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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좀 풀렸어?
행
그렇게 민호와 남겨진 강현은 어색하게 앉아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장님이 계신 게 낫지 않았나.’
그런 생각하던 강현의 눈에 떨고 있는 민호의 손이 보였다.
강현이 그런 민호의 손등을 토닥였다.
민호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가 떨어졌다.
“...고맙습니다.”
강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박씨 할머니의 말을 알 수 있었다. 굳이 뭔가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옆에 있어 주는 것 자체가 민호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민호가 깊게 심호흡했다.
그와 함께 떨림도 멈췄다. 강현은 그런 민호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긴장감이 전염이라도 되는 걸까.
민호가 안정되자 반대로 강현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마른침을 삼켰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자기 애도 아닌데. 이게 뭐라고 이리도 긴장될까.
그렇게 둘은 말없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문을 열고 간호사가 나왔다.
“산모께서 곧 출산하실 것 같아요. 남편분 준비해주세요.”
간호사의 말에 민호의 얼굴에 안도와 긴장이 떠올랐다.
힐끗, 강현을 돌아보자 강현은 고개를 끄덕여줬다.
“다녀오세요.”
“...예, 다녀오겠습니다.”
굳은 얼굴로 안으로 향하는 민호.
강현은 굳게 닫혀버린 문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강현은 복도에 홀로 남게 되었다.
밖에 나가서 마을 사람과 기다려야 하나, 고민하던 강현은 그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는 하염없이 민호가 들어간 문만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문이 열리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나오는 게 보였다.
강현이 저도 모르게 일어나자 민호를 부르러 왔던 간호사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산모분이랑 따님분. 모두 건강하세요.”
“아···.”
잠시 할 말이 떠올리지 않아서 머뭇거리던 강현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의사와 간호사들이 떠나갔다.
강현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여기에 자신만 온 게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아직 걱정하고 있을 거다.
힐끗, 문을 바라보던 강현이 몸을 돌려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병원 밖으로 나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마을 사람들. 그들 역시 강현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다들 제 일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됐어?”
이장의 물음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산모와 딸, 모두 무사하답니다.”
강현의 말에 마을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얼마나 큰지 주변에 있던 이들이 돌아볼 정도였다.
그런 모습에 강현이 미소 지었다.
참으로 한결같은 사람들이었다.
“민호는 어찌하고 있어?”
이장의 물음에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못 봤어요.”
“뭘 어찌해. 색시랑 같이 있겠지.”
박씨 할머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나저나 정씨, 그 노친네는 왜 안 와?”
정씨. 민호의 아버지를 말했다. 그러자 이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 제사라 할멈이랑 산소갔다잖어.”
“허, 참. 오늘이 제사래?”
박씨 할머니가 눈을 껌뻑였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게다가 예정보다 아이가 빨리 나온 것도 한몫했다.
“다 지 복이지. 그렇게 조상님을 모시니 아이가 무사히 나온 걸 수도 있잖어.”
분위기를 바꾸듯 이장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 잘 낳았다니 우리는 돌아가자고.”
이장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각자 타고 온 차량에 올라탔다. 택시를 타고 온 이들은 빈자리에 얻어 탔다.
강현 역시 같이 왔던 아저씨의 차에 올랐다.
그리고 등을 돌리고 있는 설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설기야?”
“...”
대꾸조차 없었다. 쿡, 쿡 찔러도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운전석에 앉은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오지 말라고 해서 토라졌나 봐. 아까부터 저래.”
그리고는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옆에 올라탄 이장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놈, 평소엔 도도하더니 새끼는 새끼인가 보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 너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다 쫓겨났어.”
이장의 말에 강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설기를 쓰다듬어줬다.
이번 일뿐만이 아니라 오늘 종일 설기에게 소홀한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 미안해.”
“...”
대꾸하지 않는 설기. 그러나 아까까지 바닥에 가라앉았던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씩 마음이 풀리는 것이었다.
강현이 뺨을 간지럽히자 못이기는 척 핥았다.
강현은 그 모습에 미소 지었다.
그렇게 차가 마을로 향했다.
마을에 도착한 차량은 각자의 집으로 향하지 않고 마을 중앙에 모여 있었다.
내려서 삼삼오오 떠드는 사람들.
다들 아까의 흥분이 사라지지 않은 것이었다.
차에서 내린 이장이 그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 이런 날은 이대로 들어가면 안 되지.”
“예?”
그런 이장의 말에 강현은 눈을 껌뻑였다.
그러나 이장은 터벅터벅 사람들 사이로 걸어갔다.
“잔치여!”
뜬금없는 외침에 사람들의 시선이 이장에게 향했다.
“마을의 경사가 났으니 잔치를 해야지. 뭣들 하는 겨?”
이장의 말에 사람들이 머뭇거렸다. 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 집 사람들이 아무도 없잖아?”
“나중에 또 하면 되지. 뭔, 걱정이여?”
이장의 말에 노인이 감탄했다. 미처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한 번만 할 필요는 없었다.
그 모습을 본 강현은 실소를 흘렸다.
“일단 우리끼리 간단히 축하라도 해줘야지. 그래야 애도 오래 살 거 아녀?”
군데군데에서 맞아. 하고 맞장구 소리가 들렸다.
대부분이 노인들이었다. 이장은 사람들을 돌아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서 집에서 안주랑 술들 좀 가져와. 거창할 필요 없어. 나물이나 김치만 있음 충분하지.”
“예.”
고개를 끄덕인 이들이 다시 차에 올랐다.
서둘러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강현이 이장에게 다가갔다.
“저도 간단하게 만들어오겠습니다.”
여기서라면 강현의 매장이 가까웠다.
강현의 말에 이장이 반색했다.
“그래 주면 고맙지!”
그렇게 좋아하던 이장이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열심히 하지는 마. 어차피 민호네 오면 또 할 테니.”
괜히 무리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어요.”
알고 있다. 강현도 자신이 이런 일에 스스로 나설 줄은 몰랐다.
그러나 오늘은 요리하고 싶은 날이었다.
‘좋은 일은 같이 찾아온다더니.’
미각을 되찾자마자 이런 일이 생겼다. 이대로 넘기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주인공들이 빠진 잔치가 열렸다.
* * *
설기와 함께 매장으로 돌아온 강현은 식자재를 꺼냈다.
그리고는 멀뚱멀뚱 서 있는 설기를 보았다.
아직 풀리지 않았는지 시선을 피하는 설기.
그런 설기를 보며 물었다.
“설기야. 뭐 먹고 싶어? 너 먹고 싶은 걸로 만들어줄게.”
마을 사람들도 먹을 것이지만, 메뉴는 설기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강현의 물음에 설기의 귀가 쫑긋 올랐다. 그리고는 강현을 쳐다보았다.
진짜?
이렇게 묻는 듯했다.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꼬리가 흔들렸다.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모습.
강현은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설기의 고민이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똥이라도 마려운 것처럼 총총걸음으로 홀을 돌아다녔다. 쉽사리 결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설기를 본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 해볼까?”
고개를 갸웃하는 설기.
그런 설기를 보며 강현이 도마를 꺼냈다.
“고르기 힘들면 다 먹으면 되잖아.”
좋은 날이었다. 강현의 말에 설기의 눈이 반짝였다.
동시에 꼬리 역시 흔들렸다.
* * *
오븐에 차례대로 피자가 들어갔다.
이어서 화구에 불이 올라왔다. 놓인 냄비는 모두 셋.
파스타 세 개를 한 번에 하는 것이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 한사람이 하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이것이 원래 강현의 실력이었다.
지금까지 강현의 움직임은 조심스러웠다. 미각에 확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미각이 확신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강현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그와 함께 쌓여가는 그릇들.
이미 주방 앞에는 샐러드와 파스타가 올려져 있었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강현의 물음에 설기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음식이 너무 많으니 뭐부터 먹어야 할지 모르겠는 것이었다.
피식 웃은 강현은 파스타 하나를 밑으로 내려줬다.
허겁지겁 먹는 설기.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강현이 다시 주방으로 가려던 찰나, 매장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들어오는 사람들.
“아이구, 이게 다 뭐야.”
“많기도 해라.”
마을 여인들이었다.
강현이 의아해하자 여인 하나가 입을 열었다.
“총각이 요리 만들고 있다고 해서 도와주려고 왔지···.”
그러나 강현의 움직임을 보고 쉽사리 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들어가봤자 방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좁은 주방에서 같이 움직이려면 합이 맞아야 했다.
“그럼 올려진 접시들만 밖으로 옮겨주시겠어요?”
“그래. 밖에 부침개랑 고기도 굽고 있으니 와서 먹어.”
“예.”
강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들은 접시를 나르기 시작했다. 파스타를 먹던 설기가 놀란 눈으로 여인들을 바라보았다.
내 건데.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
“또 만들어줄게.”
강현은 말하면서 또 다른 파스타 접시를 내려놨다.
그러자 설기의 관심도 돌아갔다.
눈앞에 음식이 있으니 다른 것까지 욕심낼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강현은 다시 들어가서 요리했다.
파스타만 해도 열 접시가 넘었다. 그러나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었다.
순수하게 요리 자체를 즐기는 건 오랜만이었다.
이 기쁨을 왜 잊고 있었을까.
강현의 입가에 미소가 올라왔다. 그동안의 울분을 토하듯 정신없이 팬을 움직였다.
곧 파스타와 함께 오븐에 넣었던 피자들도 나왔고, 강현은 설기의 몫을 제외한 나머지를 홀에 올려놨다.
다시 피자를 넣은 강현은 힐끗 창문 너머를 보았다.
밖이 시끌벅적했다.
‘스테이크도 하려고 했는데.’
아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고기도 굽고 있었다. 굳이 스테이크를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강현은 설기의 앞에 가서 쪼그려 앉았다.
“이제 기분 좀 풀렸어?”
“컹!”
짖고는 다시 피자를 먹는 설기. 슬슬 배가 부르는지 먹는 속도가 줄었다.
강현이 그런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자 문이 벌컥 열렸다.
마을 여인 중 하나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장이 강현을 보자 혀를 찼다.
“적당히 하라니 뭐하는 거여? 어서 나와!”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이장은 못 믿겠다는 눈으로 강현을 바라보았다. 강현은 진짜라고 몇 번이나 말한 후에나 이장은 물러났다.
“빨리 나와! 이따가 왔을 때도 안 나오면 억지로 끌고 갈 테니.”
이장의 엄포에 강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몇 개, 더 하려고 했었다.
“아쉽지만 여기까지 해야겠네.”
슬슬 재료도 떨어져 가고 있었다. 강현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설기를 보았다.
“밖에도 먹을 게 있대. 너무 먹지는 마.”
강현의 말에 설기가 움찔, 하고 멈췄다.
그리고는 밖과 앞에 놓인 피자를 번갈아 보더니 다시 먹기 시작했다.
밖에 있는 음식보다 강현이 만든 피자를 택한 것이었다.
강현은 그런 설기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준 후 주방으로 들어갔다.
오븐에 들어간 피자를 꺼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마지막 요리까지 끝낸 강현은 설기와 함께 매장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강현의 이마를 간지럽혔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지만 밤바람은 아직 서늘했다.
그리고 거리 곳곳에는 돗자리가 깔려 있었고 사람들이 어울려 떠들고 있었다.
정겨운 광경.
미소 지은 강현은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런 강현의 옆에는 기분이 완전히 풀렸는지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설기가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