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잘 전달하겠습니다.
가로등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지만, 사람들을 구분하기 힘들었다.
강현이 두리번두리번하고 있자 저 멀리에서 그림자 하나가 손을 들었다.
“이쪽이여! 이쪽!”
이장의 목소리. 강현은 이장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작은 돗자리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사람들.
박씨 할머니와 같이 차를 타고 갔던 아저씨였다.
가로등의 불빛 때문인지, 술 때문인지 셋 다 얼굴이 붉었다.
돗자리 가운데에는 전과 고기, 나물, 구운 오징어와 과자.
그리고 강현이 만든 피자와 파스타가 놓여 있었다. 급조한 모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푸짐했다.
둘은 반갑게 강현을 맞이해줬다.
“고생했네.”
“뭐 이리 많이 만들었어. 대충 만들고 나오지.”
퉁명스러운 박씨 할머니. 말과 달리 박씨 할머니는 이장을 밀고 강현과 설기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줬다.
“이 양반이? 말로 하지 왜 밀어?”
“고생하고 온 거, 안 보여? 편하게 놀았으면 알아서 빼줘야지.”
투덕거리기 시작한 둘을 보며 강현이 미소 지었다.
강현이 자리에 앉아 아저씨가 스테인리스 그릇을 건넸다. 곧 그릇에 막걸리가 한가득 차올랐다.
“감사합니다.”
강현은 막걸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 강현을 보던 이장이 불쑥 입을 열었다.
“보기 좋아.”
“예?”
뜬금없는 말에 강현이 의아해하자 이장이 씩, 웃었다.
“보기 좋다고. 처음에는 잔뜩 주눅이 든 것 같았는데, 오늘은 자신감이 넘쳐. 이제 마을에 적응한 모양이여.”
이장의 말에 강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다른 이유가 더 크긴 했으나 이장의 말도 틀린 게 아니었다.
점점 이 마을이 편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쑥스러워진 강현은 멋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음식은 괜찮으세요?”
“그 짝이 만들었잖아. 나한테 물으면 어찌혀?”
장난스러운 이장의 말에 박씨 할머니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박씨 할머니가 손을 올리자 이장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암, 맛있지. 다들 잘 먹고 있잖아.”
그 모습에 강현이 웃음을 흘렸다. 평소 의젓한 이장이었으나 박씨 할머니와 있을 때는 아이처럼 보였다.
두 분이 오랜 친구 사이여서 그렇다고 들었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이. 강현은 부럽게 느껴졌다.
손을 내린 박씨 할머니도 거들었다.
“다들 없어서 못 먹어. 이것도 이 양반 혼자 다 먹었잖아.”
박씨 할머니가 비어있는 접시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이장을 향해 눈을 흘겼다.
“언제는 미국 국수 안 좋아한다며?”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닌 가벼.”
그리고는 강현을 보며 웃었다.
“다 이 짝 실력이 좋아서 그런 거지.”
그런 둘을 보며 강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족하면 더 만들어올까요?”
그러자 둘이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충분혀, 충분혀.”
“맞아. 먹을 게 이렇게 많은데 그럴 필요 없어.”
둘의 만류에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말한 것처럼 남은 음식도 많았다.
이장이 고기 한 점을 집어서 설기를 향해 들었다.
힐끗, 고기를 확인한 설기가 관심 없다는 듯이 머리를 돌려보았다.
“허, 이놈이 웬일이래? 아직도 삐진 겨?”
“배불러서 그래요.”
강현의 말에 이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설기가 먹을 것을 거부하는 걸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럴 만도 했다.
‘파스타 세 접시에 피자 한 판을 다 먹었으니.’
아무리 설기라도 배가 부를 거다. 강현은 옆에 엎드린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때, 이장이 은근한 목소리로 강현을 불렀다.
“덕분에 마을이 활기차졌어. 아주 좋어. 곧 그 짝에게도 좋은 소식이 있을 거여.”
좋은 소식? 고개를 갸웃하는데 이장은 미소만 지을 뿐,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자, 그럼 배고픈 사람끼리 한잔 혀.”
이장이 술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렇게 밤이 깊어져 가고 있었다.
* * *
다음 날.
강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어제 대체 얼마나 마신 거지?’
이런 숙취는 오랜만이었다.
강현은 억지로 기억을 더듬었다. 취기가 오른 이장이 소주병에 숟가락을 꽂고 노래를 부르던 모습.
이장의 노랫소리에 맞춰 흥겹게 몸을 흔들던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
‘...그냥 잊자.’
기억해서 좋을 게 없었다. 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옆을 보니 배를 드러내고 자는 설기가 보였다.
어제 얼마나 먹었는지 배가 볼록했다.
강현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매장으로 내려갔다.
설기가 깰 때를 대비해서 문을 살짝 열어놨다.
그렇게 매장으로 내려온 강현이 냉장고를 열어보니 식자재가 텅텅 빈 게 보였다.
어제 신이 나서 너무 폭주해버렸다.
‘장을 봐야 하는데.’
강현은 힐끗,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곧 오픈 시간. 장을 보기에는 너무 늦었다.
“...오늘 하루 정도는 상관없겠지.”
어제의 상태를 떠올리면 마을 사람 대부분이 강현과 비슷한 상태이거나 좀 더 심할 거다.
이런 날에 외식을 나오진 않을 거다.
남은 식자재로 할 수 있는 메뉴만 팔면 되었다.
강현이 홀을 정리하고 있자 설기가 내려오는 게 보였다.
길게 하품을 하더니 강현의 곁으로 다가와서 몸을 비볐다.
설기 나름의 인사였다.
그리고는 홀 구석으로 걸어가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텔레비전의 앞. 주방이 잘 보이는 자리였다. 그곳이 바로 설기의 고정석이었다.
홀 정리가 끝나고 매장을 열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손님이 없었다.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던 강현은 곧 이상함을 깨달았다.
‘너무 안 오는데.’
마을 사람들뿐만이라면 이해가 가겠지만, 최근 옆 마을에서도 손님이 늘었다.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딸랑딸랑. 방울 소리와 함께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오셨다.
“어서 오세요.”
“혹시나 해서 왔는데 다행히 열었네.”
옆 마을에 사시는 아주머니였다. 강현의 매장에 몇 번이나 왔을 정도의 단골손님.
아주머니의 말에 강현이 의아해했다.
“혹시나라뇨?”
강현의 물음에 아주머니가 다 안다는 듯이 웃었다.
“어제 난리도 아니었다면서? 우리 마을까지 소문이 쫙 났어.”
강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했던가. 모든 것이 느리지만, 소문 하나만은 빠른 시골 동네다웠다.
“그래도 역시 젊으니 다르네. 위에 김씨 부부는 둘 다 술병이 나서 죽으려고 하던데. 에휴, 그 나이 먹고 뭐 하는지 몰라. 그것도 쌍으로. 참 천생연분이야.”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낸 아주머니가 혀를 찼다.
“안 그래도 거기 약 가져다주려고 들렸다가 혹시나 해서 와본 거야.”
“...”
강현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제의 상황을 생각하면 술병이 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아니, 김씨 부부만이 아닐 거다.
그리 말한 아주머니가 입을 열었다.
“크림 있지? 그걸로 하나 줘.”
“크림파스타는 지금 카르보나라밖에 안 되는데 괜찮으신가요?”
“괜찮아.”
아주머니가 손을 내저었다. 크림이라면 뭐든 상관없었다. 강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는 파스타를 먹고 나서도 한참을 떠들다 떠나갔다.
다시 조용해진 매장.
강현은 창문 너머로 한산한 마을을 보았다. 소문이 옆 마을까지 퍼졌다면 저녁 시간에도 한가할 거다.
“잘 된 건가?”
안 그래도 생각할 게 많았다.
먼저 수인들의 마을. 초대받았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었다.
‘선물이라도 준비해야지.’
그런데 수인들은 무엇을 좋아할까? 강현이 만난 수인이라고는 노아와 모나가 전부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란돌프씨한테 좀 물어볼걸.”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구석에 있던 설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강현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을 흔들어줬다.
다시 고개를 내리는 설기.
밥때가 지났지만, 어제 너무 많이 먹은 탓에 밥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강현이 턱을 괴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했지만 뚜렷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것부터 먼저 해결해야겠네.’
두 번째는 바로 수진이었다.
아이를 낳았으니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
“정석이라면 미역국이긴 한데···.”
이미 많이 먹기도 했을 테고, 굳이 강현이 아니어도 해줄 이들은 많았다.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미국이나 이탈리아에서는 산모에게 무엇을 해줬더라?
기억을 더듬어도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두 나라는 한국처럼 산후조리란 개념이 없었다.
굳이 한 가지를 꼽자면 야채수프 정도였다.
강현은 핸드폰을 꺼내서 산모에게 좋은 음식을 검색해보았다.
곧 무언가를 발견하고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좋겠네.’
강현이 작게 미소 지었다.
* * *
다음날.
일찍 장을 본 강현이 주방에 섰다.
끓는 물에 솔로 닦아낸 전복을 넣었다. 그리고 데친 전복을 꺼내서 내장과 이빨을 잘라준다.
이빨은 버리지만 내장은 한쪽으로 빼줬다.
여기서 주의할 부분은 내장과 같이 있는 모래주머니다. 그것까지 확실하게 제거해준 후 내장은 다시마 우린 물와 함께 갈아줬다.
냄비에 올리브오일을 두르고 다진 양파를 볶아줬다.
양파의 매운 향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이후 쌀을 넣고 같이 볶아준다.
쌀이 투명해지면 화이트와인을 살짝만.
와인의 향이 주방 가득히 퍼져나갔다.
알코올이 모두 날아갈 때까지 볶아준다. 그렇게 어느 정도 볶았다 싶으면 육수 한 국자.
그리고 다시 볶는 것의 반복.
천천히,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볶아준다.
그리고 어느 정도 쌀이 익기 시작하면 갈아 준 내장과 함께 버섯을 넣어준다.
이후 쌀이 완전히 익으면 크림을 넣고 졸여준다.
평소보다 간은 약하게.
그 사이 팬에 버터를 두르고 전복을 구워줬다. 한 번 삶은 것이기에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완성된 리조또를 도시락 용기에 담았다.
위에 구운 전복을 가지런히 올리고 파르메산 치즈와 파슬리 가루를 올려주고 뚜껑을 덮었다.
이 정도면 보양식으로 충분할 거다.
그렇게 도시락을 만든 강현은 서둘러서 민호네 집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민호는 아직 집에 있었다.
민호는 놀란 얼굴로 강현은 맞이했다.
“강현씨?”
그리고는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지난번에는 감사했습니다.”
“아뇨. 한 것도 없는데요.”
“아닙니다.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민호를 보며 강현은 민망해하며 웃었다. 그런 강현을 본 민호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 어쩐 일입니까?”
“수진씨한테 가시죠? 드시라고 가져왔어요. 전복리조또입니다.”
강현이 도시락을 건네자 민호의 눈이 커졌다.
“...이런 것까지.”
“저희, 친구잖아요.”
강현의 말에 잠시 놀란 민호가 곧 부드럽게 웃었다.
“그렇죠. 감사히 받겠습니다.”
도시락을 받아든 민호가 트럭 옆좌석에 실었다. 그런데 옆좌석에 있는 건 강현의 도시락뿐만이 아니었다.
보자기에 싸인 통부터 냄비까지, 다양했다.
놀랍게도 종류는 다양했으나 그것들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는 같았다.
강현의 시선에 민호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어제부터 마을 분들이 주신 겁니다.”
“...많네요.”
“예. 다들 고마우신 분들이죠.”
미역국. 저 정도의 양이라면 한 달 내내 먹어도 다 못 먹을 거다.
‘미역국을 안 하길 잘했네.’
강현은 자신의 판단을 칭찬했다. 저렇게 많으면 민호도 곤란할 거다.
“잘 전달하겠습니다. 수진이도 기뻐할 겁니다.”
민호는 그리 말하며 트럭에 올랐다. 강현은 민호를 배웅해주고 다시 매장으로 돌아왔다.
매장에 도착하니 설기가 강현을 맞이했다.
“컹! 컹!”
자기를 놔두고 어딜 갔다 왔냐고 따지는 것이었다.
“미안해. 금방 밥 해줄게.”
그러자 언제 짖었냐는 듯이 설기가 꼬리를 흔들었다. 강현은 웃으며 설기를 머리를 쓰다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