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저기 있었구나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서 촬영장 안으로 들어가니 곰 같은 사내가 강현을 맞이했다.
“오, 강현 씨! 오랜만이야!”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 자연에서 살다가 뛰쳐나온 느낌이었다.
바로 김윤하 피디였다.
강현의 팔을 두드린 김윤하 피디의 눈이 커졌다.
“몸이 단단해졌네? 운동하나 봐?”
“예. 잘 지내셨어요?”
강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체격뿐만 아니라 인상도 달라진 느낌이었다.
“나야 덕분에 잘 지내지. 강현 씨 아니었으면 고생 좀 했을 거야.”
김윤하의 태도는 살가웠다. 전에 강현과 같이 촬영했을 때도 나쁜 인상은 없었다.
그때, 멀리서 익숙한 얼굴 몇몇이 눈인사를 보냈다.
그를 알아챈 김윤하가 슬쩍 뒤로 물러났다.
“바쁜 사람을 너무 붙잡고 있었네. 스태프한테 설명은 들었지?”
“예. 오면서 들었어요.”
그리고 오기 전에도 전화로 몇 번이나 통화했다.
김윤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뒤풀이는 못 나온다고 했으니 다음에 따로 자리를 마련할게.”
“예. 알겠습니다.”
“그럼 잘해 보자고.”
그리 말한 김윤하가 어디론가 급히 걸어갔다.
특집인 만큼 사람들이 많아서 정신없어 보였다.
그리고 강현 역시 김윤하를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나올 거면 미리 연락하지.”
강현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 인사를 건넸다. 그들과 인사를 주고받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부딪혔다.
쿵.
강현이 의아해하며 돌아보자 인상을 찌푸린 김종석이 있었다.
“…이젠 선배도 보이지 않나 봐?”
“아, 죄송해요. 못 봤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담담한 인사말에 김종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김종석은 강현을 노려보다가 자리를 떠나갔다.
고개를 갸웃하는 강현.
“뭐한 놈이 성낸다고. 자기가 와서 박아 놓고 화를 내네요.”
“세나 씨.”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강현의 시선이 돌아갔다. 세나의 옆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소현이 있었다.
“셰프님! 오랜만이에요!”
“예. 소현 씨도 오랜만이네요.”
“편하게 부르셔도 되는데.”
소현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러나 강현은 미소 지을 뿐이었다.
떠나간 김종석을 노려보던 세나가 고개를 돌렸다.
“강현 씨, 괜찮으세요? 일부러 부딪힌 거 같은데.”
“아….”
그렇구나. 강현은 세나의 말을 듣고 나서야 방금 있었던 일이 이해되었다.
강현이 둔감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시비로 판단하기에는 너무 약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실수인 줄 알았다.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최근 란돌프와 노아에게 훈련받다 보니 웬만한 충격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설기는 또 어떠한가.
같이 어울리면 자연스레 튼튼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세나 옆에 있던 소현의 눈이 반짝였다.
“셰프님, 셰프님. 큰 옷만 입고 있어서 몰랐는데 몸이 엄청 좋네요? 만져 봐도 돼요?”
흑심이 아니라 어린 나이 특유의 호기심이었다.
강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쳇. 하고 혀를 차는 소현.
“소현아, 실례야.”
“앗…. 죄송해요.”
세나의 부름에 소현이 슬그머니 눈치를 봤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세나가 강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조심하세요. 지난번에 기사도 저 사람이 흘린 것 같아요.”
세나의 말에 강현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었다. 윤섭의 말대로 복수하러 온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확신을 얻고자 온 것이었다.
김종석이란 존재는 이제 강현의 삶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었다.
강현은 대신 잊고 있던 걸 떠올렸다.
“아, 맞다. 이거 받으세요.”
종이 가방을 건넸다.
“우와! 이게, 뭐예요?”
세나가 입을 열기도 전에 소현이 먼저 흥미를 보였다.
강현은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목에 좋은 과일이나 열매에요. 국내에선 구할 수 없는 거니 잘 챙겨 드세요.”
국내뿐만 아니라 지구상에서.
강현의 말에 세나의 눈이 커졌다. 안을 열어 보니 처음 보는 과일과 열매가 보였다.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세나가 싱긋 웃었다. 출처를 의심하진 않았다.
강현이 해외 출신이고 요리사기 때문에 일반인이 모르는 식자재를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저는요? 제 선물은요?”
소현의 말에 강현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소현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떠올랐다.
사실 소현이 나온다는 것도 얼마 전에 알았다. 선물을 준비할 리가 없었다.
그런 강현을 구해 준 건 세나였다.
세나가 소현의 팔을 잡고 끌었다.
“넌 이따가 언니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진짜요?”
다시 환하게 웃는 소현. 세나는 강현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소현을 끌고 갔다.
때마침 들려온 스태프의 목소리.
“이제 슬슬 자리로 모여 주세요!”
MC는 MC끼리, 패널은 패널끼리.
참가자인 강현 역시 셰프들이 모인 곳으로 향했다.
그 도중에 한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새하얀 개량 한복.
꾹 다문 입에서 단호함이 느껴졌다. 강현도 안면이 있는 노인.
황대길.
한식의 거장이었다.
강현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황대길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그렇게 셰프들이 모인 곳으로 간 강현.
셰프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어울리는 건 아니었다.
양식은 양식 셰프끼리. 그리고 한식은 한식 셰프끼리.
서로가 활동하는 영역이 다르기에 친분이 있는 이들끼리 모일 수밖에 없었다.
원래라면 강현 역시 양식 셰프들과 함께 앉아야 했지만, 꺼리는 기색이 느껴졌다.
김종석처럼 직접적으로 비방하진 않았어도 강현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이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강현에게 감정이 없는 이들조차 강현의 상황을 외면했기에 껄끄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벌써 피곤해지네.’
시골에서는 느끼지 못한 답답함이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차라리 자리를 지정해 줬으면 나았을까? 방송국에서는 편한 이들끼리 앉으라고 배려해 준 것이었다.
강현은 적당한 빈자리를 찾았다.
“강현 씨, 이쪽이요.”
그때, 누군가가 손을 흔들었다.
전에 강현과 같이 방송했던 중식 셰프였다.
강현은 인사를 건네고 셰프의 옆에 앉았다.
“고생이 많네요.”
힐끗, 양식 쪽을 바라보며 말하는 셰프. 강현은 어색한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촬영이 시작되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의 셰프 메인 MC 최성현입니다.”
“세나입니다.”
“오늘은 추석을 맞이해서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는데요. 이야, 오늘 나온 셰프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정말 대단하네요. 안 그런가요, 세나 씨?”
“네. 이런 대단하신 분들이 팀을 나눠서 요리 경합을 벌일 걸 생각하니 정말 기대가 되네요.”
그와 함께 커다란 화면에 경기 규칙이 떠올랐다.
총 열여섯 명의 셰프.
최종적으로 이긴 팀에게는 푸짐한 선물이, 그리고 팀 상관없이 최고의 요리를 만들어 낸 셰프에게는 이천만 원의 상금이 주어진다.
전문 평가위원 다섯에 연예인 평가단 열의 점수를 합산해서 정해진다.
한 사람당 반 인분씩이었으나 정해진 시간 내에 홀로 칠 인분 이상을 해야 하기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들었던 이야기라 다들 표정이 담담했다.
“자 그럼, 먼저 팀 추첨부터 하겠습니다. 한 명씩 나와서 추첨해 주세요.”
셰프들이 하나둘 나가서 공을 뽑았다.
강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파란색이네.’
청팀.
담담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셰프가 조용히 속삭였다.
“다행히 같은 팀이네요. 같이 힘내요.”
“예. 잘 부탁드려요.”
강현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을 보니 김종석은 반대인 홍팀이었다.
이윽고, 팀 선정이 모두 끝났다.
“이제 팀별로 모여서 대전 순서를 정해 주시면 됩니다!”
MC의 외침에 셰프들이 움직였다.
복장도 팀 색에 맞춰서 갈아입었다. 기본 하얀 조리복에 앞치마와 모자만 색이 달랐다.
그렇게 모인 셰프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순서는 중요했다.
한 사람당 반인 분씩.
모두 먹을 필요가 없다고 해도 뒤로 갈수록 배가 부를 거다.
게다가 상대도 중요했다.
친한 셰프가 걸려도 껄끄럽긴 마찬가지지만, 서로 다른 분야라면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한 셰프가 조용히 있는 강현을 향해 물었다.
“강현 씨는 어디가 좋아?”
“전 상관없습니다.”
그런 강현의 말에 팀에 있던 양식 셰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정해진 자리는 일곱 번째.
사실상 마지막은 가장 경력이 높은 셰프가 나설 수밖에 없으니 뒤편으로 밀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곧 양쪽의 대전 순서가 화면에 떠올랐다.
탄성을 뱉는 셰프들과 안도하는 셰프.
곧 화면을 확인한 셰프가 강현을 향해 말을 걸었다.
“상황이 묘하게 되었네.”
강현의 옆에 앉아 있었던 중식 셰프였다. 그의 말에 강현의 시선이 화면으로 향했다.
[김종석 VS 이강현]
다른 셰프들도 힐끗힐끗 강현과 김종석을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둘 사이에 있던 일을 알기 때문이었다.
강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는 관심을 받겠어.’
그러나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어서 바로 셰프들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흥미롭게 바라보던 방청객들과 연예인들도 시간이 지나자 점점 지루함을 드러냈다.
어쩔 수 없었다.
제한 시간 30분.
그러나 두 팀만 해도 1시간이었다.
그러한 대결이 여덟 번이나 이어지는 것이었다.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다고 해도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방청객과 연예인들의 사정이었다.
셰프들은 진지한 눈으로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연히 강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단하네.’
배울 게 많았다. 거품이 낀 이들도 있다지만, 이 자리에 있는 셰프들 대부분이 일류였다.
게다가 분야도 제각각.
그들의 요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가 되었다.
‘너무 멀리 떨어진 게 아쉬워.’
화면으로도 볼 수 있다지만, 주방의 공기를 느낄 순 없었다.
강현은 아쉬움을 달래며 화면에 집중했다.
그렇게 여섯 번째 대결이 끝났을 때, 스태프가 외쳤다.
“십 분 쉬고 가겠습니다!”
대결은 삼 대 삼. 접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셰프들이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그들 역시 계속되는 촬영에 지친 것이었다.
그러나 강현은 주머니에서 수첩과 펜을 꺼냈다.
첫 번째 대결이 끝나고 쉴 때 스태프에게 빌린 것.
그리고 방금 보았던 것 중에 쓸만한 것들을 수첩에 적었다.
그런 강현을 본 셰프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들 요리에 열정적이었지만, 강현은 무언가 달랐다.
그리고 강현을 보는 셰프들의 표정도 전과 달리 부드러워져 있었다.
나이와 경력을 떠나서 요리를 대하는 강현의 태도는 존중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휴식 시간이 끝나고 다시 촬영이 시작되었다.
“그럼 일곱 번째 대결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청팀의 셰프를 모셔 보겠습니다. 이분은 정말 오랜만에 나오셨네요.”
“예. 훈훈한 외모와 뛰어난 실력으로 한때 화제를 모았던 셰프님이죠.”
“이강현 셰프님!”
관객들의 환호를 받으며 강현이 대결장으로 나섰다.
그 뒤로 MC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홍팀의 셰프를 모실 차례네요. 참으로 공교롭다는 말밖에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 친한 선후배였으나 이제는 서로 적이네요.”
“두 분에게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저희에게는 즐거운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종석 셰프님을 모시겠습니다!”
MC의 호명에 김종석도 앞으로 나왔다. MC는 먼저 김종석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이강현 셰프님과 대결하게 되었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아끼는 후배와 겨루게 돼서 안타깝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끼는 후배. 그 말에 MC를 맡고 있던 세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워낙 찰나라 금세 지나갔다.
“그럼 이강현 셰프님의 각오를 듣겠습니다. 김종석 셰프님과의 대결 어떠신가요?”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강현은 담백하게 말을 뱉었다. 김종석에 대한 언급조차 없었다.
이번에는 김종석의 얼굴이 구겨졌다.
“자, 둘의 열기가 뜨겁네요. 그럼 서로 각자의 자리로 가 주시길 바랍니다!”
MC의 말에 강현이 청팀 조리대 위에 섰다.
조리대 위에는 강현이 미리 요구한 조리도구가 전부 놓여 있었다.
‘…긴장이 되긴 하네.’
희미하게 떨리는 손을 본 강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떨쳐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심사위원과 관중들.
떨리지 않기란 쉽지 않았다.
그때, 무언가가 강현의 발밑으로 굴러왔다.
데구루루.
방울토마토.
“죄송합니다.”
스태프가 황급히 다가와서 방울토마토를 회수했다. 그러나 강현은 방울토마토에 남아 있던 이빨 자국을 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채소가 쌓여있는 곳에 무언가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토리.
강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굳었다.
빵빵하게 부푼 볼. 볼록 튀어나온 배까지.
슬그머니 셀러리 뒤로 몸을 감추는 토리. 그러나 강현의 시선을 피할 순 없었다.
‘…보이지 않더니 저기 있었구나.’
힘을 아끼기 위해 모습을 숨긴 줄 알았다.
강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손의 떨림도 멈춘 상태.
‘그래, 내 할 일만 하면 돼.’
이어서 MC가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