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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없지 않았나?
다음날도 지친 몸을 이끌고 농사를 도왔다.
윤섭은 이미 적응이 끝나서 마을 여인네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누님들! 다음에 또 놀러 올게요!”
“그래, 조심히 올라가!”
일을 끝낸 윤섭은 배웅받으며 강현네로 향했다.
누가 보면 며칠은 있었던 것처럼 정겨워 보였다. 떠나는 건 내일이었지만, 오늘 저녁은 강현과 둘이 보낼 것이기에 미리 인사를 나눈 것이었다.
기다시피 집에 도착한 윤섭은 바닥에 드러누웠다.
“정말 죽겠다.”
그래도 흙 위에 눕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발전이었다.
설기가 그런 윤섭의 곁에 앉았다. 이틀 동안 제법 정이 든 것이었다.
그런 설기를 본 윤섭의 눈이 반짝였다.
슬그머니 뻗는 손. 하지만 낌새를 눈치챈 설기가 재빨리 피했다.
“...곁은 허락해도 손까지는 아니란 거냐? 너도 참 어려운 남자구나.”
흥, 하고 도도하게 걸어가는 설기.
그 모습을 본 윤섭이 실소를 흘렸다.
“그래도 형은 일찍 친해진 거야.”
마침, 씻고 나오던 강현이 말했다.
이장조차 설기가 옆에 앉을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물론, 먹을 것을 들고 있으면 이야기가 달랐지만.’
그건 그 사람 옆이 아니라 먹을 걸 기다리는 것이라 예외였다. 강현의 말에 윤섭이 입꼬리를 올렸다.
“다음에는 꼭 만져주겠어.”
각오를 다지며 웃음을 흘리는 윤섭.
강현은 힐끗 윤섭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설기가 늑대가 아니었다면 경찰에게 잡혀가도, 할 말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보다 뭐 먹을 건지 생각해봤어?”
“잠발라야.”
강현의 물음에 윤섭이 즉답했다. 그러한 윤섭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잠발라야? 그걸로 되겠어?”
고기, 해산물, 채소 등 다양한 재료를 넣은 미국 남부의 쌀 요리였다.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요리. 미국의 길거리 대표 음식 중 하나이기도 했다.
훌륭한 음식이긴 하지만 오늘 같은 날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강현의 물음에 윤섭이 눈을 치켜떴다.
“그걸로라니. 우리의 추억이 담긴 요리잖아.”
추억. 그 말에 강현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는 탄성을 뱉었다.
‘...내가 처음 해준 요리구나.’
윤섭의 집에 놀러 갔을 때, 있는 재료가 몇 없어서 간단하게 만들었던 요리였다.
강현이 물끄러미 윤섭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윤섭이 씩, 웃었다.
“왜? 감동이냐?”
“...아니, 별걸 다 기억한다 싶어서.”
강현은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그거랑 피자도 해줄게.”
“오, 좋지. 치즈 듬뿍 넣어야 한다?”
피식 웃은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발을 신었다.
그걸 본 윤섭이 의아해했다.
“내려가게? 여기서 할 수 있잖아?”
“기왕 왔으니 제대로 먹어야지.”
집에도 오븐이 있지만, 매장용 오븐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불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장의 화력을 따올 순 없었다.
강현도 어제와 달리 오늘은 피곤했지만, 그렇다고 대충할 수는 없었다.
“금방 해올 테니 씻고 있어.”
강현은 그리 말하고 주방으로 내려갔다.
* * *
잠발라야는 흔히 두 가지로 구분된다.
토마토를 넣은 크리올식 레드 잠발라야.
루를 넣어 만든 케이준식 브라운 잠발라야.
강현이 만들 것은 레드 잠발라야였다.
먼저 새우를 손질하고 나온 머리와 껍질을 볶아줬다. 육수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붉게 색이 나오면 물을 넣고 십분 간 끓여준 후 불을 끈다.
그리고서 냄비에 버터를 두르고 소시지를 볶아줬다.
버터와 소시지의 고소한 향이 올라왔다. 소시지가 갈색으로 변하면 먹기 좋게 썬 닭고기를 넣어준다.
그리고 닭고기가 어느 정도 익으면 미리 불려놨던 쌀을 넣어준다.
이후 양파 셀러리, 피망 순으로 넣어주면서 천천히 익혀줬다.
시간이 지나자 산뜻한 셀러리의 향이 고기의 향과 섞이면서 변해갔다.
강현은 올라오는 향에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 위에 토마토소스와 다진 마늘, 우스터 소스 조금과 소금, 후추를 넣고 볶아주다가 아까 만들어놓은 육수를 부어준다.
미리 다듬어놓은 새우도 잊지 말고 넣어줬다.
그리고 뚜껑을 닫은 후 쌀이 익을 때까지 기다리면 되었다.
강현은 요리가 완성되길 기다리면서 피자를 만들었다.
토마토소스를 바르고 치즈와 함께 페퍼로니를 듬뿍 올렸다.
윤섭이 좋아하는 피자였다.
‘하와이안 피자도 좋아하긴 하는데.’
피자에 파인애플이라니. 미국에서 요리를 공부한 강현이었지만, 그것만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조금씩 퍼져가는 피자와 잠발라야 향을 맡으며 앉아있자 매장의 문이 열렸다.
“크으, 바로 이 냄새지. 그렇지?”
“컹!”
씻고 나온 윤섭이었다. 옆에는 설기도 함께였다.
흔들리는 설기의 꼬리.
“위에서 쉬라고 했잖아?”
“가지고 올라가려면 손이 필요하잖아.”
맞는 말이었다. 강현 혼자서는 옮기기 힘들었다.
윤섭은 설기와 함께 홀에 앉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븐의 알람이 울렸다.
피자를 꺼내는 강현.
이어서 잠발라야까지 완성이 되었다.
‘위로 가져가서 접시에 나누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강현은 그릇 세 개에 잠발라야를 나눴다.
하나는 다른 둘보다 양이 많았다. 설기의 몫이었다.
잠발라야와 피자를 들고 올라간 둘은 맥주를 땄다.
윤섭이 서울에서 가져온 브랜디가 있긴 했지만, 그걸 마셨다가는 둘 다 버티지 못할 거다.
잠발라야를 한 입 떠먹은 윤섭이 미소 지었다.
“제대로네. 내가 그때, 이걸 먹고 너 성공한다는 걸 알아봤잖아.”
잠발라야를 떠먹던 강현은 피식, 웃었다. 확실히 그런 말을 하긴 했었다.
당시에는 술주정인 줄 알았다.
그 뒤로도 둘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설기가 길게 하품하더니 강현의 침대 위로 올라갔다.
“쟤도 졸리나 보네.”
윤섭이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빈 접시들밖에 남지 않았다.
윤섭은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새로 꺼내더니 강현에게 건넸다.
치익, 맥주 거품이 올라왔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뭘?”
강현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윤섭은 그런 강현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결국,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 없어.”
“올라오지 않겠다는 거야? 아니면 아직 모르겠다는 거야?”
서울행. 미각이 나으면 시골에 있을 이유도 없었다.
윤섭의 물음에 강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둘 다.”
지금으로서는 굳이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전처럼 피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이 생활이 마음에 든 것이었다. 이 생활을 포기하면서까지 서울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그런 강현을 본 윤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아쉽긴 하네···.”
서울에 같이 있지 않아서? 강현의 시선이 향하자 윤섭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 새끼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고 싶었거든.”
장난스러운 말투. 강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무슨 의미는, 걔들이 설치는 게 아니꼬워서 그렇지.”
그리 말한 윤섭이 맥주를 홀짝였다.
그리 말했으나 사실은 강현의 재능이 아깝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윤섭은 강현의 선택을 존중했다.
위에서 치열하게 살기보다는 이렇게 인간적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강현의 표정이 그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윤섭이 맥주캔을 들어 올렸다.
“자, 강현의 성공적인 시골 라이프를 기념하여.”
강현 역시 웃으며 맥주를 들어 올렸다.
* * *
윤섭이 떠나고 며칠이 흘렀다. 마을은 장마가 끝나자마자 본격적인 폭염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세계의 숲은 아직도 선선했다.
그리고 강현은 오늘도 이세계의 숲을 달렸다.
헉, 헉, 헉.
멈춰선 강현이 나무에 기대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제는 주저앉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 강현의 주변을 술래잡기하듯 빙그르르 도는 설기와 모나.
여전히 기운이 넘쳤다.
“이제 슬슬 다음으로 넘어가도 되겠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강현이 고개를 돌렸다.
돌아보자 란돌프가 흐뭇한 표정으로 강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강현이 의아해하자 란돌프는 구석을 턱짓했다. 란돌프를 따라 시선을 돌린 강현이 탄성을 뱉었다.
펼쳐놓은 텐트 옆에 가지런히 놓인 목검.
이제는 강현의 지팡이나 다름이 없는 검이었다.
할아버지 댁에 놔두고 있다가 올 때마다 챙겨왔다.
“생각보다 체력이 빨리 올라왔어. 다 자네가 성실한 덕분이야.”
만날 때마다 체력이 늘어난 게 보였다. 매일 노력하지 않으면 힘든 일이었다.
강현은 란돌프가 건네준 목검을 들었다.
‘...드디어.’
목검을 받은 지 한 달이 넘었다. 이제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것이었다.
스르릉.
란돌프가 검을 뽑더니 강현의 옆에 섰다.
“일단 파지법부터 설명하지. 이런 식으로···.”
말을 이어가던 란돌프가 입을 다물었다.
란돌프뿐만이 아니었다. 한쪽에서 뒤엉켜 놀던 설기와 모나도 멈췄다.
의아해하던 강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수풀이 흔들리더니 그림자 하나가 떨어졌다.
이제는 익숙한 얼굴.
노아였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랐다. 무뚝뚝한 표정은 같았으나 눈빛은 사나웠다.
노아뿐만이 아니었다.
란돌프 역시 굳은 얼굴로 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 모나와 설기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긴장감에 강현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 있자 설기와 모나가 슬그머니 강현의 곁으로 붙었다.
“수인족 전사군.”
“인간인가?”
서로의 목소리가 겹쳤다. 서로를 살피는 시선.
곧 둘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서로의 수준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제법이야.”
“...인간 중에도 이런 전사가 남아있었나?”
강현은 그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둘의 대화가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아니, 대화라고 부를 수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뒤늦게 란돌프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입 모양도 미묘하게 틀렸다.
‘통역 아티펙트.’
강현을 처음 봤을 때, 그리 말했다.
곧 노아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정확히는 강현이 들고 있는 목검.
“검을, 배우는 건가?”
“아, 예.”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노아가 미간을 모았다.
그때, 란돌프가 검을 어깨에 걸치며 입을 열었다.
“검술은 우리 인간이 제일이지.”
말은 통하지 않지만, 분위기로 알아챈 것이었다. 그건 노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 강현과 란돌프를 돌아보더니 모나를 향해 손짓했다.
모나가 후다닥 달려가더니 노아의 머리 위로 올라탔다.
평소와 다르게 얌전한 모습. 모나 역시 이곳에 흐르는 긴장감을 알기 때문이었다.
“강현, 또 보지.”
강현을 힐끗거리고 사라지는 노아.
노아의 인사가 이제까지와 다르게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노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란돌프가 입을 열었다.
“뛰어난 전사야. 수인만 아니었다면 한번 붙어보고 싶군.”
란돌프의 말에 강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말뿐이 아니라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강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였다. 강현은 슬쩍 목검을 들어 올렸다.
“어떻게 할까요?”
강현의 물음에 란돌프가 고개를 저었다.
“수련은 다음에 하지.”
강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목검을 나무 옆에 세웠다. 이미 수련할 분위기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검을 집어넣은 란돌프가 강현을 돌아보았다.
“아까 부탁이라던 게 저 수인들과 연관되어있는 거지?”
식사가 끝날 때 강현이 꺼냈던 말이었다. 훈련이 끝나면 부탁드릴 게 있다고.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에 한번 가보고 싶어요.”
인간들의 마을.
강현의 말에 란돌프의 눈이 커졌다.
“나야 물론 환영이네. 그런데 전에 말했을 때는 관심 없지 않았나?”
강현은 쓴웃음을 흘렸다. 과거에는 그랬었다. 수인과는 달랐다.
이세계의 인간들이라면 강현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걸 눈치챌 거다.
그렇기에 란돌프도 더 권유하지 않았다.
강현은 의아해하는 란돌프를 보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