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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강현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미네스트로네를 드셔보라고 불렀습니다.”
“...미네스트로네를?”
“예. 작가님 이야기를 듣고 떠오른 게 있었습니다.”
강현의 말에 정기훈 작가가 실소를 흘렸다.
“난 또 무슨 부탁이라고···. 긴장했던 내가 바보 같구먼.”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정기훈 작가. 무슨 오해를 했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는 강현을 보며 웃었다.
“늙은이의 헛소리를 진지하게 들었다니 고맙군.”
그리 말하고는 테이블에 앉았다. 표정을 보니 큰 기대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럴 만도 했었다.
이미 서울뿐만 아니라 세계의 여러 레스토랑도 다녔다.
강현은 주방으로 들어가서 수프를 가지고 나왔다.
이미 정기훈 작가가 올 줄 알고 준비해놨기에 금방 나올 수 있었다.
테이블에 놓인 미네스트로네.
그러나 어제와는 달랐다.
정기훈 작가는 눈앞에 놓인 미네스트로네를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어제보다 탁한 색. 심지어 거품도 보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정기훈 작가가 스푼을 들어 올렸다.
조심스레 입으로 가져간 정기훈 작가의 눈이 커졌다.
“음!”
미간을 찌푸리는 정기훈 작가. 강현으로서는 어떠한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입안에 든 수프를 다 삼켰을 때, 강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달라. 하지만 비슷하군.”
다시 한 입 떠먹은 정기훈 작가가 눈을 감았다.
입안 가득 퍼져가는 바다의 맛은 과거의 아말피를 떠오르게 했다.
강현은 그런 정기훈 작가를 방해하지 않도록 뒤로 물러났다.
정기훈 작가는 그렇게 한참을 먹었다.
어제와 달리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
강현이 다시 한번 물었다.
“입맛에는 맞으셨습니까?”
“비려.”
확답이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흔드는 정기훈 작가. 그러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 이런 맛이었지. 지금 이런 요리를 먹었다면 당장에 내다 버렸을 거야.”
정기훈 작가는 과거를 추억하듯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정기훈 작가의 입이 열렸다.
“...대체 어떻게 만든 건가?”
“싸구려 야채는 아닙니다.”
강현의 대꾸에 정기훈 작가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곧 실소를 흘렸다.
“그건 나도 안다네.”
맛있다고는 할 순 없지만, 나쁜 재료를 쓴 건 아니었다.
아말피의 식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알고 있었지만, 그때의 기분을 생각하면 좋은 말이 나갈 수가 없었다.
“어제 작가님의 말씀을 듣고 떠올렸습니다. 그쪽 동네라면 일반적인 고기가 비쌌을 겁니다.”
“...그렇지.”
정기훈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골 동네.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고기를 먹은 적이 손에 꼽았다.
게다가 정기훈 작가가 있던 시기를 생각하면 교통도 불편했을 거다.
“그래서 닭 육수가 아닌 해산물로 육수를 냈습니다.”
“...카츄코.”
정기훈 작가가 이름 하나를 뱉었다.
해산물로 만드는 토마토수프. 정기훈 작가가 머물렀던 마을에서도 흔한 음식이었다.
다양한 생선과 조개류를 푸짐하게 넣고 끓인 수프.
그러나 정기훈 작가가 고개를 저었다.
“카츄코도 이렇게 비리지 않아.”
맞는 말이었다. 오히려 해산물과 토마토가 어우러져 시원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정기훈 작가가 미네스트로네와 카츄코를 구분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다른 한 가지에 주목했습니다. 탁한 국물.”
“흐음.”
정기훈 작가가 흥미롭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그리고는 탁한 국물이 무엇과 연관이 있는지 골똘히 생각했다.
마치 문제를 내는 선생님과 답을 찾는 학생과도 같았다.
곧 정기훈 작가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군.”
“답은 조개였습니다.”
“조개?”
정기훈 작가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자신이 먹은 미네스트로네를 쳐다보았다.
조개가 있었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럴 만도 했다.
“예. 이 수프에는 조개를 갈아서 넣었습니다. 비린 맛은 그 때문이었죠.”
그냥 조개를 갈면 조개를 먹을 때보다 더 비렸다.
강현의 말에 정기훈 작가가 눈을 껌뻑였다.
“대체 왜···.”
그런 짓을.
조개를 갈면 더 비려진다는 걸 요리하는 이가 몰랐을 리가 없었다.
하물며 평생을 바닷가에서 산 이였다.
‘괴롭힌 건가?’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일부러 맛이 없게 하려고 했다면, 저런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정기훈 작가의 물음에 강현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글쎄요. 꿈을 가지고 타지까지 와서 고생하는 젊은 청년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
정기훈 작가의 눈이 떨려왔다.
강현이 말한 것의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가끔 들려서 미네스트로네를 먹는 청년. 영양 상태가 걱정되었을 거다.
그렇다고 다른 걸 넣어주면 청년의 자존심이 상할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잘 보이지 않게 조개를 갈아서 넣은 것이었다.
아마 조개만이 아닐 거다. 다른 것도 넣었겠지만, 조개의 맛에 가려진 것이었다.
정기훈 작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확실히. 그때의 내가 알았다면, 다시는 그 가게에 가지 않았을 거야.”
힘들었지만, 동정받고 싶진 않았다.
자존심과 오기. 그것만으로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었다.
정기훈 작가가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정기훈 작가가 강현을 돌아보았다.
한층 후련해진 모습.
“자네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한 거지?”
정기훈 작가의 물음에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어째서일까.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감정은···.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잖습니까. 그때의 좋은 기억이 고작 해변뿐이라면···.”
거기까지 말한 강현은 숨을 골랐다.
적당한 단어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걸 포장할 만한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다시 입을 열었다.
“저라면, 조금 슬플 것 같았습니다.”
강현의 물음에 정기훈 작가가 입을 다물었다.
조용히 눈을 감는 정기훈 작가. 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한참 있다가 그의 눈이 떠졌다.
“그래, 맞는 이야기지. 저들이 날 거부했던 게 아니라 내가 저들에게 섞이려 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어.”
적어도 한 사람.
젊은 정기훈 작가를 걱정하고 응원했던 이가 있었다.
그걸 안 것만으로도, 그 시절이 새롭게 느껴졌다.
냅킨으로 입을 닦은 정기훈 작가가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각오가 떠올라 있었다.
“가보시게요?”
“그렇다네. 더 늦기 전에 가봐야지.”
정기훈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숨을 내쉰 후 말을 이었다.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지만.”
너무 늦게 깨달았다.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코, 의미가 없진 않으리라.
정기훈 작가가 강현을 보며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아, 한 가지 자네가 틀린 게 있어.”
정기훈 작가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강현을 보며 정기훈 작가가 웃음을 흘렸다.
“그때, 먹었던 수프는 이 정도로 비리지 않았어. 아주 살짝이었네. 자네만큼 정이 넘치지 않았지.”
그렇게까지 조개를 넣지 않았단 소리였다.
강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 말한 정기훈 작가는 천천히 매장을 둘러보았다.
“...다시 보니 벽이 너무 횅하군.”
“예?”
너무 작아서 강현이 되묻자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그럼 다음에 또 오지.”
“예. 다음에는 제대로 만들어드릴게요.”
“아니야. 미네스트로네는 이제 질렸어. 다음에는 다른 걸 먹겠네.”
그와 함께 정기훈 작가가 매장을 나섰다.
그런 정기훈 작가를 배웅하기 위해 매장을 나선 강현은 멀리서 다가오는 차 하나를 볼 수 있었다.
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저가의 국내 차.
차가 정기훈 작가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나온 건 말끔하게 입은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이 나와서 뒷좌석에 문을 열어줬다.
익숙한 몸짓.
정기훈 작가는 강현을 향해 손을 흔들더니 뒷좌석이 올라갔다.
나온 중년인은 정기훈 작가의 운전기사였다.
강현은 떠나는 차를 보다가 실소를 흘렸다. 정기훈 작가가 돈이 없어서 저런 차를 타진 않을 거다.
눈에 띄지 않으려고 일부러 타는 것이었다.
아마도 별장 전용.
하지만.
“...저 차에 운전기사가 있는 게 더 눈에 띄지 않나?”
강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 * *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햇빛은 더욱 강렬해졌고 푹푹 찌는 날씨가 이어졌다.
설기 역시 더운지 혀를 길게 빼고 있을 때가 많아졌다.
“너도 날씨를 이기진 못하는구나.”
“컹?”
설기가 돌아보자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고개를 갸웃하는 설기.
강현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때, 설기의 귀가 쫑긋 솟았다.
돌아가는 시선.
강현은 설기가 무엇을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차 소리. 곧 90년대에나 다녔을 법한 주황색 올드카 한대가 강현의 매장 앞에 섰다.
‘저것도 오랜만에 보네.’
강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윤섭의 차였다. 윤섭이 매니저 일을 시작하면서 보이지 않길래 팔았다고 생각했다.
전부터 애지중지하던 윤섭의 보물이었다.
“형제여! 내가 왔도다!”
차 문이 열리고 윤섭이 나왔다.
알록달록한 하와이안 셔츠.
선글라스에 반바지까지. 말 그대로 피서객의 모습이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피어싱에 반지까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충격적인 모습에 숨을 삼켰던 강현이 곧 고개를 저었다.
‘...그래, 저런 형이었지.’
미국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저런 모습이었다.
공부도 잘하면서 놀기도 잘 놀았다. 강현과는 정반대의 성향.
창고에 놔뒀을 외제 차처럼 본성 역시 일하면서 감춰두고 있던 것이었다.
설기도 그런 윤섭의 모습이 신기한지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꺼낸 윤섭이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뭐, 이리 짐이 많아?”
강현은 윤섭이 끌고 온 캐리어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제주도로 바로 가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강현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제주도로 가려면 공항으로 가야 했다.
강현의 물음에 선글라스를 올린 윤섭이 씩, 웃었다.
“삼일이잖아. 이 정도는 챙겨야지. 찾아보니 이 근처에 계곡도 있더라고. 기왕 왔으니 발은 담그고 가야 하지 않겠어?”
기대감에 평소보다 목소리 톤이 높았다.
발만 담그는 게 아니라 물에 들어갈 생각으로 챙겨온 것이었다.
강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네.’
아마 그 계곡, 가지 못할 거다. 당연히 물에 들어갈 일도 없겠지.
‘아니, 젖긴 하겠네.’
땀으로. 강현은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매장 안으로 들어온 윤섭은 설기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요, 이 녀석 아직 있었구나. 설이였나?”
“설기.”
“그래, 설기. 미안, 미안.”
윤섭이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하자 휙, 피해버렸다.
오기가 생긴 윤섭이 다시 손을 뻗었지만 마찬가지였다.
몇 번을 시도하던 윤섭이 결국, 손을 들었다.
“주인 닮아서 참 까칠하네.”
강현의 눈빛이 차가워지자 윤섭이 입을 막았다.
“엇, 나도 모르게 본심이.”
“...”
강현은 그런 윤섭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로 한결같은 윤섭이었다. 평소였다면 쓴소리를 뱉었겠지만···.
‘...내일, 힘들 테니.’
이쯤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