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걸 꼭 붙잡고 있으면 되네.
일주일이란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짐을 챙긴 강현은 긴장과 설렘을 가지고 이세계로 넘어왔다.
후덥지근한 더위가 사라지고 상쾌한 공기가 강현을 맞이했다.
에어컨을 켜놔서 매장도 시원하긴 하지만, 이곳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몸 안에 공기를 순환시켰다.
머리도, 몸도 가벼워진 느낌.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핀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안 온 모양이네.”
“컹!”
설기가 숲속을 폴짝, 폴짝 뛰어다녔다.
흔들리는 꼬리.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럼, 좀 걸을까?”
어차피 한 자리에서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알아서 찾아오겠지.’
지금까지 잘 찾아왔으니. 강현의 말에 설기의 귀가 쫑긋 올라갔다.
“컹!”
바로 숲속을 달려 나가는 설기.
강현은 웃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발, 한 발.
이제는 집에 온 것처럼 정겨운 광경이었다.
‘...이제 진짜 서울로 못 가겠네.’
이 모든 걸 버리면서까지 복잡한 서울로 가기는 힘들었다.
한때는 집을 할아버지 댁으로 이사하려고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마을에 정이 들었어.’
지금 마을을 떠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걷고 있으니 불쑥 모나가 머리를 내밀었다.
두리번거리는 모나.
설기를 찾는 것이었다. 설기가 보이지 않자 고개를 갸웃한 모나는 강현을 향해 걸어왔다.
강현은 그런 모나를 보며 숨을 삼켰다.
‘...잊고 있었어!’
배시시 웃으며 강현의 손을 잡는 모나.
그런 모나를 보며 강현은 곤란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데리고 가면 안 되겠지?’
수인과 인간의 사이를 떠올리면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손님으로 찾아가면서 문제를 일으킬 순 없었다.
강현은 모나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한쪽 손가락을 입에 넣고 쪽쪽 빨고 있는 모나. 한참 기대하고 왔을 모나에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모나야 오늘은 같이 못 놀아줘.”
“...”
고개를 갸웃하는 모나.
그런 모나를 본 강현인 한숨을 내쉬었다.
설기와는 달랐다. 모나를 이해시키기는 힘들었다.
‘어쩌지.’
곤란해하고 있던 강현은 곧 무언가를 떠올렸다.
카샨에게 받은 목걸이.
‘도움이 필요하면 부르라고 했지?’
이때가 아니면 언제 쓰겠는가.
모나는 곧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도 모른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강현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고 호각을 불었다.
피이이이-
청명한 소리가 숲속을 울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수풀 한쪽이 흔들렸다.
‘벌써 온 건가?’
빨랐다. 그리고 수풀을 헤치고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새하얀 털 뭉치.
“컹!”
강현을 보며 반갑게 짖는 설기. 꼬리도 흔들리고 있었다.
나 불렀어?
뭔데? 뭔데?
하고 묻는 듯했다. 강현은 고개를 흔들었다.
“설기, 너 말고.”
곧 설기의 꼬리가 내려갔다.
시무룩해진 설기.
“...아니, 왜 실망하는 건데?”
강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금세 기분이 풀렸는지 옆에 와서 몸을 비볐다.
그렇게 설기가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로운 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강현이 기다리던 이들이었다.
“누군가 했더니. 지난번 인간이군.”
두 수인.
한 명은 강현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고 다른 하나는 담담히 인사를 건넸다.
“저번에는 덕분에 잘 먹었다. 그래, 인간. 무슨 도움이 필요하지?”
발톱을 드러내는 수인. 바로 전투 태세에 들어간 것이었다.
뒤에 있던 수인 역시 말없이 눈을 번뜩였다.
그런 수인들의 모습에 강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 모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꽈악.
수인들이 나타난 이유를 짐작했는지 강현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윽···!”
비명을 지를 뻔한 걸 참은 강현이 고통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지금 인간 마을에 가야 할 것 같아서···.”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수인의 시선이 모나에게 향했다.
“...”
“...음!”
방금까지 기세등등했던 모습과 달리 그들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
“...그렇지. 인간 마을에 보낼 순 없지.”
무려 족장의 딸.
두 수인이 모나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캬아아악!”
사납게 위협하는 모나. 하지만 수인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러자 방법을 바꿔서 슬그머니 뒷발을 옮겼다.
도망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수인들은 모나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순식간에 강현과 모나를 포위했다.
“자, 잠깐 손은 놓···. 컥.”
강현이 급히 몸을 비틀지 않았다면 손이 꺾였을 거다.
강현의 손을 붙잡고 있는 바람에 모나의 움직임이 늦어졌다.
금세 수인들에게 붙잡힌 모나.
“으아! 아우우우!”
강현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수인들에게 강제로 떼어졌다.
배신당한 모나가 강현을 원망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미안, 다음에 맛있는 거 해줄게.’
강현은 속으로 사과했다.
곧 모나의 분노는 수인들에게 향했다.
자신을 붙잡은 수인을 물어버린 것이었다.
물린 수인이 강현을 돌아보았다.
“...그럼, 인간 우린 이만 가보겠다.”
“괘, 괜찮으세요?”
피 나는데?
조금이 아니었다.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수인은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전사다. 이런 고통에는 익숙하다.”
말과 달리 수인족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다른 수인도 멀쩡하지 않았다.
강현에게서 떼어놓은 대가로 여기저기가 긁혔다.
“...역시, 족장님의 아이인가.”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말이었다.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반항을 멈추지 않았다.
강현은 멀어지는 수인들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진짜 괜찮은 거 맞나?”
작지만 맹수가 맞았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슬슬 뒷감당이 두려워지는 강현이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먹을 것부터 줘야겠네.”
살기 위해서 육포라도 들고 다녀야 했다.
“...뭘 준다고?”
“아, 란돌프씨.”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강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갑옷이 아닌 가죽을 걸친 란돌프가 서 있었다.
란돌프는 강현을 보더니 의아해했다.
“지쳐 보이군. 무슨 일 있었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혼잣말이에요.”
강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폭풍이 지나가긴 했지만, 주저리주저리 떠들 정도는 아니었다.
강현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길게 하품하고 있는 설기. 강현과 눈이 마주치자 입을 벌리고 웃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수한 표정.
‘이럴 때는 무시지?’
아이와 관계된 일에는 나서지 않았다.
그러한 강현의 반응에 란돌프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가? 그럼 출발하지.”
란돌프가 강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게 강현은 란돌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강현과 설기, 란돌프 셋이 숲속을 걸었다.
빠른 속도긴 했지만, 강현이 못 따라갈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강현의 숨이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가방은 내가 들겠네.”
“아, 감사합니다.”
란돌프가 강현의 배낭을 들어서 어깨에 걸쳤다.
제법 큰 배낭이었지만, 란돌프가 메니 작게 느껴졌다.
속도는 전과 같이.
강현의 보폭에 맞추는 것이었다.
그런 란돌프를 보며 강현이 입을 열었다.
“마을이 이곳에서 가깝습니까?”
그러자 란돌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그럼 이렇게 여유 있게 걸어도 되는 걸까? 강현은 의아해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강현의 체력은 란돌프가 잘 알았다.
아마도 강현보다 더 잘 파악했을 거다.
그러니 알아서 계획했을 거다.
그런 강현을 본 란돌프가 웃음을 흘렸다.
“걱정하지 말게. 내 자네를 위해 특별한 걸 준비했으니.”
의미심장한 웃음.
강현은 특별이란 어감이 불안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숲속을 걷다 보니 조금씩 나무들의 숫자가 주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때, 설기가 귀를 쫑긋 세웠다.
그걸 본 란돌프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오, 어린 늑대는 알았나 보군.”
뭘 알았다는 거지?
의아해하던 강현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두 마리의 갈색 말.
숲 중간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그러나 일반 말과 다르게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말들은 란돌프를 보자 투레질했다.
강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설마.”
그런 강현과 달리 란돌프는 웃으며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곧 란돌프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자네 말을 타본 경험이 없지? 내 특별히 데려왔다네. 원래는 마차를 끌고 올까 했었는데.”
그리 말한 란돌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네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그리고 이쪽이 훨씬 재밌을 걸세.”
강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란돌프의 옆에 있는 말을 보았다.
‘...마차로 충분했는데.’
무시해도 괜찮았다.
원래 말이 저리도 컸었나? 근육 역시 장난이 아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자, 이리 오게. 타는 법을 가르쳐주겠네.”
란돌프의 손짓에 강현이 멈칫했다. 쉽사리 다가가기 힘들었다.
그러나 란돌프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다.
설기가 빼꼼 고개를 내밀자 말들이 경기를 일으켰다.
“워, 워어. 진정해.”
란돌프가 달래려고 했지만,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설기야 물러나.”
“키잉.”
설기의 귀가 축 내려갔다.
강현의 말에 설기가 뒤로 물러나자 겨우 진정되었다.
강현은 그런 설기를 힐끗거리고는 란돌프에게 다가갔다.
“신의 피를 이었다지만, 이 녀석들까지 이리 반응할 줄은 몰랐군.”
란돌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란돌프를 보며 강현이 입을 열었다.
“말끼리 이렇게 놔둬도 괜찮나요?”
이 숲에는 맹수가 많다. 강현은 설기 덕분에 무사하지만, 사람들이 함부로 다닐 수 없는 곳이라고 란돌프가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란돌프가 고개를 흔들었다.
“일반적인 말이라면 그렇지. 이 녀석들은 평범한 말이 아니라네.”
란돌프의 말에 강현의 눈이 커졌다.
“설마, 설기와 같은···.”
“하얀 늑대와 비교할 수는 없지. 요정마의 피가 섞였네.”
란돌프가 말을 이었다.
“요정마는 자존심이 강해서 등에 다른 이를 태우지 않지. 이 녀석들은 그런 요정마와의 교배로 태어난 아이들이야. 어릴 때부터 사람을 태울 수 있게 길들였지. 맹수라면 맹수야.”
자기들 이야기한다는 걸 알아챘는지 말들이 투레질했다.
그러나 아까 설기를 봤을 때 놀라던 모습을 기억하는 강현으로서는 믿기지 않았다.
란돌프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수풀 속에 몸을 감추고 있는 설기.
“아쉽지만, 어린 늑대는 떨어져서 와야겠어.”
요정마와 혼혈이라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역시나 하얀 늑대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설기에게 다가갔다.
“끼잉, 낑.”
앓는 소리를 내던 설기가 계속된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줘서 고마워.”
강현은 그런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설기는 시무룩해 하면서도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란돌프에게 다가갔다.
“이야기가 잘 끝난 것 같군. 자, 그럼 내가 말 위에 올려주겠네.”
란돌프가 강현의 허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우왓.”
올라간 강현은 엉덩이를 통해서 느껴지는 감각에 깜짝 놀랐다.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살아있지.’
란돌프는 고삐를 강현에게 건넸다.
“이걸 꼭 붙잡고 있으면 되네.”
“예?”
란돌프의 말에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그게 끝이란 말인가?
당황하는 강현을 향해서 란돌프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잠깐 배운다고 해서 다룰 수 있는 녀석이 아니야. 게다가 자네의 힘으로는 꼼짝도 하지 않을 걸세. 알아서 잘 따라올 테니 떨어지지 않게만 잡고 있으면 돼.”
그리 말한 란돌프가 말 위에 올랐다.
“이럇!”
발로 말의 엉덩이를 치자 달려 나가는 말.
그리고 강현이 타고 있던 말 역시 란돌프의 말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자, 잠깐.”
말이 움직일 때마다 앞뒤로 흔들리는 강현의 몸.
저절로 고삐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