의 입가에 주름이 떠올랐다.
“집에 좋은 며느리가 들어와서 다행이지만, 그래도 아내와 친구는 다르겠지.”
다시 또 한잔.
술잔에 술이 차올랐다.
이번에는 바로 마시지 않고 빤히 쳐다보았다.
“이번에 손녀를 낳을 때도 옆에 같이 있어 줬다고 들었소. 아비인 내가 할 일인데….”
그리 말한 민호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더니 술잔을 들이켰다.
“난 못난 아비요. 이런 아비라 칭찬도 위로도 서투르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민호 아버지가 강현을 보았다.
“그러니 앞으로도 민호와 며느리와 잘 지내 줬으면 좋겠소.”
“예. 걱정하지 마세요.”
강현의 대꾸에 민호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슬며시 일어났다.
“말이 많아진 걸 보니 취했소. 먼저 들어가 보리다.”
강현이 따라 일어나려고 하자 민호 아버지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고는 안방에 들어가더니 문이 굳게 닫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진과 민호가 쟁반을 들고 나왔다.
강현을 보는 둘의 표정이 어색해 보였다.
강현과 민호 아버지의 대화를 들은 것이었다.
강현도 어색한 미소로 그들을 맞이했다.
어색함이 거실을 짓눌렀다.
곧 수진이 쟁반을 내려놓았다.
쟁반 위에는 송편과 곶감이 담겨 있었다.
“음, 그럼 저희 친구끼리 한잔할까요? 전 술 대신 식혜로 짠 할게요.”
수진이 장난스럽게 소주잔을 흔들었다.
그러자 강현과 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술잔을 나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셋의 얼굴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피어났다.
* * *
강현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예상보다 늦게 끝났네.”
술자리가 길어졌다. 서로 많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자리 자체가 즐거웠기 때문이었다.
강현의 시선이 옆에 따라오는 설기에게 향했다.
“어떻게 할래?”
“컹!”
강현의 물음에 설기가 짖었다.
설기의 대답에 강현이 미소 지었다.
“그래, 가자.”
현관을 열자 배낭과 보따리가 보였다. 바로 떠날 수 있게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내일부터 사흘 동안 매장을 쉬기로 했다.
모처럼이니 강현도 휴가를 떠나기로 한 것이었다.
당연히 휴가지는 이세계였다. 무려 삼박 사일의 장박.
‘고작 삼박 사일을 장박이라고 말하긴 그렇지만.’
강현에게 있어서는 장박이었다.
강현은 보따리를 설기에게 메어 주고 배낭을 걸쳤다.
어깨를 짓누르는 감각이 제법 묵직했다.
‘식자재를 뺐는데도 이러네.’
일박과 연박은 달랐다. 필요한 물품이 많았다.
식자재는 되도록 현지에서 조달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강현과 설기는 이세계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 날.
강현이 현실에 없는 사이, 오늘의 셰프가 방영되었다.
* * *
이세계에 도착하자마자 짙은 어둠이 강현을 맞이했다.
하늘 높게 흐르는 별빛들.
이세계도 밤이 찾아온 것이었다.
“민 아저씨를 만나서 다행이네.”
동네 주민.
추석이란 걸 깜빡하고 나갔다가 택시를 잡을 수 없어서 곤란에 빠졌었다.
혹시 몰라서 택시 회사에 전화해도 위치를 듣더니 거절했다.
명절 당일, 강현이 있는 시골까지 들어오기는 힘든 것이었다.
꼼짝없이 매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
그때 나타난 것이 민 아저씨였다.
강현을 보더니 택시를 잡을 수 있는 큰 마을까지 태워 준 것이었다. 덕분에 무사히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천천히 걷고 있자 뿅 하고 토리가 튀어나왔다. 이세계에 와서 체력이 회복된 것이었다.
강현은 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주변을 살폈다.
“오늘은 여기다 텐트를 쳐야겠네.”
이렇게 어두운 상황이라면 이동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저녁도 든든하게 먹은 상태였다.
“컹!”
강현의 말에 설기가 밝게 짖었다.
그리고 흔들리는 꼬리. 설기의 기분을 읽은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놀고 와도 돼.”
그러나 강현의 허락에도 설기는 쉽사리 떠나지 못했다.
“끼잉.”
한 발자국 나섰다가 강현을 돌아보고, 또 한 발자국 걸어갔다가 강현을 돌아보았다.
어둡기에 강현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강현도 곤란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마음 같아서는 다녀오라고 하고 싶지만, 숲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 들었다.
그때, 설기의 귀가 쫑긋 솟았다.
무언가가 떠오른 것이었다.
“아우우우!”
긴 하울링. 이어서 숲 너머에서 답변이 돌아왔다.
“아우, 아우우!”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거대한 그림자가 수풀 너머에 나타났다.
하나가 아니라 점점 늘어 갔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는 눈동자들.
그때, 가운데 있던 그림자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사나운 눈빛에 저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그림자가 가까이 오고 난 후에나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익숙한 짐승이었기 때문이었다.
강가에서 만난 우두머리 늑대.
설기가 우두머리 늑대에게 무언가를 말하자 늑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두머리 늑대가 무리에 있는 늑대들을 향해 눈짓했다.
곧 늑대무리에서 두 마리의 늑대가 걸어 나왔다.
수풀 사이에 털썩 걸터앉은 두 마리의 늑대.
우두머리 늑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리를 이끌고 떠나갔다.
그제야 설기가 강현을 돌아보았다.
“컹! 컹!”
기분이 좋은지 몸을 흔드는 설기. 강현은 설기의 뜻을 이해했다.
“…호위라고?”
“컹!”
강현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새끼 늑대들은 몇 번이나 봤지만, 성체는 멀리서 본 게 전부였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컸다.
‘…무섭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든든했다.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녀와.”
“컹!”
강현의 말에 설기가 짖더니 그대로 수풀로 몸을 날렸다. 강현은 그런 설기를 보다가 슬그머니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잘 부탁해?”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