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뒤풀이나 하죠
강현은 슬그머니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람 중에는 강현조차 얼굴을 알 정도로 유명인도 제법 있었다.
“예술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분들이네요.”
세나가 옆에서 작게 속삭였다.
“이런 이들이 오는데 기사 하나 안 난 게 대단하네요.”
강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공연권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일부러 소문을 내지 않을 만한 이들에게 줬을 거다.
이정환과 친분이 있는 이들.
여기 모인 이들은 이정환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곧 관중들이 숨을 죽였다.
무대에 이정환이 걸어오기 때문이었다.
검은색 연미복.
위풍당당하게 걸어오는 그의 모습은 대기실에서 봤던 노인이 아니었다.
무대 중앙에 도착한 그는 관중들에게 인사를 한 뒤 피아노 앞에 앉았다.
짧은 심호흡.
그와 함께 이정환의 손이 건반 위에 올라갔다.
띵―
맑은 음이 공연장에 울렸다.
그리고 그걸 시작으로 이정환의 두 손이 건반 위를 춤추기 시작했다.
쇼팽, 피아노 소나타 3번.
클래식을 모르는 강현도 순식간에 빨려들어 갔다.
무려 한 시간 반의 공연.
이정환이 모든 걸 쏟아 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관중들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누구 하나 쉽사리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스태프가 나와서 공연이 끝났음을 알린 뒤에나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대단하네요.”
“예.”
세나의 감탄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손목 때문에 기량이 떨어진 상태라면 전에는 얼마나 대단했던 걸까.
강현은 놀란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잘 설명하진 못하겠지만, 몸이 달아올랐다.
‘나도 저런 음악과 같은 요리를 만들어 내고 싶다.’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는.
손끝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조용히 충동을 억눌렀다.
지금은 감정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보다 이 여운을 조금이라도 더 기억하고 싶었다.
관중을 따라서 밖에 나오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그 중심에는 이정환이 있었다.
“저 상태면 말도 걸지 못하겠구먼.”
정기훈 작가였다. 정기훈 작가가 강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우리는 먼저 가세.”
“먼저 가다니요?”
그래도 인사는 드려야 하는 게 아닌가? 강현의 의아해하자 정기훈 작가가 눈을 크게 떴다.
“음?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뒤풀이를 자네 가게에서 하기로 했어.”
처음 듣는다. 강현의 표정을 본 정기훈 작가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정신이 없어 말하지 못했나 보군. 물론 스태프 전부가 오는 건 아닐세. 그들은 따로 먹고, 정환 그 친구만 오는 것이야. 곤란하다면 말해 주게.”
세나를 힐끗거리며 말하는 정기훈 작가. 강현은 이정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끝나고 이야기하자는 게 이거였구나.’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전 상관없습니다. 세나 씨도 오신 김에 식사나 하고 가세요.”
어차피 설기가 걱정되어서 일찍 들어갈 생각이었다.
강현의 말에 세나는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공연만 보고 떠나기는 아쉬웠다. 하물며 이정환도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일행들은 공연장을 나섰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왔을 때와 달리 정기훈 작가도 함께 있는 걸 보더니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다.
“아이쿠, 덕분에 좋은 걸 들었네. 음악은 잘 모르겠는데 대단한 연주라는 건 알겠어.”
이장의 말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호강했네, 호강.”
“우리 같은 이들도 챙겨 줘서 고마워.”
“작가 양반이라서 그런지 그림만 잘 그리는 게 아니라 인맥도 넓구먼.”
그러한 이장의 말에 강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나 누구의 공연인지도 모르고 온 것이었다.
정기훈 작가를 대하는 태도가 친근했다. 마을로 이사 오고 나서 친해진 것이었다.
그리고는 강현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그럼 우린 먼저 들어갈 테니 그짝도 좋은 시간 보내.”
“아주 색시가 참해.”
다른 이들도 강현과 세나를 번갈아 보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던졌다.
최근에도 들었던 말.
그렇게 마을 사람들이 떠나가자 강현이 세나를 향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동네 분들인가 보죠? 보기 좋네요.”
강현을 배려한 게 아니라 정말로 그리 생각하는지 웃고 있었다.
“그럼 우리도 가세. 저 친구는 한참 있어야 끝날 거야.”
정기훈 작가의 말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셋은 각자의 차에 탔다.
* * *
매장에 도착한 강현은 세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전 잠깐 집에 올라갔다 올게요.”
“예, 괜찮아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세나. 강현은 서둘러서 집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흩날리는 솜 뭉텅이에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보면 눈이라도 온 줄 알 것이었다.
‘그렇게 얌전히 있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장난감까지 사 줬다. 그러나 장난감은 이미 형태조차 알아볼 수 없게 변했다.
찢어진 이불 옆에서 딴짓하는 설기. 강현의 눈길을 받자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끼잉, 낑.”
“…네가 아니면 누가 이런 짓을 해.”
창문 쪽을 바라보는 설기. 어느샌가 창문이 열려 있었다. 창문에서 넘어왔다고 피력하는 것일까?
그러나 설기가 있는데 새나 고양이가 들어올 리가 없었다.
‘오히려 반대지.’
설기라면 창문을 열고 새나 고양이를 사냥할 거다.
강현은 설기를 노려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이 문제는 이따 해결하고 일단 내려가자. 밥해 줄게.”
밥이란 말에 귀가 쫑긋 선 설기. 해맑게 꼬리를 흔들었다.
그 모습에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로 미워할 수 없는 설기였다.
매장으로 내려오자 밖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통화를 하는 세나가 보였다.
고개를 갸웃한 강현은 오븐과 기름의 불을 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나가 매장 문을 열었다.
딸랑딸랑.
“죄송해요. 잠깐 확인할게….”
안으로 들어오던 세나가 설기를 발견하고 숨을 삼켰다.
설마 강아지를 무서워하는 건가?
걱정이 올라왔지만, 반대였다.
“…어머나, 귀여워라!”
짧은 감탄. 설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상태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 키우는 거예요? 잠깐 만져 봐도 돼요?”
강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상관없는데 쉽진 않을 거예요.”
강현의 말에 고개를 갸웃한 세나. 곧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세나가 만지려고 하자 폴짝 테이블 위로 뛰어오른 설기.
이후에도 쏙쏙 세나의 손을 피해 다녔다.
울상을 지은 세나가 손을 내리자 도도한 걸음으로 엎드리는 설기.
강현이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그러자 자신의 실태를 깨달았는지 세나가 헛기침했다.
“아, 이럴 게 아니었네요.”
그리고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치는 세나.
곧 진지한 눈빛으로 강현을 바라보았다.
“최근에 방송 관련해서 연락받은 거 없으시죠?”
“예.”
고개를 끄덕이는 강현. 그러자 역시, 하고 세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공연 전에 이야기했던 내용과 관계가 있는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시죠?”
세나는 대답 대신 핸드폰으로 기사 하나를 보여 줬다.
[이강현 셰프. 오늘의 셰프 추석 특집에 출연 확정.]
기사를 읽은 강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아래로 내려보니 관련 기사가 두세 개 더 올라와 있었다.
기사를 확인하자마자 울리는 핸드폰.
강현은 익숙한 이름에 전화를 받았다.
[야, 너 방송 나가?]
핸드폰 너머까지 들리는 목소리에 세나가 작게 입을 벌렸다.
“윤섭이 오빠예요?”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럼 저 기사는 뭐야?]
“그러게?”
강현이라고 알 리가 없었다.
담담한 강현의 대꾸에 핸드폰 너머에서 한숨이 들려왔다.
[넌 네 일인데 그렇게 태평해? 네가 한 게 아니라면 누군가 널 저격한 거 아니야?]
강현의 손목 부상은 이 바닥의 사람이라면 이제 누구나가 알 정도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니 사정을 안다면 섭외할 리도 없었다. 역시나 연예계에 일하는 만큼 눈치도 빨랐다.
하지만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따 이야기하자. 나 세나 씨랑 있어.”
[아! 오늘이구나. 그럼 세나가 더 잘 알겠네. 알았어.]
탄성을 뱉은 윤섭이 전화를 끊었다.
세나는 오늘의 셰프의 MC 중 하나였다. 내부 정보도 잘 알고 있을 거다.
통화를 끝낸 강현의 시선이 세나에게 향했다.
세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피디님한테 확인하니 방송국에서 낸 기사는 아니래요. 아직 기획 단계이고 섭외도 확정되지 않았다고….”
심지어 강현은 섭외 후보에도 오르지 않았다.
“아직 김윤하 피디님이 하시죠?”
전에 강현이 같이 방송했던 피디였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상태.
“네. 곧 방송국에서 정정 기사를 낼 거라고 하네요.”
그리 말한 세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누가 이런 기사를 흘렸는지 짐작이 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이었다.
그때, 매장 문이 열리면서 정기훈 작가가 들어왔다.
딸랑딸랑.
“늦어서 미안하군. 음? 무슨 일 있었나?”
심각한 분위기에 정기훈 작가가 눈살을 찌푸렸다.
머뭇거리는 둘.
곧 한숨을 내쉰 강현이 사정을 설명했다.
강현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정기훈 작가가 분개했다.
“악의적이군!”
정기훈 작가도 강현에 관해서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냥 무시해 버리게! 하여튼, 예나 지금이나 기자란 작자들이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그게 그리 쉬운 이야기는 아닐세.”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이정환이었다.
“밖에까지 들려서 엿들을 수밖에 없었어. 사과하네.”
정기훈 작가는 그제야 문을 닫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민망해하는 정기훈 작가를 대신해서 강현이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그보다 공연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세나 역시 고개를 숙였다. 손을 내저어서 인사를 받는 이정환.
그런 이정환을 향해 정기훈 작가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 쉬운 이야기가 아니라니, 무슨 뜻인가?”
“무시하더라도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안 그런가?”
이정환의 시선을 받은 세나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기훈 작가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딴 게 뭐가 대수라고.”
“그거야 자네나 그런 거지.”
이정환이 고개를 흔들었다.
“방송국에서 일찍 대처했으면 한낱 해프닝으로 끝났을 문제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어.”
주말인 탓이 컸다. 이미 기사가 다 퍼진 상태.
물론, 강현이 인기 연예인만큼이나 파급력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이렇게 메인에 기사가 실리는 것도 의아할 정도였다.
오히려 이정환의 공연에 관한 게 실렸으면 이해가 됐을 거다.
그러나 그 때문에 요리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은 다 보았을 거다.
이정환의 말에 세나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세나 역시 출연자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책임처럼 느껴졌다.
그때, 강현이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괜찮다니?”
일행들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그러한 시선에 강현이 미소 지었다.
“방송 한번 나가 보죠.”
강현의 대답에 일행들의 눈이 커졌다.
정기훈 작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정말로 괜찮겠는가?”
“예. 하지도 않은 일로 이야기를 듣는 것보단, 뭐라도 해 보는 게 낫죠.”
그리고 이제는 그런 것에 흔들릴 정도로 어리지 않았다.
“하긴, 이제 자네의 손목도 다 나았다고 했지?”
사실 미각 문제도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모르는 일이었다.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나가 놀란 눈으로 강현을 돌아보았다.
정기훈 작가 역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군. 그럼 아무 문제 없겠어. 가서 제대로 보여 주면 되겠군. 다른 이들이 딴말 못 하게 말이야.”
강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세나를 봤다.
“피디님께도 피디님만 괜찮으시면 나가고 싶다고 해 주세요.”
강현의 말에 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가 나온 만큼 강현이 나온다면 피디도 좋아할 거다.
“그럼 뒤풀이나 하죠. 주인공은 따로 있는데 너무 제 이야기만 했네요.”
담담한 강현의 말에 일행들도 미소 지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설기가 밥은 언제 주냐는 눈빛으로 강현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