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이따 이야기해요
김종석은 촬영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이 자리를 벗어났다.
그날 이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셰프들조차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를 모를 김종석이 아니었다.
“젠장.”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유는 알고 있었다.
이강현.
언제나 그랬다. 자신이 무엇을 하던 늘 그 이름이 따라왔다.
그건 이강현이 레스토랑을 그만둬도 마찬가지였다.
김종석이 성과를 내도 사람들은 이강현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자신은 이강현이란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 김종석을 향해 한 사람이 다가왔다.
“형, 괜찮아요?”
평소 친하던 후배였다. 후배는 김종석의 옆에 앉았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시간이 지나면 다시 괜찮아질 거예요.”
“….”
“세나 씨는 왜 괜히 나서서.”
세나란 이름에 김종석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아차 싶은 후배가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그 소문 진짜래요.”
“…소문?”
“예. 강현이 형, 아니, 강현 셰프요.”
다시 나온 이름에 김종석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무슨 소문인데?”
“손목뿐만 아니라 미각도 문제가 생겼다는 거요.”
후배의 말에 김종석의 표정이 변했다. 그도 들어 본 적 있는 소리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헛소리로 치부했다.
“…확실해?”
“예. 강현 셰프 밑에서 막내로 일했던 애 있죠? 걔가 한 말이에요.”
누군지 모른다. 아무리 김종석이라고 해도 자신의 매장이 아니라 다른 매장 막내까지 기억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직접 일하던 막내에게 들은 말이라면 신빙성은 충분했다.
“…그렇단 말이지?”
김종석이 턱을 괴었다.
미각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 요리사로서 사형 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그 녀석이 고작 손목 때문에 떠난 게 이상했어.’
강현이 요리에 얼마나 열성적이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한 인터뷰도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김종석이었다.
“잘됐네.”
김종석의 말에 후배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잘됐단 말인가.
곧 김종석의 시선이 후배에게 향했다.
날카로운 눈빛에 후배가 움찔거렸다.
“너도 추석 기획서 봤지?”
“아, 요리 대회요?”
“그래. 거기 걔를 부르자.”
김종석의 말에 후배가 숨을 삼켰다. 후배는 꺼림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손목뿐만 아니라 미각도 안 좋은데요?”
모른다면 모를까, 알면서 부르기는 꺼려졌다.
그것이 요리사로서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김종석의 눈이 번뜩였다.
“무슨 상관이야. 너도 그 녀석 마음에 안 든다며?”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잘난 게 아니꼽긴 했지만, 자신에게 피해를 주진 않았다.
머뭇거리던 후배는 김종석의 눈빛에 굳었다.
번들거리는 눈동자.
“야, 너 여기 꽂아 준 거 누구야?”
“…형이죠.”
사실 김종석이 꽂아 준 게 아니었다. 김종석이 무슨 힘이 있어서 꽂아 주겠는가.
우연히 아는 후배가 들어왔고, 자신이 소개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강현이 피디에게 자신을 소개해 준 것처럼.
자신 역시 그만한 힘이 있다고 주변에 알리고 다닌 것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후배는 김종석에게 고마워하고 있었다.
“걔를 욕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혼자 착한 척하게?”
김종석의 말에 후배가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기도 했지만, 여기서 아니라고 했다가는 뒤가 두렵기 때문이었다.
후배 역시 강현을 욕할 때 함께 있었다.
“…그런데 강현 셰프가 올까요?”
연락을 받는다고 해도 거절할 게 뻔했다.
“올 수밖에 없게 해야지. 너도 아는 기자 있지?”
김종석의 말에 후배의 눈이 커졌다.
김종석이 하려는 짓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기자들에게 추석 이벤트 때 강현이 나올 거라고 흘린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방송국에서도 움직일 수밖에 없다.
‘…피디님이 아직 비밀이라고 했는데.’
덜컥 겁이 났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후배를 본 김종석은 시선을 돌렸다.
‘안 와도 상관없어.’
기사가 났는데도 오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 역시 강현의 실력을 의심할 거다.
무언가 문제가 있기에 오지 못했다고.
오든, 안 오든 김종석의 목적은 달성된다.
‘이제야말로 녀석의 그림자를 지우는 거야.’
김종석이 조용히 각오를 되새겼다.
* * *
매장에 내려온 강현은 제 몸을 두드렸다.
‘역시 무리했어.’
이세계에 다녀온 지 이틀이 지났지만, 근육통이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최근에 운동을 쉬지 않았음에도 이 정도니, 그날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에밀리야가 좀 안쓰럽긴 했지만.’
강현이 거절했을 때, 실망한 표정은 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강현의 체력은 이미 한계였다.
“…운동선수도 아니고 말이야. 그렇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하품하던 설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설기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후 강현은 주방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여러 요리를 만들어서 조금씩 먹어 보았다.
남은 양은 설기의 몫이었다.
“…역시.”
감았던 눈을 뜬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너무 피곤한 탓에 제대로 느낄 수 없었으나 오늘로써 확실해졌다.
“전보다 혀가 예민해졌어.”
그동안 맛을 느끼려고 끊임없이 시도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세계와 연관이 있는 건가.
강현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나쁜 일은 아니니.”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기뻐해야 했다.
그렇게 먹은 접시들을 정리하고 있으니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본 강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야?”
[첫인사가 그거냐? 적어도 안부 정도는 먼저 물어야 하는 거 아니야?]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밝은 목소리에 강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곧 영업시간이야. 끊는다.”
[잠깐!]
강현의 말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용무는 너한테 있지. 네가 물어봤던 거 대답해 주려고.]
“아.”
뒤늦게 강현이 탄성을 뱉었다. 전에 통화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미안.”
짧은 사과에 핸드폰 너머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괜찮아. 네가 한두 번 이러는 것도 아니고.]
윤섭의 대꾸에 강현이 입을 닫았다. 평소의 윤섭의 태도를 생각하면 할 말이 많았지만, 이번은 강현의 잘못이 맞았다.
“그래서 올 수 있어?”
벌써 이주 뒤로 다가온 이정환의 리사이틀.
[아니.]
강현이 묻자마자 바로 대답하는 윤섭. 강현의 눈썹이 올라갔다.
이럴 거면 문자로 해도 되지 않나?
“…알았어. 끊을게.”
결국, 공연은 혼자서 가야 할 것 같았다.
강현은 미련 없이 핸드폰을 귀에서 뗐다. 애초부터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윤섭도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지금의 강현보다 더 바쁠 거다.
[잠깐! 잠깐만!]
다급한 윤섭의 목소리에 강현이 멈췄다.
[뭐가 이리 급해. 난 못가지만 대타가 갈 거야.]
“대타? 누군데?”
[누군지는 비밀이고, 너도 반가워할 거야.]
그게 무슨 말인가. 강현이 눈살을 찌푸리자 핸드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럼 난 다시 일하러 가 볼게! 좋은 시간 보내!]
뚝.
전화가 끊어졌다. 강현은 핸드폰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좋은 시간 보내라니.
일반적인 인사말은 아니었다.
‘나도 반가워할 거라고?’
이런 상황에서 강현이 싫어할 만한 이를 보내진 않았을 거다.
고민하던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었다.
그리고 이주 뒤.
강현은 반가운 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 * *
“오랜만이네요, 강현 씨.”
“예. 잘 지내셨어요?”
“네. 덕분에요. 강현 씨는?”
“저도 잘 지냈습니다.”
인사가 끝나자 침묵이 내려앉았다. 윤섭이 보낸 대타는 세나였다.
전에 윤섭이 담당했던 가수.
‘이제는 배우인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안부를 묻긴 했으나 반가워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세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불편하진 않으니 된 건가?’
강현은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세나의 성향은 강현과 비슷했다.
서로 필요 없는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셋이 있을 때도 주로 윤섭만 말을 하는 편이었다.
강현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동행 상대였다.
“그럼 타실래요?”
“아, 감사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세나의 차에 올랐다. 차 없는 강현을 위해서 마중을 나온 것이었다.
사실 마을에서도 많이 가기 때문에 얻어 탈 수 있었지만, 윤섭이나 세나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강현이 안전띠를 하자 세나가 입을 열었다.
“공연장이 어디예요?”
“아, 여깁니다.”
강현은 공연권을 세나에게 건넸다. 그러자 세나의 눈이 빛났다.
이리저리 공연권을 살피는 세나.
“이정환 님을 좋아하시나 봐요?”
“예. 장르는 달라도 음악을 하는 이들이라면 존경할 수밖에 없죠. 윤섭 오빠한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믿지 못했는데….”
정말이었구나. 그녀가 짧게 감탄했다.
강현은 그런 그녀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그리고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 역시 유명 셰프의 요리를 먹을 수 있다면 저런 반응일 거다.
강현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녀가 헛기침했다.
“…출발할게요.”
그녀의 말에 강현이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집 안에 있을 설기.
‘잘 있겠지?’
장난감을 던져 주고 왔으니 쉽게 부서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공연장은 마을에서 멀지 않았다.
이정환이 일부러 근처로 잡았기 때문이었다.
“오! 왔구….”
“이 눈치 없는 영감이.”
먼저 와있던 이장이 강현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다가 옆에 있던 박 씨 할머니한테 붙잡혔다.
무언가 오해를 한 게 분명했다.
다른 마을 사람들도 강현 옆에 있는 세나를 보더니 모른 척 자리를 피해 줬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는 탓에 세나를 알아보는 이들이 없었다.
‘안 썼어도 모를 테지만.’
그러나 이 자리에는 마을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한 노인이 강현을 향해 걸어왔다.
“강현, 자네 왔구먼.”
“작가님.”
정기훈 작가였다. 정기훈 작가를 알아본 세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그건 정기훈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이 아가씨는 내가 아는 얼굴 같은데. 아닌가?”
세나가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가수 세나입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에요.”
“나야말로 영광이네. 노래도 잘 듣고 있어.”
서로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둘. 강현은 그녀의 소개가 귀에 밟혔다.
가수.
연극과 방송을 하고 있지만, 그녀의 본업은 가수였다.
강현이 그랬던 것처럼.
그때, 정기훈 작가가 강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정훈이 그 친구한테 가 볼 생각인데, 같이 가겠는가? 자네를 많이 보고 싶어 해.”
“아, 저는….”
공연 전에는 찾아가는 게 아니었다. 연주자의 집중을 깨트리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정기훈 작가가 그만큼 이정환과 친하기에 가능한 일.
사양하려던 강현은 옆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기훈 작가를 뒤따르던 세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강현 씨 인맥이 넓었네요.”
요리만 좋아하는 줄 알았다. 정기훈 작가뿐만 아니라 이정훈과도 친분이 있어 보였다. 그러한 그녀의 말에 강현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운이 좋아서요.”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을 말한 것이었으나 세나는 강현이 겸손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기실에 도착했을 때,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누군가! 내 은인이 아닌가!”
이정환이 두 팔을 벌려 강현을 안은 것이었다.
세나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랗게 변했다.
“자네 덕분에 무사히 준비할 수 있었네. 음, 이 아가씨는?”
강현의 어깨를 두드리던 이정환이 세나를 보았다.
이미 모자를 벗고 있던 세나였기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세나입니다. 선생님.”
“역시 그 친구구먼. 선생님은 무슨. 편하게 할아버지라 부르게.”
그때, 뒤에 있던 스태프 하나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선생님….”
“이런, 벌써 시간인가 보군. 이야기는 끝나고 마저 하세.”
일행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기실을 나왔다.
복도를 지나서 관객석으로 향했다.
이미 대부분의 자리가 차 있었다. 일행들의 자리는 앞쪽이었다. 자리를 찾는 도중 핸드폰을 확인한 세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강현 씨, 혹시 저희 방송 출연하기로 했나요?”
“예?”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강현의 반응에 세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따 이야기해요.”
이제 곧 공연이 시작될 거다. 세나는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