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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겠지?
“왔군. 그럼 난 가보겠네.”
란돌프가 오자마자 로멘이 떠나갔다.
집에 돌아가서 쉬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로멘과 헤어진 후 함께 시장에 온 란돌프는 쌓여있는 짐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지만 곧 강현의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네. 로멘님께 이 정도의 소비는 큰 문제도 아니야.”
마법을 익히려면 돈이 많이 든다. 란돌프는 마법에 쓰이는 재료 하나하나가 일반인들은 손에 넣기도 어려운 고가품이라고 설명해줬다.
“그나저나 이걸 숲까지 들고 가려면 말이 필요하겠군.”
“...”
란돌프의 말에 숨을 삼키는 강현. 수많은 식자재를 구한 것에 기뻐하기만 했지, 어떻게 옮길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직도 고통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굳어있는 강현을 본 란돌프가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일세. 내가 도와줄 테니 걱정하지 말게.”
어떻게 도와준다는 걸까? 강현은 노아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말을 타는 것보다는 나으니.’
강현은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현실은 상상보다 가혹했다.
커다란 보따리를 메고 숲을 달리는 란돌프.
옆에는 란돌프의 보따리보단 작지만, 제 몸에 세 배는 될 법한 보따리를 짊어진 설기가 함께였다.
그리고 강현은···.
“강현, 이러면 편하지?”
“...예.”
강현의 힘없는 대답에 웃음을 터트리는 란돌프.
웃음소리에 맞춰서 강현의 몸이 흔들렸다.
강현은 란돌프의 품에 안겨 있었다.
편하다. 노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쾌적했다.
아늑 그 자체였다.
‘하지만···.’
강현의 표정은 너무나도 어두웠다.
란돌프의 도움으로 식자재를 현실로 가져온 강현은 창고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런 강현을 향해 설기가 다가왔다.
“끼잉. 끼이잉?”
무슨 일이냐고 묻는 설기.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 혼자 있게 해줄래?”
남자로서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설기는 그런 강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 * *
매장으로 돌아온 강현은 이세계에서 가져온 식자재로 여러 가지를 실험했다.
빨리 써버리지 않으면 상하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다.
가장 놀라웠던 건 라메라고 불렸던 열매였다.
‘타마린드.’
새콤한 맛은 타마린드를 떠올리게 했다.
각종 소스나 카레에도 쓰이는 향신료.
더운 지방에서 물에 넣어 먹는다는 의미를 알 수 있었다.
‘타마린드도 주스처럼 먹지.’
그러나 효과는 달랐다. 신맛과 함께 몸에 활기가 돋았다.
신기하게도 시대는 중세 유럽과 비슷했지만, 식자재만 보면 동남아에 가까웠다.
강현은 라메를 내려놓고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는 쓰지 못하겠어.”
효과가 너무 좋았다. 라메뿐만 아니라 다른 식자재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평범한 것들도 있었지만, 어떤 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자극적인 것들도 있었다.
나쁜 의미만은 아니었다.
먹는 순간 정신이 맑아지는 잎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뜀새도 그랬지.”
뜀새 고기의 회복력은 지구의 여느 고기와도 달랐다.
지구와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이었다.
‘정말 이세계였네.’
강현의 체력이 올라간 이유도 명확해졌다.
이런 걸 먹으니 지구보다 체력이 좋은 것이었다.
그러니 지구에서 쓰기에는 너무나 위험했다.
‘조심해야겠어.’
그렇다고 해서 연구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이곳에서 쓰지 못한다지만 저쪽으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랐다.
“...미각이 아쉽네.”
회복되었을 때만 해도 좋았지만, 이렇게 새로운 식자재들을 접하니 예전의 미각이 그리워졌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얼추 만들 수 있겠어.”
수인족을 위한 요리.
강현은 다시 진지한 눈빛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 * *
숲속 깊은 곳.
새들의 지저귐을 듣던 여인의 눈이 떠졌다.
“...무슨 일이죠?”
“쉬시는 걸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순찰자님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여인의 앞에 나타난 건 한 사내였다.
여인만큼이나 아름다운 사내. 풀과 나뭇잎을 엮어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인간과 닮았으나 특이하게도 그들의 귀는 더 길었다.
요정족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최근에 강 너머를 다녀온 전사 하나가 인간을 보았답니다.”
사내의 말에 여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교류가 끊기고 백 년.
숲에 인간이 오는 일은 드물었지만, 없지는 않았다.
굳이 보고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한 여인의 반응에 사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인간이 수인족의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요?”
여인의 눈동자가 흥미가 떠올랐다.
어느 종족이든 아이는 귀했다. 수인족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기에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도중에 수인족 전사가 나타나는 바람에 더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수인족 전사와도 안면이 있어 보였습니다.”
억지로 있는 게 아니란 소리였다.
“...혹시, 둘이 손을 잡고 무슨 일을 꾸미는 것 아닙니까?”
사내의 물음. 그러나 사내의 의심은 과한 게 아니었다.
강 너머의 숲은 중립 지역인 만큼 자원이 풍부했다.
인간과 수인뿐만 아니라 요정 역시 탐낼만했다.
하지만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진 않을 거예요.”
만일 둘이 숲을 탐한다면 요정족 역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신들이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는 뻔했다.
인간과 수인의 생은 요정보다 짧았다.
그렇다고 해서 고작 백 년 만에 그러한 사실을 잊었을 리도 없었다.
“최근에 바람이 소란스럽더니 그 때문이었군요.”
그뿐만이 아니라 강 너머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걸 몇 번이나 목격했다.
“어떻게 할까요?”
사내의 물음에 여인은 턱을 괴었다.
무언가를 판단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적었다.
“알겠어요. 내가 직접 확인해보죠.”
“예. 순찰자님.”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는 사내.
홀로 남은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청명한 하늘.
언제나 보던 하늘과 같았다. 여인은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 * *
목줄과 강아지용 케이지를 본 설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 설기야. 내일 멀리 갈 건데. 따라오려면 여기에 있어야 해. 목줄도 차야 하고.”
설기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강현을 돌아보았다.
“이게 싫으면 마을에서 기다려야 해.”
“끼이잉.”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설기가 앞발로 케이지를 두드려보았다.
“가서 불편하다고 부수는 건 안 돼.”
움찔.
슬그머니 앞발을 내리는 설기. 그 모습에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부술 생각이었구나.’
강도를 알아보고 있던 것이었다.
강현의 곁에서는 얌전하지만, 설기는 야생의 맹수였다.
좁은 공간이 불편할 거다.
“당연히 목줄을 끊는 것도 안 되고.”
“...”
강현의 말에 털썩 주저앉는 설기. 마치 모든 걸 잃은 표정이었다.
안쓰러웠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서울랜드는 애견 동반이 가능했지만, 목줄이 필수였다.
“올 때 맛있는 거 사 올게.”
강현이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하자 꼬리로 쳐냈다.
‘단단히 토라졌나 보네.’
강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강현은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가면 사람들이 많아서 번잡할 거야. 아이들도 많고.”
꿈틀, 설기의 귀가 흔들렸다.
아이들에게 시달린 기억이 남아있는 것이었다.
“어차피 따라와도 계속 기다려야 해.”
맞는 말이었다. 이동할 때는 물론이고 놀이동산 안에도 마찬가지였다.
설기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
그러나 전보다는 나았다. 어느 정도 기분이 풀린 것이었다.
“같이 가고 싶으면 같이 가도 돼.”
하지만 목줄과 케이스를 써야 했다. 강현은 설기에게 선택지를 넘겼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고민하는 설기.
결국, 목줄과 케이스에서 고개를 돌려버리는 설기.
선택한 것이었다.
강현은 쓴웃음을 짓고는 설기를 볼을 간지럽혔다.
그러한 강현의 손을 꼬리가 툭, 툭 쳤지만, 아까보다 힘이 없었다.
“마을이 싫으면 숲에 데려다줄게.”
강현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설기가 고개를 저었다.
마을에 남겠다는 뜻이었다.
“자, 그럼 이야기가 끝났으니 밥이나 먹을까?”
쫑긋. 시무룩하던 설기의 눈이 반짝였다.
그 모습에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 * *
다음 날.
마을 사람들이 강현을 배웅 나왔다.
‘...그냥 서울에 다녀오는 것뿐인데.’
그것도 당일치기. 이렇게 나와서 배웅할 정도로 큰일인가 싶었다.
그러나 옆을 본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후와 미영이. 둘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멀리 나갔다 오니 걱정이 될 거다.
그러나 둘과 달리 이장 옆에 있는 설기는 여전히 삐진 상태였다.
강현은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고 이장을 돌아보았다.
“그럼 설기를 부탁드립니다.”
“걱정 붙들어 매. 내가 밥 잘 챙겨줄 테니.”
이장의 말에 강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장에게 부탁했지만, 설기도 알아서 제 앞가림을 할 것이다.
강현은 설기의 머리를 두드리고는 트럭에 올랐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려! 애들 잘 챙기고!”
트럭이 출발하고 마을 사람들이 강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강현은 멀어지는 사람들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내가 선생한테 감사해야지. 이렇게 우리 애를 데리고 서울 구경까지 시켜주잖아.”
미영이의 아버지가 강현을 보며 웃었다.
여전히 낯간지러운 호칭에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미영이 아버지가 터미널까지 태워주기로 한 것이었다.
옆에 앉은 상후와 미영이는 쉴 새 없이 조잘거리고 있었다. 뭐가 저리도 신날까. 둘 다 기대감에 잠을 못 잤다고 들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행들은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럼, 잘 다녀와. 선생 부탁해.”
“예. 걱정하지 마세요.”
강현의 인사에 고개를 끄덕인 미영이 아버지는 트럭의 창문을 닫았다.
오늘도 일이 있는데 일부러 시간을 낸 것이었다.
‘덕분에 딱 맞춰서 왔네.’
버스를 탔으면 미리 와서 기다려야 했을 거다.
강현은 아이들을 데리고 버스에 올랐다. 서울행 버스.
아까까지 들뜬 모습이 거짓말처럼 잔뜩 긴장한 아이들.
미영이는 그렇다고 해도 상후는 처음 가는 것도 아니면서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영이를 신경 쓰는지 애써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서, 서울도 벼, 별 거 없어. 미영아, 너무 긴장하지 마.”
“으, 응.”
강현에게는 둘 다 귀여워 보였다.
곧 버스가 출발했고 강현의 시선이 창문 너머로 향했다.
이제는 익숙한 풍경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서울이라.’
서울이 낯설게 느껴지는 건 강현도 마찬가지였다.
피식 웃은 강현은 혼자 남아있을 설기를 떠올렸다.
‘잘 있겠지?’
영리하니 알아서 잘할 거다. 그러던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창문 너머로 흰 그림자를 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요즘 너무 무리했나 보네.”
이세계에서 가져온 식자재를 연구하다 보니 잠이 부족했다.
설기를 생각하다 보니 잘 못 본 것일 거다. 다시 주변을 둘러봐도 밭과 논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럴 리가 없지.’
고개를 끄덕인 강현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 * *
강현을 배웅한 이장은 허전해진 옆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설기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했는데 떠나자마자 이 꼴이었다.
황급히 두리번거리자 옆에 있던 박씨 할머니가 눈살을 찌푸렸다.
“설기라면 차를 따라갔어. 배웅이라도 갔겠지. 개가 사람보다 나아.”
“아니, 그걸 보고만 있었어?”
“제 주인 배웅한다는데 말려? 잡을 수나 있고? 알아서 밥때 되면 오겠지.”
박씨 할머니의 말에 이장이 툴툴거렸다.
“누가 그걸 모르나. 아직 어려서 걱정하는 거지.”
맞는 말이었다. 설기의 영리함은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길을 잃진 않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