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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삐진 건가?
버스에서 나온 아이들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사, 사람이 엄청 많아···.”
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래도 상후는 전에 왔었다고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상후 역시 손에 힘이 들어가기는 마찬가지였다.
강현은 피식, 웃고는 둘을 데리고 터미널을 빠져나갔다.
걸을 때 몇몇이 강현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지만, 모른 척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사람이 많네.’
강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시골에 너무 익숙해진 건가.
아니면 아직도 감정을 떨쳐버리지 못한 건가.
번잡함이 거북스럽게 다가왔다.
“사, 삼촌. 우리 지하철 타요?”
지하철표시를 본 상후가 물었다. 목소리에 기대감과 두려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미영이는 아직도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강현은 상후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지하철로 안 가.”
그렇다고 버스를 탈 생각도 없었다. 슬쩍, 핸드폰을 확인했다.
‘슬슬 올 때가 되었네.’
아이들을 끌고 길가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행 앞에 검은색 스타렉스가 멈춰 섰다.
움찔.
놀라서 뒷걸음치는 아이들. 그와 달리 강현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드르륵.
뒷문과 함께 창문이 내려왔다.
“야, 타!”
익숙한 목소리. 선글라스를 쓴 사내가 일행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 * *
“야, 타라니. 대체 어느 시대 사람이야?”
“이럴 때는 분위기를 살려 줘야지.”
운전석에 앉은 사내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뒤에는 아직도 얼떨떨해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강현은 한숨을 내쉬고 아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쪽은 삼촌 친구.”
“친구 아니고 친한 형.”
옆에서 정정하는 윤섭.
강현이 눈을 흘기자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곧 밝은 얼굴로 둘을 돌아보았다.
“오늘 일일 가이드를 맡았으니까, 잘 부탁해.”
“잘 부탁은, 앞이나 잘 봐.”
“신호 아직 안 바꿔서 괜찮아.”
티격태격하는 둘의 모습을 보자 아이들도 안도할 수 있었다.
아이들의 표정이 편해지는 걸 확인한 강현이 다시 윤섭을 보았다.
“그래도 어떻게, 휴무를 얻었네? 휴가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어?”
“다 이 몸의 인덕이란 거지.”
윤섭이 씩, 웃으며 말했다. 뭔가 입을 열려던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강현을 보며 윤섭이 입을 열었다.
“나야말로 놀랐어. 네가 서울 오겠다고 해서 뭔가 했더니···.”
윤섭이 뒤를 힐끗거렸다.
“게다가 너 놀이동산 같은 곳도 싫어하잖아.”
강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맞는 말이었다. 놀이동산처럼 사람 많고 번잡한 곳을 싫어했다.
솔직히 일 년 전만 해도 자신이 이런 행동을 할 줄은 몰랐다.
“...형 말대로 내가 변한 거겠지.”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강현을 본 윤섭이 미소 지었다.
“좋은 일이지. 그만큼 네가 여유가 생겼다는 거잖아. 다른 이들을 챙길 정도로. 우리 강현이가 언제 이렇게 컸는지. 이 형은 감격스럽다.”
울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윤섭. 그를 본 강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결국, 한숨을 내쉰 강현이 시선을 돌렸다.
조용해진 차 안. 그때, 윤섭이 무언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맞다. 거기 앞에 서랍 열어 봐.”
뭔가 필요한 것이라도 있는 건가? 강현은 의아해하면서 서랍을 열었다.
그러자 안에 한가득 들어있는 젤리와 과자들.
“그것 좀 애들 줘.”
“...이게 다 뭐야?”
“우리 애들 비상식량.”
윤섭의 말에 강현이 탄성을 뱉었다.
“바쁠 때는 제대로 식사 못 할 때가 많거든. 그때는 예민해져서 뭐라도 넣어 줘야 해.”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윤섭. 윤섭이 맡은 아이들은 강현도 보았다. 한창 성장기의 아이들이 제대로 식사조차 못 하고 있었다. 강현은 쓴웃음을 짓고는 과자 몇 개를 뒷좌석에 전했다.
“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윤섭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과자를 먹는 아이들. 윤섭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강현이 그런 윤섭을 보며 물었다.
“애들은 좀 괜찮아?”
그러자 윤섭이 실소를 흘렸다.
“정말 미디어를 안 보는구나. 걔네, 지금 잘 나가. 이번에도 스케줄 하다가 아침에 들어왔어.”
강현의 눈이 커졌다. 아이들 때문이 아니었다.
“그럼, 형도 아침까지 일한 거 아니야?”
강현의 물음에 윤섭이 고개를 저었다.
“난 상황이 다르지. 혼자도 아니고.”
다른 매니저와 번갈아 가면서 쉴 수 있었다.
윤섭의 설명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창문을 보고 있던 윤섭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아니, 방금 인도에 있던 강아지. 너네, 강아지랑 비슷해서. 그 설기?”
이번에는 이름을 틀리지 않았다. 윤섭의 말에 강현 역시 고개를 돌렸다.
“어디?”
“이제 없어.”
인도 한쪽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게 보였다.
하나같이 뭔가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신호에 멈췄던 차가 다시 움직이고 강현도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행들은 놀이동산에 도착했다.
멀리 보이는 놀이기구들의 모습에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그뿐만 아니라 발까지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이들이 놀이동산에 한 눈이 팔린 사이, 윤섭은 좌석 옆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강현에게 건넸다.
모자.
“...고마워.”
윤섭의 뜻을 읽은 강현은 모자를 받고 깊게 눌러썼다.
윤섭은 아이들 힐끗거리고 입을 열었다.
“정말로 괜찮겠어? 모자를 써도 알아보는 이가 있을 거야.”
놀이동산처럼 사람이 많은 곳이라면 더더욱.
강현이 사람들에게 잊히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어.”
그걸 신경 쓸 것 같았으면 오지도 않았을 거다.
강현의 말에 윤섭은 작게 고개를 주억였다.
강현이 윤섭을 돌아보았다.
“태워줘서 고마워. 형은 어쩔래? 볼일 있으면 보고 와도 돼.”
강현의 말에 윤섭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섭섭한 말을! 놀이동산에 왔는데 그냥 가라고?”
윤섭의 대꾸에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모처럼 왔으니 제대로 놀고 가야지! 가자!”
마지막은 윤섭을 향한 게 아니었다. 상후와 미영이. 둘은 윤섭의 말에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신이 나서 걸음을 옮기는 셋의 모습에 강현이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셋을 뒤따랐다.
* *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윤섭과 함께 온 건 정답이었다.
“...”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은 강현.
저 멀리 웃고 떠드는 셋의 모습이 보였다.
강현은 새로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놀이동산처럼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놀이동산을 싫어하는 거였어.’
정확히는 놀이기구. 굳이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걸 타기 위해 한 시간씩 기다리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윤섭의 말에 따르면 오늘은 평일이라 사람이 적은 편이라고 했다.
‘윤섭이형이 있어서 다행이네.’
어린 미영이조차 즐거워하고 있었다.
점심때에는 전에 상후의 친구가 말했던 수제 버거를 먹었다.
그러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맛있긴 한데, 삼촌이 만든 게 더 맛있어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던 미영이.
그 모습을 떠올리니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맞지?”
“맞아, 맞아.”
작은 속삭임. 강현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예상은 했지만,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진도 몇 장 찍힌 것 같은데.’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아이돌도 아니고 고작 방송 몇 번 나온 요리사일 뿐인데 이렇게 관심을 가지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강현 때와는 달랐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돌아보니 방금까지 강현을 보며 속닥거리던 이들이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뭘 보고···.’
“꺅!”
고개를 돌리던 강현이 갑작스러운 비명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비명보다는 환호성에 가까웠다.
핸드폰을 들고 무언가를 쫓는 사람들.
그들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희끗희끗한 무언가가 보였다.
“꼬리?”
그러나 강현이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모습을 감췄다.
“...뭐지?”
이곳은 서울랜드와 달리 애완동물 입장이 금지되었다.
밖에서 몰래 들어온 건가? 강아지? 여우?
고개를 갸웃하는 강현의 눈에 놀이기구를 타고 돌아오는 일행들이 보였다.
“이야. 오랜만에 제대로 탔네. 응?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윤섭의 물음에 강현이 조용히 고개를 돌았다.
사정은 모르지만, 자신을 향한 관심이 사라진 건 다행이었다.
강현의 옆에 털썩 주저앉는 셋.
강현은 윤섭 뒤에 있는 상후와 미영이를 보았다.
잔뜩 상기되어 있는 둘.
그러나 전과 달리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강현의 시선이 윤섭에게 향했다.
“...대단하네.”
강현의 감탄에 고개를 갸웃하던 윤섭이 곧 그 뜻을 알아듣고 입꼬리를 올렸다.
“이 정도야 우습지. 여고생들의 체력을 무시하지 마.”
“...”
강현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당당하게 이야기할 내용인가?
‘...뭐, 자기 일에 대해서 자긍심을 가지는 건 좋으니.’
그러나 윤섭도 많이 지쳤는지 기지개를 켰다.
그 모습을 본 강현이 입을 열었다.
“슬슬 갈까?”
면회 시간도 생각해야 했다. 강현의 말에 셋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충분히 즐긴 것이었다.
* * *
병원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까까지 들떠 있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침대에 누워있는 여인을 본 상후가 울먹였다.
“엄마!”
앙상하게 마른 여인. 얼마나 치료가 힘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여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상후를 토닥였다. 그리고는 강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상후를 챙겨주신다고.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강현이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었다.
아직도 어깨를 들썩이는 상후.
그런 상후를 본 미영이의 눈시울도 붉어지기 시작했다.
여인이 곤란하다는 듯이 웃었다.
“이 아이도 참.”
“그럼 전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강현은 고개를 숙이고 훌쩍이는 미영이를 데리고 나왔다.
오랜만의 모자 상봉이었다.
둘만의 시간이 필요할 거다. 문 너머로 울먹이는 상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뭐 했는지 엄마 앞에서 자랑하는 것이었다.
“...저도, 엄마 보고 싶어요.”
미영이였다. 방금 광경을 보니 평창에 있는 응언이 떠오른 것이었다.
강현은 그런 미영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병원 밖으로 나오자 둘을 기다리고 있던 윤섭이 손을 흔들었다.
“근처에 키즈카페 찾았어.”
윤섭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병원에 따라오지 않아서 의아해했는데 이럴 걸 예상했던 것이었다.
가끔 보면 놀라울 정도로 예리했다.
‘...또 가끔은 놀라울 정도로 눈치가 없지.’
아니, 어쩌면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것일 수도 있었다.
강현은 피식 웃고는 윤섭을 뒤따랐다.
* * *
돌아가는 길.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 윤섭과 헤어진 일행들은 다시 평창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강현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올 때와 달리 새근새근 잠이 든 둘.
‘...확실히 지쳤나 보네.’
그러나 둘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나보다. 강현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을에 도착했을 때, 설기가 강현을 맞이했다.
“잘 있었어?”
“컹!”
씩씩한 대답과 함께 꼬리를 흔드는 설기. 그런 설기의 옆으로 이장이 다가왔다.
“도중에 잠깐 나갔다가 저녁 되기 전에 돌아왔더라고.”
“그래요?”
정말로 밥때에 돌아왔다. 이장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혼자 있어서 심심했던 것이었다.
“미안해. 다음에는 같이 올라가자.”
“끼잉?”
강현의 말에 설기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별로 가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아직 삐진 건가?’
전만 해도 가고 싶어 했었다. 무언가를 떠올린 설기는 몸을 흔들었다. 강현은 설기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