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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됐네.
그렇게 매장을 둘러보던 윤섭이 곧 무언가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건 뭐야?”
벽 쪽에 걸린 그림.
평화로운 해안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강현의 성격을 생각하면 직접 샀을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윤섭의 예상이 맞았다.
벽에 걸린 그림은 며칠 전 정기훈 작가가 선물로 주고 간 것이었다.
아말피의 해변.
‘대충 그렸다고 부담가지지 말라고는 했지만···.’
그래서 낙관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무려 정기훈 작가의 추억이 담긴 그림이었다.
“얼마 전에 선물 받았어.”
“선물?”
진지한 눈빛으로 그림을 살핀 윤섭이 탄성을 뱉었다.
“야, 그 사람 나 좀 소개해줘.”
강현이 쳐다보자 윤섭이 놀란 눈으로 입을 열었다.
“넌 모르겠지만, 대단한 실력이야. 곧 유명해질걸? 미리 친분 좀 쌓자.”
윤섭의 말에 강현은 실소를 흘렸다. 누가 줬는지 알아도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미 충분히 유명한 사람이었다. 거기서 더 유명해지긴 쉽지 않았다.
강현은 대꾸하지 않고 미리 준비해놓은 종이를 꺼냈다.
곧 윤섭 역시 강현이 들고 있는 종이에 관심을 가졌다.
“이번 주 화요일, 수요일 쉽니다?”
마을 사람들과 단골들에게는 알리긴 했지만, 혹시 몰라서 적은 것이었다.
종이를 본 윤섭이 입을 막았다.
“너···.”
울컥한 윤섭이 고개를 저었다.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전이었다면 일할 테니 알아서 놀라고 했을 텐데···.”
지금도 같은 생각이었다. 만일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알아서 놀게 놔뒀을 거다. 오히려 매장 일 방해하지 말라고 경고했겠지.
“못 보던 사이에 어른이 되었구나! 이게 부모의 마음이란 건가?”
“...”
강현은 울먹이는 윤섭을 무시했다.
어차피 내일이 되면 풀릴 오해였다.
‘...모르는 게 약이란 말도 있으니.’
적어도 오늘은 기뻐하게 놔두자. 강현은 그리 생각했다.
* * *
아침이 되자 강현은 자는 윤섭을 깨웠다.
“끄응, 무슨 일이야? 오늘 매장도 안 한다며?”
어제 늦게까지 술을 마신 윤섭이 피곤한 표정으로 강현을 돌아보았다.
“갈 곳이 있어.”
“갈 곳?”
졸려서 눈살을 찌푸리던 윤섭의 눈이 번쩍 뜨였다.
“휴무만 뺀 게 아니라 계획까지 세웠구나!”
“...비슷해.”
강현의 대꾸에 윤섭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기지개를 켰다.
그런 윤섭의 옆에 설기도 같이 기지개를 켜는 게 보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있을 순 없지. 빨리 씻고 나올게!”
강현은 씻으러 들어간 윤섭을 보며 주방으로 향했다.
아침밥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씻고 나온 윤섭은 거실에 놓인 음식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침부터 너무 과한 거 아니야?”
아침부터 일하려면 든든하게 먹어야 했다. 강현은 대꾸하지 않고 숟가락을 떴다.
윤섭을 위해서 일부러 한식으로 준비한 것이었다.
북엇국을 떠먹은 윤섭이 감탄했다.
“크으, 속이 풀리네.”
그렇게 식사를 이어가던 윤섭의 숟가락이 어느 순간 멈췄다.
“...뭔가 이상해.”
“뭐가?”
“내가 아는 강현은 이렇게 친절할 리가 없어.”
술이 깨면서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강현은 꾹, 입을 다물었다.
“어제부터 잔소리도 안 하고 너무 친절하잖아.”
“...”
“혹시 병이라도 생긴 거야? 왜 그렇잖아. 죽을 때가 되면···.”
강현의 눈초리가 사납게 변했다. 그러자 윤섭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래서 좋다고.”
다시 밥을 먹는 윤섭. 그러나 마음 한쪽이 찜찜했다.
“...난 왜 도살장에 끌려가기 전의 마지막 만찬처럼 느껴지지?”
작은 중얼거림. 맛있게만 느껴지던 밥이 점점 껄끄럽게 변했다.
‘역시 감이 좋네.’
윤섭을 힐끗거린 강현은 묵묵히 밥을 떠먹었다.
* * *
식사를 마친 둘은 설기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산책하듯 마을을 걷는 셋.
마을을 지나치자 밭과 논이 보였다.
이른 아침이었으나 벌써 일을 시작했는지 기계 소리가 시끄러웠다.
기이이이이이잉.
모를 심는 이앙기였다. 논의 끝에는 사람들이 모판을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설마, 아니지?”
뒤에서 윤섭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자신의 운명을 짐작한 것이었다. 곧 사람들 사이에 있던 이장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이쪽이야, 이쪽!”
그것이 결정적이었다. 윤섭이 강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줘. 내가 오해하는 거라고.”
“...”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결국, 윤섭의 고개가 떨어졌다.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배신감에 치를 떠는 윤섭을 무시하고 걸어가자 사람들이 강현을 반갑게 맞이했다.
“왔어?”
“어서 와. 도와준다니 고맙네.”
“아닙니다. 같은 주민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죠.”
훈훈한 분위기. 울상을 짓고 있는 윤섭만 빼고는 모두 화기애애했다.
그때, 이장이 뒤따라오는 윤섭을 보고 눈을 빛냈다.
“이 친구가 그 친구지?”
“예. 제 친한 형입니다.”
땅바닥을 보고 있던 윤섭의 고개가 올라왔다.
“...친한?”
작은 중얼거림.
강현은 몰래 실소를 흘렸다. 참으로 알기 쉬운 형이었다.
“동생 부탁에 여기까지 오다니 참으로 좋은 형이여.”
“예. 이런 형이 없죠.”
강현의 말에 윤섭이 헛기침했다. 그리고는 자세를 바로 하더니 이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의리가 좀 있죠. 강현의 가장 친한 형인 윤섭입니다.”
가장 친한이란 말에 힘을 주는 윤섭이었다.
“아주 훌륭한 형이구먼.”
이장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강현과 윤섭을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야겠어. 그렇게 입으면 다 버려.”
윤섭은 어제와 같은 하와이안 셔츠였고, 강현은 편한 운동복 차림이었으나 이장의 기준에는 맞지 않아 보였다.
“어이, 민씨! 혹시 작업복 할만한 게 있으면 두 벌만 줘.”
이장의 외침에 중년인 하나가 어디론가 향했다.
* * *
옷을 갈아입은 둘은 감자밭으로 향했다.
모내기는 합이 중요하니 다른 일을 맡긴 것이었다.
화려한 꽃무늬가 그려진 몸빼바지에 내복처럼 생긴 티.
그리고 챙이 넓고 햇빛을 가리는 천이 달린 모자까지.
둘은 누가 봐도 농부의 모습이었다.
쪼그려 앉아서 감자를 캐던 윤섭이 혀를 찼다.
“설마, 내가 이런 걸 입을 줄이야.”
“형이 입던 티랑 비슷하잖아.”
“얌마, 무슨 막말을. 너 그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아니, 잠깐만···.”
윤섭이 제 바지를 유심히 살폈다.
“...이것도 나름 힙한데?”
그런 윤섭의 말에 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강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저래서 어떻게 연예인 매니저를 하는 거지?’
아니, 저렇기에 연예계에서 일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아까 실망하던 것과 달리 윤섭은 금세 적응하고 있었다.
캔 감자 바구니를 든 윤섭이 근처에 있던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누님, 얘는 저기다 놓으면 되죠?”
“누님? 예, 예.”
감자 캐던 중년인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님이라고 불리기에는 나이 차가 좀 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여인들도 웃음을 터트렸다.
“서울에서 와서 그런지 넉살도 좋네.”
“에이, 강현이네 동네 사람이면 남도 아니죠. 안 그렇습니까, 누님들?”
“맞네, 맞아.”
경이로운 친화력. 강현은 피식 웃고는 감자를 캐는 일에 집중했다.
* * *
날이 저물어갈 때쯤, 일이 끝났다.
그리고 일이 끝나자마자 윤섭은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다른 이들은 짐을 정리해서 마을로 돌아갔으나 윤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쉬고 있자 설기가 강현의 옆으로 다가왔다.
강현에게 다가온 설기의 몸에는 나뭇잎과 흙이 묻어있었다.
강현이 일하는 동안 지루한지 산을 한 바퀴 돌고 온 것이었다.
강현은 설기의 몸을 털어주면서 윤섭을 바라보았다.
“일어나. 가서 씻어야지.”
“아니. 난 이미 틀렸어. 가려거든 나를 버리고 가.”
윤섭은 진심이란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눈까지 감았다.
그러한 윤섭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 먼저 갈게. 이따 봐.”
강현의 담담한 말투에 윤섭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리고는 강현을 노려보았다.
농담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매정한 놈! 그보다 넌 지치지도 않아?”
윤섭의 물음에 강현은 몸 상태를 확인했다.
지치긴 했어도 윤섭만큼 힘들진 않았다.
‘운동이 효과가 있나 보네.’
전이였다면 반대였을 거다. 그만큼 체력이 늘어난 것이었다.
강현을 노려보던 윤섭은 몸을 드러누웠다.
“아, 몰라. 진짜 꼼짝도 못 하겠으니 가버리든 맘대로 해.”
그러나 강현은 그런 윤섭을 보고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너무 늦지는 마. 오늘 고생했다고 마을에서 음식 대접해준다고 했으니깐.”
“...음식?”
윤섭의 몸이 움찔 떨렸다.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입을 열었다.
“고기.”
“끄응.”
앓는 소리를 낸 윤섭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런 자리에는 내가 늦을 순 없지.”
그리고는 강현의 어깨에 팔꿈치를 올렸다. 눈살을 찌푸린 강현이 팔꿈치를 치우려고 했지만, 후들거리는 윤섭의 다리를 보고는 다시 손을 내려놨다.
엄살이 아니라 진짜로 힘들어 보였다.
* * *
씻고 이장의 집에 모여서 고기를 구웠다.
가벼운 술자리. 내일도 아침 일찍부터 일해야 하기에 다들 반주 정도로만 걸쳤다.
그렇게 식사를 끝내고 들어오니 어느새 달이 떠 있었다.
“아구구, 죽겠다.”
앓는 소리를 하며 몸을 눕는 윤섭. 강현 역시 침대 위에 누웠다.
원래 침대를 양보하려고 했으나 바닥이 익숙하다며 윤섭이 사양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걸 강현도 잘 알았다.
침대에 누운 강현 옆으로 설기가 파고들었다.
꼼지락꼼지락.
언제나처럼 설기와 장난을 치고 있자 윤섭이 불쑥, 입을 열었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네.”
“맞아.”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섭이 마을에 오는 것은 세 번째였지만, 마을 사람들과 어울린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네가 변한 이유를 알겠어.”
변했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었다.
윤섭은 깍지 낀 손을 뒤로 넘겼다.
“저 사람들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윤섭의 말에 강현은 입을 다물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배신.
그러나 여기에는 그럴 걱정이 없었다.
“이 형도 안심하고 갈 수 있겠어.”
윤섭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그런 윤섭을 빤히 쳐다보던 강현이 입을 열었다.
“어딜 가? 내일도 일이 많아.”
마늘밭이랑 양파밭도 해야 했다.
그러한 강현의 말에 윤섭이 들켰다는 듯이 혀를 찼다.
피식 웃은 강현이 고개를 돌려 천장을 봤다.
“내일은 맛있는 거 해줄게.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말해줘.”
“응?”
윤섭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강현이 음식을 해줄 때는 많았지만, 저렇게 윤섭의 의사를 묻는 일은 드물었다.
특히나 그 일이 있고 나서는 한 번도 없었다.
윤섭은 강현의 말에서 전에 없었던 자신감을 읽었다.
“너, 설마···.”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돌아왔어.”
“대체 언제?!”
“며칠 됐어.”
강현의 말에 윤섭이 눈살을 찌푸렸다.
“야! 그런 일이 있으면 바로 형한테 말해야지!”
섭섭하다는 듯이 말한 윤섭. 곧 눈을 번뜩였다.
“이럴 게 아니라 축배를 들어야지. 이대로 잘 수는···. 윽.”
몸을 일으키려던 윤섭이 신음을 뱉고는 다시 누웠다.
긴장이 풀린 탓에 통증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술까지 마셨으니 멀쩡할 리가 없었다.
“내일 마셔.”
어차피 시간은 많았다. 윤섭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강현을 향해 눈을 흘기고는 누웠다.
그리고 한참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정말, 잘됐네.”
“응.”
둘은 그렇게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