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이젠 더 못 먹겠어
고개를 돌리니 설기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 상황을 반기는 것 같았다.
“…저건 너 혼자 다 못 먹어.”
설기가 고개를 붕붕 저였다.
“컹!”
다 먹을 수 있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강현은 실소를 흘리고는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안 돼. 탈 나.”
설기의 식사량은 강현이 잘 알고 있었다.
이걸 다 먹으면 과식 정도가 아니었다. 그러한 설기의 옆에 토리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고향에 돌아온 덕분인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더 나눠 줄 걸 그랬나.”
선선한 날씨에 아이스박스까지 가져왔지만, 밖에 오래 놔둬서 좋을 리가 없었다.
강현은 설기에게 부탁해서 다른 이들을 불러 볼까 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일이 없었다면 진작에 나타났을 거다.
‘그분들도 매일 노는 게 아니니깐.’
다들 저마다의 생활이 있었다.
“어쩔 수 없네.”
강현은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는 설기를 보며 웃었다.
“먹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먹어 봐야지.”
“컹!”
설기가 힘차게 짖었다.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후회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강현은 장작으로 쓸 나뭇가지를 줍기 시작했다.
* * *
그릴 위에 고기가 올라갔다.
삼겹살. 무려 제주에서 올라온 흑돼지였다.
치익, 치이익.
금세 고기에서 기름이 떨어져 내렸다.
기름 소리에 저절로 식욕이 올라왔다. 그와 함께 흔들리는 꼬리.
얼마나 격렬한지, 강현이 있는 자리까지 털이 날아왔다.
삼겹살이 끝이 아니었다.
옆에 대왕 가리비도 올렸다. 그리고 매장에서 가져온 버섯과 소시지를 올리고 나니 그릴 위가 가득 찼다.
‘제대로네.’
전에 꼬치 때와는 다른 비주얼이었다.
설기는 참기 힘들었는지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멀찌감치 떨어져서 방방 뛰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들어가지 않게 하려는 건가?’
이리저리 뛰는 설기를 보며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토리는 뜨겁지도 않은지 불 앞에서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노곤한 표정.
똘망똘망한 눈이 오늘은 풀어져 있었다.
마치 사우나에라도 온 것처럼 보였다.
그릴 위에 음식보다는 불에만 관심을 보였다. 지구 때와 달리 식욕이 준 것이었다.
그런 토리도 고기를 뒤집자 몸이 움찔거렸다.
노릇노릇 잘 구워진 고기.
뒤집자마자 냄새가 확 올라왔다.
“김치를 챙겨올 걸 그랬네.”
강현은 고기를 보자마자 그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다른 재료들을 챙기느라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새 다가온 설기.
불 쪽으로 다가가려는 설기를 붙잡았다.
“아직이야. 아직 안 익었어.”
이제 한쪽 면만 익었을 뿐이다.
“끼잉.”
아쉬워하는 설기. 강현은 그 기분을 이해했다.
그리고 반대쪽 고기가 익기도 전에 가리비에서 물이 흘러나오면서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강현은 집게와 가위로 가리비를 잘라 준 후 한쪽에만 버터를 올려 줬다.
화악 올라오는 버터의 향.
설기뿐만 아니라 강현도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는 가리비 한 점을 집어서 설기에게 건넸다.
한입에 삼키는 설기.
“어때?”
“컹! 컹!”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설기의 꼬리가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설기를 만족시키기에는 너무 작았다.
더 없냐는 눈빛으로 강현을 바라보는 설기.
강현은 한 점을 더 건네고 다른 한 점은 작게 잘랐다.
토리를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토리는 가리비를 힐끗 보더니 시선을 돌렸다.
고기와 함께 있는 버섯.
“이걸 달라고?”
끄덕끄덕.
강현은 피식 웃고는 가리비를 입에 넣었다.
버터와 함께 바다의 짭조름함이 물씬 올라왔다. 그러자 토리가 거절했을 때부터 기대하고 있던 설기의 고개가 떨어졌다.
“넌 두 개나 먹었잖아.”
강현은 설기의 뺨을 쿡, 찌르고는 버섯을 잘라서 토리에게 건넸다.
잘린 버섯을 씨앗처럼 들고 야금야금 먹고 있는 토리.
불을 다루는 정령답게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때, 강현의 눈에 삼겹살이 들어왔다.
‘어디.’
삼겹살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러자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반대편이 보였다.
다 익은 것이었다.
강현은 삼겹살을 집게로 들어 올렸다.
가위로 자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옆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 멈칫했다.
설기였다.
잠시 고민하던 강현은 고기 한 덩어리를 설기의 접시 위에 올렸다.
“자.”
익은 삼겹살은 한 덩어리가 더 있었다. 그걸 잘라서 먹으면 되었다.
게다가 설기에게 잘라 줘 봤자 한입에 다 넣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접시 위에 올려진 삼겹살을 덥석 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치켜드는 설기.
그러한 설기를 따라 삼겹살이 원을 그렸다.
“잠깐, 기름 튀잖…!”
놀란 강현이 뭐라고 하려다가 눈을 껌뻑였다.
삼겹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입 주변에 묻은 기름을 핥는 설기.
‘대체 어떻게 먹은 거야?’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졌다.
마법이 이러할까.
“…면도 아니고….”
잠시 생각하던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고민해 봤자 손해였다.
집게를 들고 고기를 자르는 강현.
슬그머니 강현의 곁으로 온 설기.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처럼 강현을 향해 순진한 눈빛을 보냈다.
강현은 피식 웃고는 고기 몇 점과 가리비를 더 올려 줬다.
“이번에는 천천히 먹어야 해.”
끄덕끄덕.
설기가 접시를 향해 얼굴을 가져갔다.
그리고 강현은 토리에게 고기 한 점을 건네고는 자신도 입으로 가져갔다.
씹는 순간 퍼져 나가는 육즙.
한국인이라면 싫어할 수 없는 맛이었다.
“이럴 게 아니네.”
벌떡 일어난 강현이 아이스박스를 열었다.
두 개의 맥주캔과 쌈장.
가져오자마자 하나를 바로 땄다.
치이익.
올라오는 거품을 바로 마셨다.
시원한 맥주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기름의 느끼함을 단번에 날려 주었다.
그리고 고기 한 점을 집어서 이번에는 쌈장에 찍었다.
“음.”
고개를 끄덕이는 강현.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청명한 하늘.
구름이 유유히 떠돌고 있었다.
“좋다.”
사람들과 떠들썩하게 어울리는 것도 즐겁지만, 이렇게 여유롭게 지내는 것 역시 좋았다.
“컹!”
설기의 부름에 강현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고개를 돌리니 빈 접시를 슬쩍 내미는 설기.
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접시를 채워 줬다.
그러다 보니 그릴 위가 횅해졌다.
강현은 새로이 가리비와 삼겹살을 올렸다.
이번에는 세 덩어리.
두 덩어리씩 구워서는 설기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어떻게든 구겨 넣으니 세 덩어리가 다 올라갔다.
“…사람이 많았으면 힘들었겠네.”
그릴이 너무 작았다. 강현이 가져온 그릴도 사인용이었다. 그러나 설기, 하나 감당하기 벅찼다.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또 사야 하나?”
사는 건 괜찮으나 가지고 다니는 게 문제였다.
전에 냄비를 가지고 올 때를 떠올렸다.
만일, 란돌프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옮기는 것조차 벅찼을 거다.
그렇다고 장비를 숲속에 가져다 놓을 수도 없었다.
‘…그럼 캠핑이 아니지.’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숲속에는 야생 동물도 많았다. 문제가 생길 거다.
방법을 좀 더 생각해 봐야 했다.
그때, 밑에서 토리가 꼼지락거리는 게 보였다.
기어 오더니 강현의 무릎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더 줄까?”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토리. 그러더니 강현의 무릎 위에 배를 드러내고 누웠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배.
강현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쿡쿡 찔러 보았다.
말랑말랑한 감촉.
강현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였다.
“아직 메인은 나오지도 않았어.”
토리는 강현의 손길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강현은 피식 웃고는 집게를 들었다.
* * *
다시 그릴이 비워지자 강현이 토리를 바닥에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아직 삼겹살이랑 가리비가 남아 있긴 하지만.’
더 먹었다간 다른 걸 먹지 못할 거다.
강현은 아이스박스에서 새우를 꺼냈다.
킹타이거 새우.
이름처럼 거대한 새우였다.
새우 두 마리의 내장을 빼고 머리부터 등까지 반으로 갈랐다.
그리고 안쪽 살 위에 후추와 소금을 뿌린 후에 그릴 위에 올렸다.
두 마리만 올라갔을 뿐인데 그릴이 꽉 찼다.
새우의 크기에 설기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속살이 어느 정도 익었을 때, 버터와 치즈를 살 위에 뿌려 준다.
너무 많이 올린 탓에 치즈가 녹으면서 밖으로 흘러내렸지만, 강현은 개의치 않았다.
치즈가 타면서 냄새가 올라왔다.
강현은 새우가 익자마자 그릇에 덜었다.
아직 구울 게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팩에 담긴 선 분홍색 고기.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한우였다.
먼저 토시살.
‘처음부터 이걸 꺼냈으면 제대로 먹지도 못했겠지.’
순식간에 설기의 입속으로 사라졌을 거다.
강현은 다 올리지 않고 한 번에 먹을 양만 그릴 위에 올렸다.
치익.
금세 변하는 색.
동시에 육즙이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다시 뒤집어서 익힌 후 접시에 덜었다.
설기는 세 점, 강현은 한 점.
설기는 이미 킹타이거 새우를 먹고 있으면서 고기를 보더니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강현 역시 입으로 가져갔다.
부드러운 식감.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벌써 사라졌다.
그렇게 고기를 삼킨 강현은 반사적으로 맥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비어 있는 맥주캔.
‘…언제 이렇게 마셨지?’
네 캔이나 가져왔는데 남은 게 없었다.
홀짝이다 보니 네 캔을 전부 비운 것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강현은 아이스박스에서 하얀 병을 꺼냈다.
소주.
란돌프를 위한 것이었다.
‘과음은 안 좋지만….’
오늘 같은 날 정도는 괜찮을 거다.
란돌프는 병 채로 마셔서 소주잔도 챙겨 오지 않았다. 강현은 어쩔 수 없이 물잔에 소주를 따랐다.
쪼르르.
작은 물잔에 반 정도 찼다.
그리고 한 모금.
전기가 오른 듯 찌릿함이 올라왔다. 눈살을 찌푸린 강현의 시선이 다시 팩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안창살이야.”
고개를 갸웃하는 설기. 강현은 그러한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고기를 올렸다.
* * *
해가 뉘엿뉘엿 저 갈 때쯤, 강현의 집게도 멈췄다.
“…이젠 더 못 먹겠어.”
“끼이잉.”
옆에 있던 설기도 대꾸했다. 설기의 배도 볼록하게 튀어나온 상태.
강현의 시선이 남은 음식들로 향했다.
‘많이 먹긴 했는데.’
그래도 많이 남아 있었다. 내일 아침에 또 먹고서도 남을 양.
‘…아침을 먹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현이나 설기나 이미 한계였다. 아침까지 소화가 될지 알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돌아갈 때까지 무사하길 바래야 하나?”
아이스박스의 성능을 믿어야 했다.
강현은 주섬주섬 먹은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뜩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안 본 지 오래됐네.’
모나.
그렇게 모나를 생각하고 있을 때, 엎드려 있던 설기가 고개를 들었다.
쫑긋 올라오는 귀.
꼬리 역시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아해하던 강현의 귀에 들리는 익숙한 소리.
부스럭부스럭.
자연스레 강현의 고개를 돌아갔다.
‘설마.’
수풀이 흔들리더니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데구루루.
익숙한 모습에 강현이 미소 지었다.
작은 그림자는 구르던 걸 멈추자마자 두 팔을 위협적으로 들어 올렸다.
“크아아아아아!”
작은 포효.
그러나 강현의 눈에는 귀엽게만 보일 뿐이었다.
설기도 반가운지 꼬리를 흔들었다.
“컹! 컹!”
그러자 모나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어린아이는 눈을 떼면 자란다고 했던가.
잠깐 못 본 것 같은데 키가 더 큰 것 같았다.
모나는 설기와 강현을 번갈아 보더니 입을 오물거렸다.
“…바.”
“바?”
강현의 눈이 커졌다.
반갑다고 인사라도 하려는 것인가? 그 사이에 정말로 말을 배운 건가?
기대 섞인 눈으로 모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모나의 입이 열렸다.
“…바, 밥. 바압!”
“아, 그거구나.”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오랜만에 만나서 처음으로 말한 단어가 밥이라니 참으로 모나다웠다.
‘…아니, 반대로 대단한 건가?’
강현은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