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뭐라도 만들어 드릴까요?
강현이 먼저 꺼낸 건 찜이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찜. 설기와 모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가져갔다.
둘의 반응 극명했다. 생소한 맛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나.
몸을 부르르 떨더니 커다란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설기 이미 그릇을 비우고 있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
최근 높아진 설기의 입맛에도 맞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모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손을 뻗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불호가 갈릴 것을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강현은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었다.
“음.”
입안을 감도는 신맛과 단맛. 그 외에 여러 향신료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태국 음식을 먹는 느낌.
모나의 반응이 이해되었다. 태국 음식을 접해보지 않는 이라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었다.
‘신맛은 조금 줄여야겠네.’
나머지는 합격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기가 비리지 않았다.
여러 맛과 잘 어우러졌다.
‘하지만 수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겠어.’
강현의 시선이 모나에게 향했다. 고개를 흔들면서 억지로 먹고 있었다.
바로 설기 때문이었다.
설기가 입맛을 다시면서 모나의 그릇을 바라보고 있었다.
‘...싫으면 넘겨줘도 되는데.’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아이들의 마음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얘는 나중에 제니퍼씨 알려드려야겠네.”
마을 사람들은 향신료에도 익숙하니 금세 적응할 거다.
두 번째는 구이였다.
구운 고기를 먹은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대로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설기와 모나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허겁지겁 구운 고기를 먹어 치우고 있었다.
실패할 가능성이 가장 적은 요리 방식.
강현은 이어서 볶은 걸 꺼냈다.
그리고 한입.
강현의 눈이 커졌다.
‘...생각보다?’
괜찮았다. 강현의 반응에 구운 고기를 먹던 둘의 움직임도 멈췄다.
강현은 피식, 웃고는 둘의 접시 위에 음식을 덜어줬다.
“...!”
“...!”
구이 때와는 달랐다.
설기와 모나가 먹는 모습이 전투적으로 변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먹고자 입안에 쑤셔 넣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강현은 마지막 음식을 꺼냈다.
앞의 요리들과 달리 모나와 설기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붉은빛이 너무 짙었다.
생고기에 가까운 느낌.
‘육회는 아니고, 타다끼라고 해야 하나?’
겉면만 익힌 후 써는 일본식 요리였다.
그러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얇게 썬 고기를 불에 살짝만 데워서 산미를 날리는 느낌.
고기의 얇기와 불의 강도가 이 요리의 전부였다.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은 강현의 미간이 꿈틀, 움직였다.
“음.”
다시 고기 한 점.
이번에는 좀 더 천천히 음미했다.
곧 고기를 삼킨 강현이 탄성을 뱉었다.
“놀랍네.”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기쁨과 동시에 아쉬움도 커졌다.
만일 미각이 정상이었다면 여기서 더 다양한 맛을 느낄 수 있었을 거다.
그리고 그걸 고려하더라도 지금까지 강현이 다뤘던 식자재 중에는 손에 꼽을 정도로 훌륭한 식자재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조미료나 향신료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재료 본연의 맛과 불만으로도 이런 맛을 내다니 놀라울 정도였다.
여기에 다른 재료들을 섞으면 어떤 맛을 낼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다 써버린 게 아까울 정도로.’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었다.
다시 고기를 먹는 강현. 그러다가 문뜩, 주변이 조용한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린 강현은 맹수의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타오르는 두 쌍의 눈동자.
당장이라도 강현에게 달려들 것만 같았다.
그제야 자신이 너무 먹는데 열중했다는 걸 깨달았다.
강현은 조심스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먹을래?”
끄덕끄덕.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왕복하는 두 개의 머리. 강현은 저도 모르게 그릇을 둘에게 내밀었다.
둘의 반응은 강현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약하지 않았다.
“...!”
“...!”
전기라도 오른 듯 몸을 떠는 둘.
모나의 커다란 눈망울에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반대로 설기는 방방 뛰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는 반응.
다시 허겁지겁 고기를 먹는 둘.
그러한 둘의 모습에 강현도 미소 지었다.
곧 접시가 순식간에 바닥을 보였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설기와 모나.
그러던 설기가 갑작스레 몸을 일으켰다.
“왜 그래?”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설기가 수풀을 향해 몸을 던졌다.
고개를 갸웃한 강현이 옆을 보았다.
빈 접시를 핥고 있는 모나. 화가 다 풀린 모습이었다.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뭐, 금방 돌아오겠지.’
설기가 저런 행동을 하는 게 한두 번이던가. 강현은 먹은 그릇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
* * *
순찰자는 요정족 내에서도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에밀리야 역시 그런 순찰자 중 하나였다.
언덕 위에서 숲을 관찰하던 그녀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정말로 수인족의 아이와 함께 있군요.”
흥미로웠다. 그녀는 인간 근처로 움직였다.
가볍고 은밀한 움직임. 숲속에 있는 동물들조차 그녀의 움직임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적당한 나무 위에 올라가 앉았다.
역시나 이를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어서 인간 사내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음식을 하는 건가?’
그런 것치고는 뭔가 경건한 느낌이었다.
마치 신자가 신에게 기도라도 드리는 듯한 경건함.
이어서 늑대와 수인족 아이의 반응이 그녀의 관심을 끌었다.
‘대체 어떤 요리를 하길래.’
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때, 바람을 타고 낯선 냄새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
“...!”
오랜 삶을 살아가면서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던 냄새.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 그녀가 화들짝 놀랐다.
“...제가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다른 엘프들이 봤으면 체면이 무너졌을 거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에밀리야.
다시 인간을 관찰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아직 인간이 무슨 목적으로 수인들과 접촉하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태연스럽게 먹을 것을 정리하는 인간.
수인족의 아이 역시 만족스럽게 자신의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정말로 먹기만 하는 건가?
에밀리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던 그녀는 곧 이상한 걸 눈치챘다.
“늑대가 사라졌군요?”
“컹!”
“...!”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란 그녀가 단검을 뽑았다.
오랜 훈련으로 생긴 민첩한 움직임.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자신 옆에 앉아있는 새하얀 늑대를.
늑대는 마치 나 불렀어? 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에밀리야는 눈앞에 늑대가 방금까지 인간과 함께 있던 늑대라는 걸 알아챘다.
‘대체 언제···!’
냄새에 정신이 팔려서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에밀리야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몸이 기울고 있기 때문이었다.
‘엇?’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리고 쿵.
어느새 정신을 차리니 에밀리야의 몸은 풀 위에 누운 상태였다.
에밀리야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나뭇가지 위에서 해맑게 쳐다보는 늑대가 하나.
“...내가, 나무에서 떨어졌다고?”
요정이, 그것도 순찰자인 자신이.
그러한 사실을 깨닫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본 것은 늑대 하나뿐···.’
부스럭.
고개를 돌리자 귀엽게 생긴 수인족 아이가 보였다.
에밀리야와 눈이 마주친 아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이어서.
“갑자기 달리면 어떻게 해···.”
수인족 아이를 따라온 인간과 눈이 마주쳤다.
긴 침묵.
침묵을 먼저 깬 건 에밀리야였다.
헛기침한 그녀는 짐짓 날카로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이런 곳에 인간이 있을 줄은 몰랐군요.”
힐끗 늑대를 살폈다.
‘그래, 나무에서 떨어지는 걸 본 건 늑대뿐이야.’
수인족 아이가 나타났을 때는 이미 몸을 일으킨 후였다.
여기서는 태연스럽게 행동해야만 했다.
에밀리야의 말에 인간 사내는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괜찮으세요?”
“...무슨 말씀이시죠?”
괜찮다니, 안 괜찮을 게 무엇이 있겠는가.
인간 사내는 말 대신 그녀의 뒤를 가리켰다.
‘뒤에 뭐가 있길래···.’
고개를 돌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흙이 묻어서 엉망이 된 머리카락.
흙만이 아니었다. 풀과 나뭇잎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마다 껴 있었다.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옷 역시 흙이 묻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나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어린 늑대.
상황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큰 귀만큼은 숨길 수가 없었다. 두 귀가 붉게 물들었다.
에밀리야는 도망치듯 숲을 향해 몸을 던졌다.
* * *
순식간에 사라진 이의 모습에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인간과도, 수인과도 다른 모습.
‘요정이라고 했던가?’
전에 란돌프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놀라게 했지?”
“끼잉?”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는 설기. 그러나 강현의 집요한 눈빛에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강현이 한숨을 내쉬자 나무 위에서 내려온 설기가 몸을 비볐다.
강현은 그런 설기의 머리를 거칠게 쓸었다.
한편으로는 의문도 떠올랐다.
나무에서 떨어진 게 그렇게 부끄러운 일인가? 잘 알 수 없었다.
“아우!”
그때, 모나가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그걸 본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단검. 칼집 없이 날만 있는 것이었다.
손잡이는 나무줄기를 엮어서 만들었다. 그러나 투박해 보이지 않고 신비한 느낌이었다.
‘그 요정의 것이겠지?’
그리 생각하는 게 타당했다. 강현은 단검을 챙겼다.
* * *
“나무에서 떨어진 요정이라. 귀한 걸 봤어.”
“...그래요?”
강현의 물음에 란돌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일세. 옛날에는 요정이 나무에서 떨어질 일이란 속담이 있었지. 그만큼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쓰는 속담이라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의미였다.
그리고 란돌프 옆에는 어째서인지 로멘이 함께하고 있었다.
로멘은 멋들어진 수염을 쓸어내렸다.
강현은 로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순찰자겠군.”
“그렇겠지. 어린 엘프들이 둥지 밖으로 나왔을 리는 없을 테니.”
란돌프의 말에 로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로멘은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강현을 보았다.
“조심하게. 진귀한 광경이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한 치부일 테니. 아마 이렇게 다른 이들에게 말하고 다닌 걸 알면 당장에 목을 베려고 할걸?”
껄껄 웃음을 터트린 로멘.
강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란돌프를 보았다.
그러나 란돌프는 농담이 아니란 듯이 작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럴만한 분으로 보이진 않았는데.”
강현의 말에 로멘이 혀를 찼다.
“요정, 그들의 외견은 아름다운 걸로 유명하지. 하지만 그 외견에 속아서는 안 돼. 원래 그런 녀석들의 속이 더 어두운 법이야.”
강현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란돌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로멘님도 너무 겁주지 마십시오. 엘프들이 냉정하고 계산적인 건 맞지만, 그리 악한 이들은 아니라네.”
란돌프의 말에 로멘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역시나 강현을 놀리던 것이었다.
한숨을 내쉰 강현이 로멘을 돌아보았다.
“그보다 로멘님은 어쩐 일이세요?”
“숲에 필요한 게 있어서 단장에게 동행을 부탁한 거네.”
로멘의 말에 강현이 탄성을 뱉었다. 로멘이 란돌프를 따라온 게 아니었다.
“원하는 걸 찾긴 했는데, 정작 중요한 걸 놓쳐서 아쉽군.”
요정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일행들이 먹고 남은 흔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로멘.
그건 란돌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둘을 보며 강현이 미소 지었다.
“간단히 뭐라도 만들어 드릴까요?”
이미 사냥한 건 다 먹어버렸지만, 재료는 주변에서 구하면 되었다. 강현의 말에 둘의 표정이 밝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