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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 잔 내지.
강현은 고개를 흔들었다. 꿈에서 깨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곳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수인족의 체술을 제가 배우는 건···.”
아니지 않나? 강현은 뒷말을 흘렸다.
그런 강현의 말에 노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족장님의 허락은 맡았다.”
벌써 허락까지 맡은 건가!
강현의 머릿속에 전에 만났던 카샨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라면 그럴만해.’
흔쾌히 허락해줄 거다. 강현이 머뭇거리자 노아의 눈썹이 휘었다.
“인간들의 검술은 뛰어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검이 있어야 온전한 능력을 발휘하지.”
목검을 힐끗거린 노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 검이 없는 상태에서 도적이나 맹수를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이지?”
“...”
강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검이 없는 상태에서 도적이나 맹수?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그러한 일을 몇 번이나 마주치겠는가? 아마 평생에 한 번도 있을까 말까였다.
오히려 검을 들고 다니는 게 더 위험했다. 경찰서에 끌려가겠지.
‘...미국이라면 강도 정도는 만날 수 있겠네.’
하지만 싸울 생각은 없었다. 가진 물건을 다 넘기거나 도망치는 게 현명했다.
그리고 미국에서 강도를 만난다면 칼이 아니라 총을 들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면 우리 수인의 체술이 인간의 검술보다 못하다고 보는 건가?”
아니, 전 인간인데···.
강현은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이 세계의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저렇게 나오니 안 배울 수도 없었다.
강현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노아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시작한다.”
“바로요?”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강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강현은 어깨를 잡고 손을 보며 불안감을 느꼈다.
“인간들은 힘에 의존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지. 진정한 강함은 유연성과 속도에서 나온다. 굳은 네 몸부터 풀겠다.”
굳었다니.
그래도 스트레칭을 꾸준히 해줬던 강현이었다.
그러나 노아의 원하는 건 스트레칭의 수준이 아니었다.
곧 강현의 비명이 숲속을 울렸다.
* * *
강현은 수련이 끝나자마자 털썩 주저앉았다.
숲을 달릴 때와는 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괴로움은 없었다.
다른 느낌의 고통.
강현의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강형은 관절이 이렇게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런 강현의 곁에 다가온 설기가 뺨을 핥았다.
“...고맙다.”
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온몸이 쑤시긴 했지만, 반대로 시원한 느낌도 들었다.
안 쓰던 근육까지 하나하나 풀어줬기 때문이었다.
그 옆에는 노아가 진지한 눈빛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심하군. 요즘 인간들은 수련을 안 시키는 건가?”
강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강현이 했던 수련이라면 요리밖에 없었다.
“그런데 수인족의 무예는 인간이 익히기 힘들지 않나요?”
몸을 푸는 것부터가 달랐다. 수인족의 어린아이들이 놀던 모습을 떠올리면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움직임 자체가 달랐다. 이곳 인간 아이들을 본 적 없지만, 수인족처럼 움직이진 않을 거다.
그러나 노아는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한 건 아니다. 흔하진 않지만, 과거에도 몇 번인가 있었다. 그리고 수인들의 손에 키워진 인간의 영웅도 있었다.”
그리 말한 노아가 강현을 바라보았다.
“너도 그리될 수 있다.”
“...”
아니, 그렇게 되고 싶진 않다.
영웅이 되어서 뭘 하겠는가.
“아무래도 전 그런 쪽으로 재능이···.”
“있다.”
“예?”
“재능은 의지로 얼마든지 넘어설 수 있다.”
결국 재능이 없다는 거 아닌가? 그러나 강현은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번뜩이는 눈동자.
재능이 없다면 강제로라도 만들겠다는 눈빛이었다.
“그럼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하겠다.”
이미 점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예. 수고하셨어요.”
강현의 인사를 받은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다물었다.
머뭇거리는 모습.
평소의 노아와 달랐다. 고민하던 노아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수련은 어땠지?”
“...예? 아, 유용한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힘든 걸 떠나서 몸이 좋아진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노아는 강현의 대답에 눈살을 찌푸렸다.
원하는 대답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검술은 어땠나?”
그제야 강현이 탄성을 뱉었다. 노아가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경쟁심인가.’
란돌프 역시 노아를 봤을 때, 호승심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맹약 때문에 싸울 수가 없었다.
그걸 이런 식으로 풀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이었다. 실제로 목검을 잡아본 적도 없었다.
그러한 강현의 대답에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정도로는 알기 힘든가.”
“예?”
“아니다. 잠시 기다려라.”
그리 말한 노아가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나타난 노아의 손에는 벌거벗은 새 한 마리가 들려있었다.
강현에게도 익숙한 녀석. 고기를 좋아하는 설기조차 새를 보자 고개를 돌려버렸다.
“근육을 회복하는 데는 이 녀석이 제일이다. 먹도록.”
노아는 새를 내려놓고 떠나갔다.
강현은 덩그러니 놓인 새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새로 잡아 온 게 아니었다. 훈련이 끝나고 주려고 미리 손질해놓은 것이었다.
“또 만났네···.”
먹기도 전부터 누린내가 올라오는 듯했다.
노아가 건네주고 간 것은 전에 란돌프와 사냥했던 뜀새였다.
강현은 왠지 이 녀석을 자주 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 *
휴일이 끝나고 다시 영업일이 다가왔다.
‘...아니, 휴일이라고 할 수 없나?’
평소보다 더 고됐다. 애당초 강현은 요리를 힘들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최근 몇 년을 제외하면 말이지.’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요리하는 게 즐거웠다.
“좋아.”
각오를 다진 강현이 냉장고에서 재료들을 꺼냈다.
미리 손질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채소를 썰던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칼을 갈았었나?”
평소보다 날카롭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칼을 갈았던 기억은 없었다.
칼날로 손톱 위에 올렸다. 날카로움을 확인하는 방법.
‘간 건 아닌데?’
이제 슬슬 갈아야 했다.
강현은 곧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체력만 좋아진 게 아니네.”
칼이 가볍다. 칼뿐만이 아니라 몸도 가벼웠다.
검은 배운 적도 없었지만 이렇게 체력과 유연성이 길러진 것만으로도 변화가 생겼다.
“좋은, 일이지?”
강현의 물음에 홀에 있던 설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피식, 웃은 강현은 식자재를 마저 손질했다.
그리고 강현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단순히 체력과 힘만 늘어난 게 아니었다.
몸을 쓰는 감각 역시 조금씩 깨어나고 있던 것이었다.
강현이 원한 건 아니었으나 일종의 기연이나 다름이 없었다.
덕분에 평소보다 일찍 작업이 끝날 수 있었다.
그렇게 매장을 열자 첫 손님이 방문했다.
아니, 손님들.
딸랑딸랑.
매장 안으로 들어오는 이들을 보며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 일로 같이 오셨어요?”
“어, 이리 오는 길에 만났어.”
“이야기가 잘 통하더군.”
녹색 새마을 모자를 눌러쓴 이장과 멋들어진 베레모를 쓴 정기훈 작가였다.
서로 안 어울릴 것 같은 조합이었다.
‘그러고 보니 연배가 비슷하겠네.’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기훈 작가 역시 매장의 단골손님이었다.
마을을 오가면서 안면을 익힌 것이었다.
둘은 걸어가더니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난 전에 먹었던 조개 파스타.”
“봉골레 맞으시죠?”
“그래, 그거랑 막걸리도 줘.”
이장의 말에 정기훈 작가의 눈이 커졌다.
“여기에서 막걸리도 파는 건가?”
“예.”
강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걸리뿐만 아니라 소주나 맥주도 있었다.
이 동네에서 유일한 음식점이었다.
가끔 술을 마시러 오는 경우도 있었다.
정기훈 작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턱을 긁적였다.
“뽀모도로. 그리고 레드 와인 한 잔 줄 수 있겠나?”
정기훈 작가의 말에 강현 역시 놀랐다.
“작가님께서 술을 찾으시다니 드문 일이네요.”
자주 왔었지만, 한 번도 술을 주문한 적은 없었다.
“이런 날에는 한 잔 정도 마셔도 나쁘지 않지.”
이장을 보며 장기훈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장이 맞장구를 쳤다.
“그럼! 새로운 친구가 생겼으면 축배를 들어야지.”
그런 둘을 보며 강현이 미소 지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해드릴게요.”
주방으로 들어가 파스타 두 개를 만들었다. 둘 다 어렵지 않은 파스타라 금방 나왔다.
파스타가 나왔을 때, 이미 둘은 술을 한 잔씩 걸치고 있었다.
“주문하신 봉골레와 뽀모도르 파스타 나왔습니다.”
“고맙네.”
고개를 끄덕이는 정기훈 작가. 그러나 이장에게서는 대꾸가 없었다.
술 마시다 말고 한 곳을 바라보는 이장.
이장의 시선 끝에는 길게 하품하고 있는 설기가 있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어제 이상한 걸 봐서.”
“예?”
강현이 의아해하자 이장이 덥수룩한 수염을 긁적였다.
“어제 들어가는데 설기, 쟤를 본 것 같어.”
“산책이라도 하고 있었겠지.”
정기훈 작가였다. 강현이 요리하는 동안 더 친해졌는지 말투가 바뀌었다.
“근데 이상한 게, 쟤가 동네 개들을 세워놓고 있더라고.”
“...”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마치, 분대장이 분대원들 기합주는 듯이 말이여. 참으로 신기해서 꿈인가 싶었지.”
이장의 말에 강현의 몸이 굳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는 강현.
뒷발로 털을 긁고 있는 설기가 강현과 눈이 마주치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번 이후로 자주 나가더니 그런 짓을 하고 있었구나.’
농사일을 도와주고 난 뒤로 혼자서 나갔다 오는 일이 잦아졌다.
동네 개들의 기강을 잡고 있던 것이었다.
“저 조그마한 녀석이 그럴 리가 있나. 그때, 술이라도 한 거 아닌가?”
정기훈 작가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이장도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어제도 많이 마셨으니. 그리고 이 동네에 사나운 개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장의 시선이 곧 강현에게 향했다.
“하여튼 그 짝도 조심해. 저기 순자 할머니네 개도 얼마 전에 혼자 나갔다가 삵한테 물려서 털이 다 빠졌어. 괜히 혼자 다니게 하지 마. 이 근방에 야생동물이 많어.”
이장의 말에 강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설기를 걱정할 게 아니라 야생동물을 걱정해야 했다.
‘한 번 주의 줘야겠네.’
이장이라서 그냥 넘어갔지, 다른 이들이 봤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었다.
해맑게 웃고 있는 설기를 보며 강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 이장과 장기훈 작가는 다시 술자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거기서 여기까지 다닌다고? 뭣 하러 그려. 저기 빈 집 있으니 이사 와.”
“그럴까? 하핫.”
즐거운 듯이 웃음을 토하는 정기훈 작가. 의외의 모습이었다.
기분이 좋아졌는지 코끝이 붉었다.
“마음에 드는 친구가 생겼어. 다음에 내가 그림을 선물해주지.”
“됐어.”
단칼에 거절하는 이장의 모습이 정기훈 작가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이장이 입을 열었다.
“누가 그 짝 그림 잘 그린다는 걸 모르나?”
벽을 가리켰다. 정기훈 작가가 선물해준 그림.
“우리 집에는 어울리지도 않어. 그림도 사람들이 봐줘야 의미가 있지. 늙은이의 집에 놔두면 뭐혀. 그림 말고 술이나 사.”
정기훈 작가의 눈이 커졌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요즘은 재테크로 사놓는 이들도 많았다.
오로지 개인 소장.
“그렇지···. 봐줘야 의미가 있지. 좋아. 그럼 이럴 게 아니라 오늘 한 잔 내지.”
“그럴까?”
의기투합해서 술을 마시는 둘.
강현의 매장에서 멈추지 않고 이차를 하기 위해 읍내까지 나갔다.
강현은 그런 둘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