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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게 좋은 거니.
며칠 뒤, 마을을 뛰던 강현은 공사 중인 집을 볼 수 있었다.
외부에서 온 인부들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행동력 하나는 빠르시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빈집이었던 곳이었다. 이런 곳에 이사 올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강현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근처에 별장이 있으면서도 새롭게 짓고 있는 것이었다.
“컹!”
“...알겠어. 가자.”
멀리서 먼저 달리던 설기가 강현이 오지 않자 짖었다.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공사가 끝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나중에 다시 살피면 되었다.
그렇게 마을 한 바퀴를 돌고 돌아오니 매장 앞에서 누군가가 강현을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거대한 덩치의 사내.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강현이 반갑게 맞이했다.
“민호씨!”
“아, 오셨습니까?”
여전히 무뚝뚝한 말투. 수진이 애를 낳고 나서 한동안 보질 못했었다.
“잘 지내셨어요?”
“예. 덕분에.”
무심한 듯 고개를 주억이는 민호. 그러나 이제는 수줍어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내도 지난주에 조리원에서 나왔습니다.”
“잘됐네요.”
강현의 대답에 민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아직 외출이 힘들어서 많이 오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이거···.”
민호가 무언가를 건넸다. 민호가 건넨 걸, 확인한 강현의 눈이 커졌다.
하늘색 오븐 장갑. 중간에 하얀 강아지의 모습도 보였다.
‘설기겠지.’
그것도 직접 짠 것이었다.
“있는 동안 신경 써줘서 고맙다고 만들었답니다.”
“이걸 직접···.”
강현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이런 선물을 받을 줄은 몰랐다.
민호가 강아지를 보며 말했다.
“강현씨가 쓰기에는 조금 유치한 것 같다고 말했지만···.”
황급히 고개를 젓는 강현.
“아닙니다. 잘 쓰겠습니다.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강현의 말에 민호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따가 저녁때, 돈가스도 하나 포장 부탁드립니다.”
수진의 것이었다. 조리원에 들어가기 전에는 종종 이런 식으로 주문했었다.
강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특별식으로 준비하죠.”
그렇게 인사를 나눈 민호가 떠나갔다. 멀어지는 트럭을 보던 강현이 냄비 장갑을 흔들었다.
장갑에 그려진 강아지가 흔들렸다.
“어때?”
“컹!”
해맑게 짖는 설기. 설기도 마음에 드는지 꼬리를 흔들었다.
강현은 웃으며 매장 문을 열었다.
* * *
점심시간이 지낼 때 즈음, 매장의 문이 활짝 열렸다.
“요리사 삼촌!”
반갑게 손을 흔들며 들어오는 꼬마 아이.
상후였다. 뒤에는 미영이가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오.”
베트남에서 온 응언의 딸.
전에 생일 파티를 같이했었다.
강현은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고 둘에게 향했다.
“이 시간에는 어쩐 일이야? 학교는?”
강현의 물음에 상후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방학이요!”
상후의 말에 강현이 탄성을 뱉었다.
‘벌써 그런 시기구나.’
강현의 시선이 상후 뒤에 있는 미영이에게 향했다.
“그래서 놀러 왔구나?”
“네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전과 달리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강현의 시선이 다시 상후에게 향했다.
방학인 건 알았지만, 이곳에 온 이유가 되진 않았다.
“삼촌, 우리 여기서 방학 숙제하고 가도 돼요?”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상후. 그 모습에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더워서 피난 온 거구나.’
이 마을에서 에어컨이 있는 집은 손에 꼽았다.
마을회관이 있긴 했지만, 어르신분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대신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 가지 않게 조용히 있어야 한다?”
“예! 조용히 있을게요!”
끄덕끄덕.
옆에 있던 미영이의 머리도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리고는 구석 자리로 향하는 둘.
설기는 긴장한 눈빛으로 둘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내렸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설기에게 인사를 건넬 뿐, 큰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작게 속닥이는 둘을 보며 강현이 미소 지었다.
‘...그렇구나. 방학이구나.’
벌써 그렇게 되었다. 강현은 전에 상후와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음, 날을 한 번 잡아야겠네.”
잊고 있었다.
강현은 그런 둘을 보다가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점심때 썼던 식자재를 채워놓고 저녁 장사를 준비하고 있자 다시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딸랑딸랑.
고개를 돌리자 베레모를 쓴 노신사가 보였다.
“작가님.”
강현이 반갑게 맞이하자 정기훈 작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점점 더워지는군.”
“여름이잖습니까.”
강현의 말에 정기훈 작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여름이지. 항상 이 시기에는 아이슬란드에서 보내서 잊고 있었어.”
“아이슬란드요?”
“그래, 그쪽에도 별장이 하나 있네.”
정기훈 작가의 말에 강현은 헛웃음을 삼켰다.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구나.’
생각해보면 한국에만 있다고 말한 적도 없었다.
역시나 배포가 달랐다. 강현은 정기훈 작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결국, 아이슬란드행을 포기할 정도로 이곳이 마음에 들었단 소리였다.
강현은 아침에 보았던 공사 현장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아예 이사 오시게요?”
강현의 물음에 정기훈 작가가 어찌 알았냐면서 눈을 크게 떴다.
“아침에 마을을 뛰다가 봤어요.”
그리고 낮에 인부들이 식사하러 오기도 했었다.
“이 더위에? 정말 부지런하군.”
놀란 눈으로 강현을 보던 정기훈 작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쓰는 별장이 오래되어서 슬슬 보수를 해야 하네. 그럴 바에는 새롭게 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정기훈 작가의 말을 듣던 강현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러자 주저리 떠들던 정기훈 작가가 헛기침했다.
‘솔직하지 못하시네.’
그리고 거짓말도 익숙하지 않았다.
필시 이장의 꼬임에 넘어간 게 분명했다.
“아무튼 그렇게 되었네.”
정기훈 작가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강현도 더 묻지 않았다.
그렇게 홀로 들어가던 정기훈 작가의 눈에 아이들이 들어왔다.
“저 아이들은?”
“동네 애들입니다. 방학 숙제 중에요.”
“이곳에서?”
“밖이 더워서.”
강현이 창문 너머를 가리켰다. 그러자 정기훈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밖의 더위를 겪었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때마침 아이들은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마구잡이로 칠하는 상후와 달리 미영은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지 울상을 지었다.
강현은 슬쩍 미영의 그림을 보았다.
‘...숲속에 있는 공룡? 떠 있는 저건 풍선인가?’
당연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러나 강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집을 그리는구나. 옆에 있는 건 엄마 아빠지?”
정기훈 작가였다. 정기훈 작가의 말에 미영이의 눈이 커졌다. 역시나 작가였다.
한눈에 미영이의 의도를 간파한 것이었다.
“이 할아버지가 도와줄까?”
미영이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상후를 보았다.
상후는 잠시 고민하더니 힐끗, 강현을 쳐다보았다.
상후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하는 강현. 그러나 곧 시선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아뇨!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일어나서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앉았다.
아까 다른 사람 방해하지 말라던 말을 떠올린 것이었다.
그런 상후의 모습에 미영이도 황급히 따라 일어났다.
“가, 감사합니다.”
입을 다무는 정기훈 작가. 그 모습에 강현은 아차 싶었다.
‘...상처, 받으신 건가?’
표정을 보니 그랬다. 설마 거절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정기훈 작가의 가르침을 원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굳어있는 정기훈 작가를 본 강현이 슬쩍, 앞으로 나섰다.
“이 할아버지 유명한 화가셔. 저 그림도 할아버지가 그려준 거야.”
강현이 벽에 있는 그림을 가리켰다.
그러자 둘의 표정이 변했다.
“우와, 진짜요?”
“예뻐요!”
둘의 반응에 정기훈 작가의 표정이 풀어졌다.
“험,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란다.”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흔드는 정기훈 작가. 아이들의 눈이 빛났다.
그때, 미영이가 수줍게 입을 열었다.
“그럼, 그럼 뽀비도 그릴 수 있어요?”
“뽀비?”
정기훈 작가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강현이 슬그머니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듣는 단어였다.
그런 정기훈 작가의 반응에 미영이의 얼굴에 실망이 떠올랐다.
옆에 있던 상후가 미영이를 보며 입을 열었다.
“뽀비는 어린애들이나 보는 거야. 어른들은 안 봐.”
나름 오빠라고 설명하는 것이었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난, 뽀비가 좋은데.”
그제야 강현은 뽀비가 무엇인지 예측할 수 있었다.
‘어린이 만화인가 보네.’
아이들이 좋아하는. 당연히 정기훈 작가와 강현이 알 리가 없었다.
그때, 정기훈 작가가 입을 열었다.
“...그릴 수 있다.”
“예?”
강현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 뽀비란 걸 보여주면 할아버지가 그려주마.”
“진짜요?”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정기훈 작가. 강현이 슬그머니 다가가서 물었다.
“...괜찮으시겠어요?”
정기훈 작가에게만 들리게 작게 물었다.
“괜찮네. 이 정도 역경도 헤쳐 나가지 못할 정도라면 내 경력도 헛된 거야.”
차분하게 말을 뱉는 정기훈 작가. 그는 진심이었다.
그의 말에 강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뽀비가 뭐라고 경력까지 거는 걸까.
그런 강현과 달리 미영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잠깐만요.”
그리고는 책가방을 뒤지더니 분홍색 필통을 꺼냈다.
필통에는 귀엽게 생긴 토끼가 그려져 있었다.
강현은 그것이 뽀비란 걸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건 정기훈 작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스케치북 좀 써도 되겠니?”
“예.”
미영이가 자신의 스케치북을 건넸다.
진지한 눈빛으로 필통을 노려보는 정기훈 작가.
곧 그의 손이 움직였다.
“우와!”
“똑같아!”
복제라도 하듯 순식간에 스케치북 위에 뽀비가 생겼다.
옆에서 지켜보던 강현조차 감탄할 실력.
두 아이의 반응에 정기훈 작가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저, 저, 저, 그럼 이것도 그려줄 수 있어요?”
흥분했는지 상후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상후가 꺼낸 건 로봇이 그려진 공책이었다.
“물론이란다.”
정기훈 작가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마법과도 같은 솜씨.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던 강현이 뒤늦게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 재능 낭비 아닌가.’
세계적인 작가를 앉혀놓고 무슨 짓이란 말인가.
애당초 방학 숙제가 목적이 아니었던가.
이미 방학 숙제는 뒷전이 되어버렸다. 아이들의 요구에 따라 이것저것 그리는 정기훈 작가.
강현이 곧 실소를 흘렸다.
“하긴, 상관없나?”
아이들이나 정기훈 작가나 즐거워 보였다.
그럼 된 것 아니겠는가.
‘그렇지?’
강현의 시선에 길게 하품하던 설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기는 옆에서 뭘 하든 관심이 없어 보였다.
피식, 웃은 강현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모르겠지만, 정기훈 작가는 식사하러 온 것이었다.
허기가 졌을 거다.
강현은 냉장고에서 피자 반죽 하나를 꺼냈다. 정기훈 작가와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메뉴는 알아서 정했다.
원래 서비스는 주는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좋은 게 좋은 거니.’
강현은 웃으며 피자를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