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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이니
‘며칠 불안하다니.’
결국 비가 온 것이었다. 강현은 서둘러 설기의 보따리를 풀었다.
축축하게 젖은 물건들.
짧은 사이에 안까지 다 젖은 것이었다.
보따리를 풀자 설기가 창고를 돌아다니면서 물을 털었다.
그 모습에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어쩌지?’
일단 너머의 상황을 직접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강현은 배낭과 신발을 벗고 구멍으로 향했다.
그렇게 이세계로 넘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강현이 다시 나왔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많이 오긴 하네.”
강현은 겉옷을 벗어서 밖에다 물을 털었다. 그러자 어느새 물을 다 털었는지 설기가 강현 곁으로 다가갔다.
강현은 그런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댁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먹는 건···. 아니야. 그럼 나온 의미가 없어.’
이곳 역시 사람이 없긴 하지만, 집에서 해 먹는 것과 큰 차이는 없었다.
“끼잉.”
설기가 미련이 남은 눈으로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안 가면 2주 연속이었다.
그를 본 강현의 결심도 섰다.
“...그래, 가자.”
“킹?”
설기가 돌아보았다. 고개를 갸웃하는 설기와 눈이 마주친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강현의 말에 설기의 꼬리가 흔들렸다. 역시나 가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런 설기를 향해 강현이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준비 좀 하고.”
강현은 고개를 갸웃하는 설기를 보며 미소 지었다.
* * *
비가 많이 오는 날, 산행은 위험했다. 그러나 강현의 상황은 달랐다.
문만 넘으면 숲이기 때문이었다.
자리를 찾으러 숲을 헤맬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우중 캠핑도 나름의 멋이 있지.’
캠핑하다 보면 피치 못 할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부러 비 올 때, 캠핑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강현 역시 지난번에 비를 겪고 나서 대비했다.
보따리에 쌌던 것은 이미 젖어서 쓸 수가 없었다. 강현은 배낭 속에 있는 짐을 덜어냈다.
최대한 가볍게.
꼭 필요한 것만 챙긴 후 방수 커버를 씌웠다.
그리고 배낭을 메고 다시 커다란 우비를···.
“...맞아. 너를 잊었네.”
강현의 시선에 설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강현은 다시 배낭을 내려놓고 우의 하나를 더 꺼냈다.
투명한 강현의 것과 달리 밝은 노란색 우비.
강아지용이었다.
끝에는 고양이 얼굴이 그려진 귀여운 우비.
‘...강아지용인데 왜 고양이가 그려져 있지?’
살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강현은 잠깐 의아해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리고 바닥에 질질 끌리는 우비를 보고 짧게 혀를 찼다.
‘생각보다 크네.’
강현은 우비 밑단을 말아서 안쪽으로 넣었다. 허리띠가 있었기에 고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설기는 제 모습이 신기한지 뱅뱅 돌았다.
‘장화도 같이 오긴 했는데.’
세트였다. 마찬가지로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장화.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설기 성격에는 답답해할 거다.
지금도 머리를 흔들더니 애써 씌운 모자를 벗었다.
헤헤, 혀를 빼고 웃는 설기. 강현은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만 장화로 갈아신었다.
그리고 다시 배낭을 멘다.
위로 우비까지 입으니 든든했다.
그야말로 완전무장.
“그럼 갈까?”
“컹!”
우비 사이로 삐져나온 꼬리가 흔들렸다.
그렇게 강현과 설기는 이세계로 향했다.
* * *
넘어가자마자 시원한 빗줄기가 강현과 설기를 맞이했다.
쏴아아아아.
더위를 단번에 날려버릴 정도였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줄었네.’
설기가 신이 난 듯 풀 위를 뛰어다녔다.
“설기야. 젖지 않게 조심···.”
강현은 올렸던 손을 내렸다. 이미 강현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설기.
애써 입힌 우비가 무색해졌다.
그러나 강현은 곧 고개를 저었다.
“하긴, 상관없나?”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평소와 다르게 장화라서 발걸음이 느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평소보다 짐이 가볍다는 것이었다.
강현과 설기가 향하는 곳은 전에 머물렀던 공터.
여기서 가까이에 텐트 칠만한 장소로는 제격이었다.
그렇게 걷고 있으니 설기가 돌아왔다.
대체 어디까지 갔던 걸까?
돌아온 설기의 모자와 우비 틈 사이에 나뭇가지랑 나뭇잎이 잔뜩 끼어있었다.
강현은 한숨을 내쉬고는 우비 사이로 끼어있는 나뭇가지를 빼줬다.
그러자 설기가 간지러운지 몸을 비틀었다.
“가만히 있어. 다 빼야지.”
강현의 말에 설기의 움직임이 멈췄다. 강현은 나뭇잎까지 다 털어내고는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참았어.”
“컹!”
짖은 후 몸을 비벼오는 설기. 강현은 그런 설기의 머리를 몇 번이나 더 쓰다듬어준 후에 다시 걸음을 옮겼다.
통, 통, 통.
짧은 걸음으로 앞장서는 설기.
그러던 설기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설기야?”
강현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수풀 사이로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캬아아악!”
사납게 울음을 터트리는 건, 전에 봤던 모나였다.
“...너, 또 가출했구나.”
다시 만날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런 날씨에 나올 줄은 몰랐다.
그러나 전에 봤던 풍성하고 복슬복슬한 꼬리는 사라진 상태였다.
물에 젖어서 볼품없이 축 처져있었다.
대체 얼마나 있었던 걸까?
‘마을에서 걱정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설기를 발견한 모나의 눈이 빛났다.
천천히 옆으로 걸음을 옮긴다.
설기도 모나를 따라 옆으로 걸었다.
마치 원을 그리듯 걸으면서 서로를 노려보는 모나와 설기.
그 모습을 본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꼭, 이 날씨에 그래야겠니?”
강현이 그러거나 말거나 둘은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먼저 움직인 건 모나였다.
사방으로 흙탕물이 튀었다.
날아오는 흙탕물을 본 강현이 슬그머니 뒷걸음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찢어진 우비 자락이 바닥에 떨어졌다.
“...우비는, 다음에 못 쓰겠네.”
일회용조차 되지 못했다.
싸움은 금방 끝났다. 역시나 승자는 설기였다.
이제는 망토처럼 변한 우비를 입은 설기가 당당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반대로 한쪽 구석에서 훌쩍이는 모나.
비가 오니깐 더 처량하게 보였다.
강현은 슬그머니 모나를 보다가 바닥에 떨어진 우비 조각을 주웠다.
그리고.
“같이 갈래?”
모나를 향해 물었다. 이 날씨에 혼자 놔두고 갈 수는 없었다.
아무리 야생에 익숙하다고 해도 아직 어린아이였다.
그러한 강현의 물음에 훌쩍이던 모나가 킁, 하고 코를 들이마셨다.
작게 움직이는 머리.
곧 쪼르르 강현의 옆으로 걸어왔다.
진 게 분한지 아직도 콧잔등이 붉었다. 반대쪽에는 홀딱 젖은 설기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한숨을 내쉰 강현은 다시 공터를 향해 걸었다.
* * *
그렇게 도착한 공터.
아까 싸운 게 거짓말처럼 모나는 얌전하게 앉아있었다. 설기도 떨어진 곳에서 앉아서 강현을 바라보았다.
강현은 그 둘을 힐끗거리고는 배낭을 내렸다.
아직 비가 오고 있으니 짐을 풀 수는 없었다. 배낭 위에 넣은 타프만 꺼냈다.
평소에는 텐트 먼저 치고 타프를 쳤으나 이번에는 반대였다.
배낭이 젖지 않게 커버를 조여주고는 타프를 설치했다.
타닥, 타닥, 타다닥.
새롭게 설치된 타프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연주하듯 일정한 속도로.
강현은 중간에 빗물이 고이지 않게 폴대를 하나 더 세웠다.
타프를 따라 옆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
이걸로 비는 해결이 되었다.
지켜보고 있던 모나와 설기가 후다닥, 안으로 들어왔다.
‘이럴 때는 사이가 좋네.’
피식 웃은 강현은 배낭을 열고 텐트를 설치했다.
그리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텐트를 타프 밖으로 밀었다.
타프와 텐트 입구가 살짝 걸치는 형태.
그 뒤로 흔들리지 않게 팩을 박았다.
‘다행히 바람은 없어.’
비만 내리고 있으니 물길만 잘 내주면 무너질 일은 없었다.
팽팽하게 끈을 당긴다. 그렇게 평소보다 심혈을 기울여서 텐트를 쳤다.
덕분에 우비 사이로 빗물이 들어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런 날은 번거롭더라도 확실히 해야 나중이 편했다.
아니면 중간에 다시 보수를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게 더 힘들지.’
팩과 나무를 이용해 고정한 뒤, 다시 타프 안으로 들어왔다.
타프 안으로 들어오자 네 개의 눈동자가 강현을 맞이했다.
기대가 담긴 눈동자.
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밥은 나중에. 일단 너희 몸부터 말리자.”
둘 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이대로라면 감기에 걸릴 거다. 강현의 말에 둘의 고개가 갸우뚱 옆으로 돌아갔다.
강현은 우비를 뒤집어쓰고 다시 타프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젖은 나뭇가지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 강현을 보던 설기가 따라 나와서 나뭇가지를 챙겼다.
그러자 멀뚱멀뚱 보고 있던 모나도 움직였다.
“다 나올 필요는 없는데.”
강현은 옆에서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 설기와 모나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둘의 활약 덕분에 금방 모을 수 있었다.
어느새 타프 한 구석에 산처럼 쌓인 나뭇가지들.
강현은 주머니를 꺼냈다.
안에는 은색 철판들이 들어있었다. 그걸 조립하자 금세 화로로 변했다.
백패킹용으로 쓰는 화로.
번거로워서 자주 쓰지는 않지만, 이럴 때 효과적이었다.
마른 장작이라면 바로 불을 붙이면 되지만 젖은 나뭇가지로는 힘들었다.
‘이럴 때는 방법이 있지.’
강현은 할아버지 댁에서 챙겨온 종이컵을 꺼냈다.
거기에 휴지를 넣고 식용유를 부었다.
이러면 불이 오래간다.
그걸 화로에 올리고 주변으로 나뭇가지를 쌓았다.
나뭇가지에 둘러싸인 종이컵에 불을 붙이자 불씨가 올라왔다.
하지만 나뭇가지로 옮겨붙지 않고 있었다. 강현은 천천히 기다렸다.
투둑, 투두둑.
타프에 떨어지는 빗소리만이 조용하게 울렸다.
그리고.
마르기 시작한 나뭇가지에 불이 옮겨붙었다. 한 번 옮겨붙은 불씨는 점점 커졌다.
설기와 모나가 신기한지 옆에 붙어서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현은 그런 둘을 보며 나뭇가지를 더 집어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변이 따뜻해졌다.
* * *
작은 화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셋.
설기와 모나의 털이 조금씩 말라가기 시작할 때, 강현이 혀를 찼다.
“중요한 걸 깜빡했어.”
강현이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포일에 감싼 둥근 물체들.
바로 감자와 고구마였다.
미영이 아버지에게 답례로 받아온 것.
강현은 그것들을 화로 구석에다 놓았다. 화로가 적다 보니 많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상관없지.’
어차피 장작은 많았다. 천천히 구우면 되었다. 이런 게 캠핑의 묘미가 아닌가.
급할 게 없었다.
그렇게 설기와 모나가 불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강현은 식사를 준비했다.
냄비를 올리고 불을 켰다.
그리고 냄비 위에 버터를 한 덩어리 떨궜다.
곧 고소한 버터 향이 올라왔다.
강현은 미리 썰어놓은 소고기를 꺼냈다. 그리고 냄비에 부으려다가 멈췄다.
슬그머니 화로를 바라보았다.
“...모처럼이니.”
절반만 냄비 위로 부었다. 그리고는 나무젓가락으로 살살 볶아줬다.
그리고 소금과 후추를 살짝만.
고기의 냄새가 퍼져가자 불 앞에 있던 설기와 모나의 시선도 돌아갔다.
추릅.
흘러내리는 침을 삼키는 모나.
강현은 고기의 겉면이 노릇하게 익었을 때, 감자와 당근을 넣었다.
미영이 아버지에게 받은 감자였다.
그렇게 천천히 볶아준 후, 물을 넣어줬다.
전부 잠기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새송이버섯을 찢어서 넣은 뒤, 뚜껑을 덮어줬다.
역시나 버섯 역시 절반만 넣었다.
“그럼 물이 끓는 동안 이쪽을 해야겠어.”
강현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화로와 같이 온 그릴.
강현은 화로 위에 그릴을 올리고 남겨놓은 고기와 버섯을 올렸다.
“이걸로는 뭔가 허전하네.”
그런 강현의 눈에 포일에 감싸인 고구마와 감자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