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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늦게 불렀군.
훅, 훅.
차분하게 숨을 내뱉었다.
이른 아침, 강현은 마을 주변을 달리고 있었다.
지나가던 마을 사람이 그런 강현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젊은 총각이 부지런하네. 열심히 해!”
강현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런 강현을 대신하여 옆에 있던 설기가 짖었다.
“컹!”
그러자 마을 사람도 고개를 끄덕이며 제 갈 길을 갔다.
민호에게 리조또를 건네준 날부터 아침마다 뛰고 있었다.
란돌프의 가르침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뿐만은 아니지만.’
매장 앞으로 돌아온 강현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고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힘든 만큼 개운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뛰는 걸 강현보다 반기는 이가 있었다.
“컹! 컹!”
바로 설기였다.
흔들리는 꼬리와 반짝이는 눈동자. 이걸로 부족했는지 더 뛰자고 닦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더는, 힘들어.”
숨을 뱉으며 힘겹게 말했다.
일할 때 지장이 생긴다. 아니, 설기가 만족할 때까지 달렸다가는 제대로 걷지도 못할 거다.
그러자 설기는 아쉬운 기색으로 꼬리를 내렸다.
전날 조르던 것에 비하면 많은 발전이었다.
내일도 달릴 거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위로 올라가서 샤워하고 내려온 강현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아직 수인들의 마을에 가지고 갈 선물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냥을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활 같은 걸 사가야 하나? 강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강현의 눈에 매장 앞을 지나가는 이장이 보였다.
벌떡 일어난 강현이 매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장님!”
“어이쿠, 깜짝아.”
놀란 이장이 발을 헛디뎠다. 넘어질 뻔한 걸 겨우 버티고는 강현을 돌아보았다.
“아주 애 떨어지는 줄 알았네. 뭣이여?”
이장에 반응에 강현은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는 걸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여쭤볼 게 있어서요.”
“여쭤볼 거?”
이장이 눈을 껌뻑였다.
* * *
강현의 이야기를 들은 이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마을에 초대받았는데. 무슨 선물이 좋겠냐고?”
“예.”
강현의 대답에 이장은 답하지 않고 강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강현이 의아해하자 이장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딴 곳에서 오래? 떠날 거여?”
“아뇨.”
놀란 강현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생각해보면 이장의 물음은 당연하였다.
이 세상에서 마을에 초대받을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외국에라도 나가지 않으면 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대로 설명할 수도 없었다.
“예전에 어떤 분을 도와드린 적이 있는데 보답으로 마을 안내를 해주겠다고 하셨어요. 이번에 쉴 때 다녀오려고요.”
“...그려?”
강현의 설명에도 이장은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제가 가긴 어딜 가겠어요. 이제 막 적응했는데. 그리고 아직 하은이도 못 봤잖아요.”
하은이는 이번에 태어난 민호와 수진의 딸 이름이었다.
하은이의 이름이 나오자 이장도 의심의 시선을 거뒀다.
“그렇지?”
“예. 그럼요.”
그제야 이장은 턱을 긁적였다.
“마을 선물이라···. 술이 제일이지. 그리고는 특산품 정도?”
“특산품요?”
“그, 그려. 여기 특산품.”
강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런 강현의 반응에 이장이 당혹스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마을의 특산품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마을의 특산품이 뭐였죠?”
“그야. 그···.”
이장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 많지. 고추도 있고, 배추도 있고, 멜론도 있고, 그려. 메밀! 거기다가 저 위에는 한우도 키워. 한우 마을도 있잖어.”
대부분이 농가라면 팔만한 것들이었다. 그나마 한우가 특별하다면 특별했다.
평창 한우.
‘...하지만 마을과는 상관없지.’
강현이 어색하게 웃자 무언가를 떠올린 이장이 눈이 번뜩였다.
“그렇네. 자네잖어!”
“예?”
“우리 마을의 특산품은 자네 요리 아녀?”
“아니···.”
생각지도 못한 말에 강현이 굳자 이장이 강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어. 뭐든지 정성이지. 암, 그렇고 말고. 정성이 제일이여!”
그렇게 이장은 매장을 나섰다. 그리고 나서면서도 당부를 잊지 않았다.
“거기서 잘해준다고 해서 덜컥, 이사 간다고 하면 안 돼. 알겠지? 어?”
얼떨떨해하던 강현은 뒤늦게 눈을 껌뻑였다.
“...설마, 도망치신 건가?”
고개를 돌리자 설기가 귀엽게 고개를 갸웃했다.
뒤늦게 웃음을 흘린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덕분에 도움이 되었다.
“술이라···.”
그리고 그에 맞는 안주.
뭘 좋아하는지 알 수 없다면 강현이 가장 자신 있는 걸 하면 되었다.
* * *
마리아주.
결혼 혹은 약혼이란 의미였다. 양식에서는 주로 와인과 음식간의 조화.
비슷한 의미로 페어링이란 말도 쓰인다.
술과 음식의 페어링.
그만큼 요리를 만드는데 술은 중요한 위치였다.
실제로 코스 요리를 짤 때, 그에 맞는 와인을 찾을 때도 있지만, 반대로 와인을 메인으로 코스 요리를 구성할 때도 많았다.
‘그렇게 대단하게 할 건 아니지만.’
강현은 눈앞에 있는 술들을 보았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잔치가 끝나고 남은 술들이 매장 냉장고에 가득 있었다.
와인이라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많았다.
하지만.
‘그다지 끌리진 않아.’
이 마을의, 심지어 한국의 술도 아니었다.
강현은 그중 하나를 집었다.
막걸리.
이탈리안에서 마땅한 음식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굳이 이탈리안으로 할 필욘 없어.’
어차피 파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만들고 바로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한 번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이제 맛도 느껴지지 않던가.
막걸리도 마을의 특산품과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이 마을과 잘 어울리는 술로 막걸리만 한 게 없었다.
그렇게 막걸리를 꺼낸 강현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쉬는 날이 되었다.
평소와 같이 배낭을 멘 강현.
그러나 배낭 안은 전과 달랐다. 텐트나 침낭이 아니라 막걸리와 음식뿐이었다.
강현은 배낭에서 느껴지는 무게에 쓴웃음을 지었다.
텐트를 짊어졌을 때보다 무겁기 때문이 아니었다.
안에 들어있는 음식들 때문이었다.
“...부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이걸 만들고 나니 매장에서 냄새가 빠지지 않았다.
다음 주가 되어도 빠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만큼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었다.
“그럼, 가볼까?”
“컹!”
강현의 물음에 설기가 대답했다.
수인족 마을.
조금씩 설레오기 시작했다.
* * *
이세계로 건너온 강현은 조심스레 피리를 불었다.
부우우우.
낮게 울리는 피리 소리.
워낙 소리가 작아서 잘 들릴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다시 불어야 하나?’
고민하던 강현은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감도 점점 올라왔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반응이 없었다.
강현이 피리를 다시 입으로 가려가려고 할 때, 옆에 있던 설기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부스럭, 부스럭.
수풀이 흔들리더니 빼꼼, 하고 작은 얼굴이 나타났다.
모나였다.
강현과 설기를 확인하고 배시시 웃는 모나. 천진난만한 미소를 보니 강현도 안도할 수 있었다.
“...부른 건 다른 사람이지만.”
모나가 찾아왔다면 노아 역시 찾아올 수 있을 거다.
곧 모나와 설기의 눈이 마주쳤다.
‘또 싸우려나?’
그런 강현의 우려와 달리 모나는 설기를 노려보다가 강현에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
올려달라는 것이었다.
오늘은 싸울 기분이 아닌 것 같았다.
짧게 고민한 강현은 배낭을 내리고 모나를 목마에 태웠다.
어차피 노아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목마에 탄 모나가 환하게 웃었다.
“우랴! 우랴!”
신이 났는지 외치면서 강현의 머리를 두드리는 모나.
“...때리는 건 좋은데 침은 참아줘.”
점점 축축해져 가는 머리를 느끼며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강현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조그마한 발이 앞뒤로 움직였다.
옆에 있던 설기가 그런 모나를 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도도한 눈빛으로 배낭 옆에 앉았다.
배낭을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마치 애가 어른의 흉내를 내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지만 참았다.
‘또 토라질 수 있으니.’
최근에 자주 토라지기 때문이었다. 늑대도 사춘기가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목 위가 가벼워졌다.
의아해한 강현이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고통이 찾아왔다.
“으헉!”
머리가 뽑힌다!
억지로 고개를 돌리자 모나의 뒷덜미를 잡고 있는 노아가 보였다.
그리고 모나는 노아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강현의 머리카락을 붙잡은 것이었다.
얼마나 힘이 센지 목이 뽑히는 느낌이었다.
강현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 흘러나오려고 하자 노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모나.”
질책이 담긴 부름. 그제야 모나의 손에 힘이 빠져나갔다.
그렇게 모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강현은 제 머리를 매만졌다.
‘무, 무사하나?’
어쩐지 전보다 숱이 적게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모나를 어깨에 멘 노아가 강현을 돌아보았다.
“미안하군.”
“...아뇨. 괜찮습니다.”
모나의 손가락 사이에 검은 털 뭉치가 보였지만,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생각보다 늦게 불렀군. 마을에 다녀온 것인가?”
노아가 바닥에 놓인 배낭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예.”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강현을 보던 노아가 강현의 배낭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반대쪽 어깨에 걸쳤다.
‘대단하네.’
란돌프도 그렇고 이 세계 사람들은 모두 힘이 센 건가?
“가지.”
노아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노아를 뒤따랐다.
* * *
어색한 침묵.
강현과 노아는 말없이 걷고 있었다. 평소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던 노아였지만 오늘만은 땅 위를 걸었다.
강현과 보폭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긴 침묵이 지루한지 설기가 길게 하품했다.
뒤따라가던 강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다.
강현의 말에 노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알 수 없는 눈빛.
그리고는 다시 앞을 보았다.
“노아라고 불러라.”
“아, 전 이강현입니다. 강현이라고 불러주세요.”
“...알겠다.”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노아. 그런 노아를 향해 강현이 물었다.
“노아씨, 수인분들의 마을은 어떤가요?”
“...마을은 마을이다.”
그리 대꾸한 노아는 힐끗, 강현을 보더니 말을 이었다.
“나 역시 인간 마을을 본 적이 없으니 무엇이 다른지 모른다.”
노아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어떻다고 말해주려면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했다.
강현은 질문을 바꿨다.
“족장님은 어떤 분이시죠? 족장님께서 초대하셨다고 했는데 이유를 알고 계신 가요?”
강현의 물음에 노아의 걸음이 멈췄다.
눈살을 찌푸리는 노아. 강현은 자신이 불쾌한 질문을 했나 싶어서 걱정했지만, 아니었다.
대답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족장님은 뛰어난 전사이자 위대한 지도자이시지.”
뛰어난 전사이자 위대한 지도자.
그것만으로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노아의 시선이 자신의 어깨로 향했다.
“그리고 이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
강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럼···.”
강현이 입을 열려고 하자 노아가 다가왔다.
“여기부터는 빠르게 이동하지. 이 속도로 걷다가는 밤이 돼서야 도착할 거다.”
그리 말하고는 모나를 입에 물었다.
대롱대롱 매달린 모나. 그리고는 남은 손으로 강현의 허리를 잡았다.
화들짝 놀란 강현이 고개를 돌렸다.
“자, 잠깐···.”
그러나 강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강현이 알던 세상과 달랐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