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 해요. >
강현이 황급히 배낭에서 꺼내는 걸 본 란돌프의 눈이 빛났다.
“과연!”
란돌프와 달리 미간을 찌푸리는 로멘.
잊고 싶은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강현이 꺼낸 건 소주였다. 플라스틱병에 담긴 커다란 소주들.
그 외에도 음료수도 있었다.
란돌프와 로멘과 달리 다른 이들은 생소한 병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의 시선을 받은 강현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국물을 한입 떠먹은 순간 저절로 술이 떠올랐다.
“그래, 이런 자리에 술이 빠져서는 안 되지!”
란돌프의 말에 다른 이들도 강현이 가져오는 병들의 정체를 알아챘다.
“술을 못하시는 분들은 여기 음료수를 마시면 돼요.”
사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음료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하만조차 술을 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강현은 차례대로 술잔을 돌렸다.
“잔이 너무 작군. 난 여기에 부탁하네.”
란돌프가 물잔을 들어 올렸다.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잔에 술을 부었다.
그 모습을 본 노아 역시 단번에 물 잔을 비웠다.
다른 이들은 일반 소주잔에 받았다.
“전 조금만 받을게요.”
에밀리야였다. 고개를 끄덕이고 반 잔 정도만 따랐다.
“저희 쪽에서는 마시기 전에 한 번씩 이렇게 잔을 부딪쳐요.”
“알고 있네. 지난번에 배웠지.”
란돌프가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강현이 란돌프의 잔에 술잔을 부딪쳤다.
그걸 시작으로 다른 이들도 하나둘 술잔을 들었다.
서로 눈이 마주쳐서 어색하게 눈인사를 보내며 잔을 부딪쳤다.
그리고 입으로 가져가는 일행들.
“크으!”
하만의 털이 쭈뼛 섰다. 에밀리야는 생소한 맛인지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잔을 홀짝였다.
그리고 로멘은 조심스러운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폭탄주의 기억이 너무 강렬했던 것 같았다.
술을 마시고 자연스레 음식을 먹는 이들.
“이번에는 내가 따라주겠네.”
란돌프였다.
그는 일행들을 향해 술을 따라주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좋군! 이렇게 다른 종족들과 술을 마실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다 강현, 자네의 덕분이야.”
란돌프의 말에 강현이 머쓱 해했지만, 다른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멘이 입을 열었다.
“서로를 보며 술잔을 부딪치는 것도 마음에 들어. 저기, 난쟁이들도 이런 문화가 있다고 들었네. 상대를 존중하는 느낌이야.”
“정말로요!”
하만의 맞장구에 껄껄, 웃는 로멘과 달리 에밀리야와 노아는 아직 어색해 보였다.
밥과 찌개를 말아서 먹던 설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기는 술을 싫어하기 때문에 일행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곧 관심을 끄고 다시 식사에 열중하는 설기.
“전 이 밥이란 게 마음에 드네요. 벼의 열매죠? 제가 먹어본 것과는 다르네요.”
에밀리야가 쌀밥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벼는 있지만, 강현이 가져온 것과 품종이 다른 것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찌개가 바닥을 드러냈다.
‘많이 끓였다고 생각했는데.’
강현은 놀란 눈으로 냄비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10인분은 되었을 거다. 그러나 설기와 란돌프뿐만 아니라 노아와 하만도 대식가였다.
“술이 남았군. 새라도 잡아 와야 하나?”
란돌프가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셨다. 란돌프의 말에 움찔 몸을 떠는 정령.
에밀리야 곁을 떠나지는 못하고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때, 에밀리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먹으려고 가져온 과일들이 있어요.”
“직접 키운 것인가?”
로멘의 눈이 반짝였다. 로멘의 물음에 에밀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정의 과일이라니. 귀한 걸 얻어먹는군.”
다른 이들도 기대되는지 에밀리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가져올게요.”
그렇게 자리를 뜨는 에밀리야. 에밀리야가 사라지자 강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요정이 키운 과일은 뭔가 다른가요?”
“다르지.”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가 그러한 질문을 했다면 이상하게 봤겠지만, 강현이라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요정들은 숲의 연금술사라고도 불린다네.”
“같은 종자를 가지고서도 다양한 맛을 내는 열매를 키울 수 있지.”
로멘과 란돌프의 말에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다른 이들을 돌아보았으나 다들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어리둥절하던 강현은 곧 로멘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이랑 정령도 있는데.’
심지어 설기는 신의 피를 이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더한 게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이 키운 과일에는 신비로운 능력이 생겨나기도 하지.”
노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맛뿐만이 아니다.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그들이 뛰어난 전사가 될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물론, 그런 게 진짜 고기와 비교할 순 없지만.”
노아의 말에 란돌프가 말을 보탰다.
‘...과일이나 열매로 다른 영양소를 만든다는 건가?’
가짜 고기. 아니, 일종의 영양제.
“그렇군. 그녀라면 자네가 원하던 걸 키워낼 수 있을 거야.”
로멘이 강현을 보며 말했다. 강현이 원하던 것.
그 의미를 떠올린 강현이 탄성을 뱉었다.
다른 나라에서 수입해온다는 향신료였다. 이 지역 풍토와 맞지 않아서 구하기 힘들다고 들었다.
“...그런 것도 가능한 겁니까?”
강현의 물음에 로멘이 미소 지었다.
“요정의 힘을 얕보지 말게나. 그들은 전사이기 이전에 모두가 뛰어난 정원사야. 요정들이 키우지 못하는 식물은 그 누가 와도 키울 수 없다네.”
로멘의 말을 듣고 보니 전에 먹었던 과일들이 떠올랐다.
맛이 제각각이었다.
‘...매콤한 맛도 그렇지.’
일상에서 먹기 힘든 과일들. 그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하만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스승님이 원하시는 게 뭐에요?”
“아, 그건···.”
강현이 입을 열려다가 다물었다. 에밀리야가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풀을 엮어서 만든 바구니에 과일과 열매가 한가득 담겨있었다.
색색의 과일들.
일행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탓인가, 신비롭게 느껴졌다.
과일을 바라보던 강현은 뒤늦게 무언가를 눈치챘다.
‘정령이 없네.’
이번에는 따라오지 않은 건가? 그러나 설기에게 당한 걸 생각하면 오지 않았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 강현을 향해 에밀리야가 미소 지었다.
“마음껏 드셔도 돼요. 술과 어울리진 잘 모르겠지만.”
“아, 감사합니다.”
바구니에서 노란 과일을 하나 꺼냈다. 다른 이들도 흥미를 보이며 과일을 꺼냈다.
설기는 과일을 힐끗거리더니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고기가 아니니 흥미가 떨어진 것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채소를 많이 먹었으니.’
김치도 채소였다.
슬금슬금 걸어가는 설기를 보던 강현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정령 괴롭히면 안 돼.”
움찔.
걸어가던 설기의 꼬리가 멈췄다가 움직였다.
역시나 정령을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
“끼잉?”
처량한 눈빛으로 강현을 바라보는 설기. 그 모습에 강현은 정령이 먹고 싶은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놀려는 거네.’
사냥놀이. 그러나 설기에게나 놀이였다. 사냥감이 된 정령은 괴로울 거다.
모나가 없으니 심심한 것이었다.
물어도 다치지 않으니 설기에게는 좋은 놀이 상대였다.
강현이 단호한 눈빛으로 고개를 젓자 설기가 시무룩해졌다.
다시 한쪽 구석에 앉는 설기.
그 사이 일행들은 과일과 열매를 먹으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강현도 슬그머니 과일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상큼한 과육이 입안 가득히 퍼져갔다.
“...!”
혀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강현의 눈썹이 떨려왔다.
딱딱하게 굳은 강현.
“...입맛에 안 맞으세요?”
에밀리야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강현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맛있어요.”
그러나 그런 강현의 대답에 일행들이 의아해했다.
평소의 강현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어딘가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강현은 그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다시 한입. 과일을 베어먹는 강현.
단맛과 희미한 신맛.
바로 과일을 내려놓고 냄비를 향해 뛰어갔다.
이상을 깨달은 란돌프가 나서려고 했으나 로멘이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놔두라는 뜻이었다.
강현은 남은 찌개 국물을 손가락으로 찍어서 입 안에 넣었다.
강현의 얼굴 근육들이 움직였다.
처음은 분노한 것처럼 보였으나, 곧 의심으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확신으로 변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
뒤늦게 터져 나오는 탄성.
조용히 눈을 감는 강현. 뺨에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맛이, 느껴져.’
미각이 완전히 돌아온 것이었다.
음식이란 이렇게도 아름다운 것이었던가!
강현의 몸이 환희로 떨려왔다.
* * *
강현이 진정한 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런 강현을 향해 로멘이 다가왔다.
“이젠 괜찮나?”
“...예, 죄송해요.”
강현이 머쓱하게 대꾸했다. 다른 이들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네. 보아하니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데, 축하할 일이지.”
깨달음?
조금 달랐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에도 깨달음이 있군요.”
하만이 감탄했다. 그러자 노아가 근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모든 일이 마찬가지지. 그만큼 요리를 대하는 강현의 마음이 진지하다는 뜻이다.”
“와.”
강현을 바라보는 하만의 눈빛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렸다.
강현은 그러한 시선에 볼을 긁적였다.
무언가 단단히 오해한 것 같았다.
“축하드려요. 큰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네요.”
에밀리야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녀를 시작으로 다들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강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았다.
‘...여기서 깨달음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강현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민망해질 거다.
로멘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도 이리 맛있는데 깨달음을 얻은 자네의 요리가 어떨지 벌써 기대가 되는군.”
일행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은 그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컹?”
설기까지 다가와서 고개를 갸웃했다.
맛있는 거 해줄 거야? 그리 묻는 것 같았다.
그때, 웃고 있던 란돌프가 손뼉을 쳤다.
“좋아. 먹었으니 소화를 시켜야지. 자네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니 내 몸도 달아오르는군!”
란돌프의 말에 에밀리야는 의아해했지만, 노아의 눈은 날카로워졌다.
그러한 노아를 보며 란돌프가 입을 열었다.
“먼저 가르치겠는가? 난 뒤에도 충분하다네.”
그러나 노아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뒤에 하지.”
노아의 대꾸에 란돌프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잘 보게나. 우리 인간의 검술을. 자, 강현. 검을 들게.”
“예? 예?”
갑작스러운 전개를 따라가지 못한 강현이 되물었지만 이미 란돌프는 겉옷을 벗고 있었다.
성난 근육들이 존재감을 뽐냈다.
란돌프의 시선이 노아와 에밀리야를 향했다가 떨어졌다.
“오늘은 구경꾼들도 있으니 그동안의 성과를 제대로 보여주게나.”
성과라니, 무슨 성과란 말인가.
“하여튼, 기사들이란.”
로멘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옆에 놓인 과일을 입으로 가져갔다.
강현이 울상을 지었다.
자신은 기사도 아니지 않는가.
그러다가 문뜩, 둘의 대화를 떠올렸다.
‘내가 뒤에 하지.’
강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갔다.
‘...설마.’
그리고 늘 그렇지만, 안 좋은 예감은 잘 들어맞았다.
검술 훈련이 끝나자마자 이어지는 체술 훈련.
보는 이가 있기 때문인지, 둘 다 평소보다 열성적이었다.
당연히 훈련이 끝났을 땐, 강현은 녹초가 되었다.
“...역시 수인의 체술인가. 대단하군.”
“그쪽도.”
“아직 못 보여준 게 많아.”
“나도 마찬가지다.”
둘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훈련은 오히려 둘의 호승심만 자극하는 꼴이었다. 이대로 끝내긴 아쉬웠다.
곧 둘의 시선이 쓰러져 있는 강현에게 향했다.
그때, 로멘이 나섰다.
“강현은 그만 괴롭히고 힘이 남아돌면 숲이나 달리고 오게!”
로멘의 호통에 둘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서로를 보더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발을 내디뎠다.
순식간에 사라진 둘. 강현은 감사의 시선을 담아서 로멘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끼잉, 낑.”
설기가 강현의 뺨을 핥았다. 그러자 피로가 조금 가신 느낌이었다.
“저 둘에게 무술을 배우는 건가요?”
에밀리야였다. 에밀리야의 눈빛은 강현에게도 익숙한 눈빛이었다. 에밀리야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강현, 혹시 궁술에···.”
“안 해요.”
에밀리야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이 잘랐다.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에밀리야.
“요정의 궁술은 다른 종족들과···.”
“최고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안 해요. 아니, 못해요.”
강현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단호한 강현의 말투에 에밀리야의 기다란 귀가 쳐졌다.
< 안 해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