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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받았습니다.
담벼락 너머를 힐끗거리니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게 보였다.
당황한 미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미 아이들이 올 것을 알고 있던 응언도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생각보다 아이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스물이 좀 안 되는 숫자.
‘전교생이 다 온 건가?’
창고 뒤에서 그걸 보고 있던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아이들이 들어오자 넓었던 마당이 좁게 느껴졌다.
그런 아이들 사이로 사내아이 하나가 주뼛주뼛 다가왔다.
사내아이를 본 미영이 황급히 응언의 뒤로 숨었다.
‘쟤가 철민이구나.’
강현은 한 번에 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응언에게 인사를 한 사내아이가 미영을 보며 뭔가를 내밀었다.
“저번에 미안해. 선물이야.”
작은 토끼 인형. 강현은 그것이 슈퍼에서 팔던 것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슈퍼집 손녀한테 슈퍼에서 산 물건을 선물로 한 것이었다.
미영은 인형과 사내아이를 번갈아 보다가 응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응언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미영이 인형을 받았다.
그러자 사내아이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이제 나도 같이 놀아도 돼?”
“...응.”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미영이. 사내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그때, 한쪽에서 마당을 살피던 아이 하나가 입을 열었다.
“공기다! 새것이야!”
“팽이랑 구슬도 있어!”
역시 슈퍼집 손녀였다.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강현은 그 모습에 살포시 미소 지었다.
서울에서 봤던 아이들은 항상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아마 흙도 밟아보지 못한 아이들이 많을 거다.
그러나 시골의 아이들은 아직 순수했다.
“미영아, 미영아. 팽이 해도 돼?”
“같이 구슬치기하자!”
“아냐! 미영이는 공기할 거야. 그치?”
금세 시끌벅적해진 아이들. 응언은 조용히 미영이의 등을 밀어줬다.
머뭇거리던 미영은 곧 아이들 사이로 섞였다.
그 모습에 강현도 창고에서 나왔다.
더 숨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창고에서 나오는 강현을 상후가 발견하고 달려왔다.
“삼촌!”
상후가 강현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는 코를 쓸며 말했다.
“다 데려왔어요! 미영이한테 걸리지 않게 하려고 힘들었어요.”
“잘했어.”
강현은 상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의 일등 공신이 있다면 자신도, 설기도 아닌 상후였다.
강현의 칭찬에 상후가 힛, 하고 웃었다.
“그럼 애들이랑 놀고 있어. 미영이네 아줌마랑 삼촌이 맛있는 거 해줄게.”
“네!”
상후가 아이들을 향해 뛰어갔다. 그렇게 상후를 보낸 강현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내 할 일을 해야지.”
강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방금까지 같이 있었던 설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담벼락을 넘고 있는 설기가 보였다.
‘...언제 저기까지 간 거야.’
아이들에게 들키기 전에 도망친 것이었다.
아이들 누구도 설기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강현이 응언에게 향했다.
응언은 울컥한 표정으로 미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와, 그 옷 뭐야? 아줌마도 입고 있네?”
“어, 엄마네 옷이래.”
“엄마네?”
“으, 응. 엄마. 베트남에서 왔어.”
“베트남이 어디야?”
“바보야. 외국이잖아.”
“너어! 선생님이 바보라고 한 사람이 바보랬어!”
어느새 아이들과 어울리고 있는 미영.
강현은 그런 응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제야 응언도 정신을 차렸다.
“미영아. 엄마가 음식 해줄 테니 친구들이랑 놀고 있어.”
“으응!”
고개를 끄덕이는 미영이.
그러나 이미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까와 다르게 환하게 웃고 있었다.
주방으로 향하는 응언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 * *
중화 팬과 기름이 담긴 냄비에 불을 붙인다.
재료들은 이미 전처리가 끝난 상태였다.
바로 조리만 하면 되었다.
달궈진 팬 위에 야채들이 쏟아졌다. 응언의 옆에서 보조하는 강현.
오늘 할 요리는 모두 넷.
가장 먼저 나온 것은 따끈한 육수에 숙주와 양파, 소고기를 소복하게 올린 쌀국수였다.
베트남 요리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메뉴.
이어서 완자와 함께 면을 찍어서 먹는 분짜. 쌀가루에 코코넛 밀크를 넣은 반죽에 채소와 해산물을 넣고 부친 반쎄오.
마지막으로 베트남 스프링 롤인 짜조를 내왔다.
원래는 친근한 월남쌈을 하려고 했으나 아이들끼리 싸 먹기 힘들 거란 판단에 짜조로 바꿨다.
‘편식도 하겠지.’
옆에 붙어서 봐줄 수 없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음식들이 나오자 아이들이 반응했다.
놀던 걸 멈추고 마당에 놓인 탁상 앞으로 다가왔다.
“우와. 아줌마 이건 뭐예요?”
“얜, 어떻게 먹어요?”
사방에서 질문이 쏟아졌으나 응언은 귀찮은 기색도 없이 친절하게 답해줬다.
곧 음식을 먹기 시작한 아이들.
생소한 맛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아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익숙하게 음식을 먹었다.
“아줌마, 아줌마! 이거 더 먹어도 돼요?”
“맛있다!”
시끌벅적한 아이들의 모습에 응언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응, 더 가져다줄게. 다른 건 더 필요 없어?”
“전 이거 더 주세요!”
“저도요!”
사방에서 들리는 소리에 응언이 미소 지었다.
아이들의 입맛에 맞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쓸데없는 우려였다.
“잠깐만.”
응언이 황급히 안으로 향했다.
“저도 도울게요.”
“아닙니다. 요리사님은 있어 주세요.”
아이들을 보고 있을 사람도 필요했다. 결국,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먹느라 정신이 없는 아이들.
강현은 한쪽 구석에 앉아서 그런 아이들을 지켜봤다.
아직은 어색함이 남아있지만, 조금씩 아이들과 말을 섞은 미영이.
“그럼 미영이도 외국어 할 줄 알아?”
“...인사 정도는.”
미영이가 수줍게 말했다.
“진짜? 대단하다!”
“한번 해봐!”
그런 아이들을 보며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되었네.’
이번 일로 모든 게 해결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었을 거다.
그때, 담벼락 너머에 차가 멈춰 서는 게 보였다.
미영이네 아버지였다.
예정했던 시간보다 늦은 시간.
강현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리는 미영이 아버지의 손에는 네모난 상자가 들려 있었다.
케이크 상자.
읍내까지 나가서 사 온 것이었다. 황급히 뛰어오던 미영이 아버지는 안에서 떠드는 아이들과 미영이를 보며 눈을 껌뻑였다.
그러다가 미영이와 눈이 마주쳤다.
미영이 아버지는 괜찮다고 손을 흔들고는 강현에게 걸어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선생이 더 했지.”
선생. 강현의 호칭이 바뀌었다.
“선생이라뇨.”
강현이 화들짝 놀라서 손을 젓자 미영이 아버지가 말했다.
“애 엄마 요리 선생 아닌가? 그리고 우리 애한테도 은인이야.”
미영이 아버지는 흐뭇한 표정으로 미영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강현도 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고 얼마나 있었을까.
응언이 음식을 들고나오는 게 보였다.
응언 역시 평소와 다르게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강현은 그런 응언을 보다가 미영이 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케이크, 꺼내야 하지 않을까요?”
“어? 아, 그렇지.”
그러나 말과 달리 미영이 아버지는 쉽사리 나서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 미영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강현이 나섰다.
미영이 아버지와 달리 강현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얘들아. 우리 케이크 먼저 먹고 놀까?”
강현의 눈짓을 받은 상후가 일어났다.
“그래, 노래해야지!”
그제야 응언도 아직 생일 축하 노래조차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급하게 다가왔다.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으, 응. 그래.”
미영이 아버지가 케이크를 응언에게 건넸다.
곧 마당 중앙에 케이크와 함께 촛불이 켜졌다. 미영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앉은 아이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미영이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아이들의 박수 소리에 미영이 환하게 웃으며 촛불을 껐다.
* * *
생일 파티가 끝나고 며칠이 지났다.
평소처럼 조용한 미영이네 집.
그러나 전과 달라진 게 있었다.
“미영아! 학교 가자!”
담벼락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철민이었다.
철민이 옆으로 미영이 또래의 여자아이 둘이 있었다.
“응! 잠깐만!”
미영이의 숟가락이 멈췄다. 미영이 아버지와 응언의 눈치를 봤다.
미영이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길래 빨리 일어나라고 했잖아.”
밥그릇에는 밥이 반이나 남아있었다.
“...죄송해요.”
“여보.”
미영이의 말에 응언이 미영이 아버지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결국, 미영이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턴 일찍 일어나서 다 먹고 가야 해.”
“네! 고마워요. 아빠!”
미영이가 미영이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그러자 미영이 아버지의 표정도 풀렸다.
그리고는 옆에 응언의 시선을 깨닫고 헛기침했다.
“미영아. 엄마한테는 잊은 거 없어?”
그러자 미영이 수줍게 입을 열었다.
“...꼰 예우 바.”
“그래, 바 예우 꼰.”
응언이 미영의 뺨에 뽀뽀했다.
그러자 미영이 쑥스러운지 책가방을 들고 대문 밖으로 튀어 나갔다.
부부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전까지는 집에 돌아와서 학교 이야기하지 않는 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묻지 않아도 학교와 친구들 이야기를 떠든다.
자신들의 딸이 이리도 잘 웃는 아이인 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럼 나도 일하러 가볼게.”
“예. 저도 정리하고 따라가겠습니다.”
“아니야. 오늘은 할 일이 별로 없으니 쉬어.”
“그래도···.”
“생일 준비하고 제대로 쉬지도 못했잖아.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아.”
응언이 머뭇거리자 미영이 아버지가 그런 응언의 어깨를 두드리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홀로 남게 된 응언은 멍하니 마당에 걸터앉았다.
요 며칠 있었던 일이 꿈만 같았다.
‘...꿈이 아니야.’
이리도 쉽게 바뀔 수 있던 것이었던가.
결국, 응언을 가두고 있던 건 출신이 아니라 응언 자신이었다.
그걸 깨닫자 막혀있던 무언가가 뚫린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응언의 상념을 깨는 목소리가 있었다.
“미영이 엄마! 있어?”
담벼락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
무슨 일인가 싶어서 나가니 여인 셋이 있었다.
“있었네.”
“무슨 일이십니까?”
응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이번에 우리 애가 미영이 생일에 갔다가 무슨 국수를 먹었다고. 그게 먹고 싶다네.”
뒤에 있던 두 여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국수 만드는 것 좀 가르쳐달라고. 어려울까?”
여인의 말에 응언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닙니다.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들어오세요.”
“그래? 고마워! 나중에 보답할게.”
여인들이 응언을 따라 주방으로 향했다.
“이야, 잘해놨네.”
“아닙니다.”
응언이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응언을 보며 여인들의 표정도 부드러워졌다.
“아니, 요리를 그렇게 잘하면 진작 말하지.”
“맞아.”
맞장구를 치는 여인들을 보며 고개를 젓던 응언은 곧 무언가를 떠올렸다.
“아닙니다. 이번에 많이 도움받았습니다.”
“도움? 누구한테?”
여인의 물음에 응언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자신을 도와준 한 청년에 대해서.
* * *
매장의 문을 닫은 강현이 땀을 훔쳤다. 이제 여름이 다가오는 만큼, 햇빛이 점점 따가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매장 역시 점점 활기가 띠고 있었다.
생일 파티 이후로 옆 마을에서도 손님이 찾아오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잘된 일인가?’
강현은 뺨을 긁적였다.
“컹!”
옆에 있던 설기가 짖자 강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빨리 가자고 닦달하는 것이었다.
“그래. 알겠어.”
생일 준비를 하느라 한 주를 건너뛰었다. 설기가 조급해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강현은 배낭을 둘러업고 택시를 불렀다.
그렇게 도착한 할아버지 댁.
설기는 보따리를 묶어주자마자 후다닥 문 너머로 뛰어갔다.
“잠깐···. 가버렸나.”
실소를 흘린 강현이 발을 옮겼다.
그리고 문 너머로 향하려는 순간.
문에서 동그란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우왓!”
놀라서 바닥에 쓰러지는 강현. 그림자의 정체는 보따리를 메고 있는 설기였다.
그러나 조금 전의 모습과 달랐다.
당혹스러운 눈으로 몸을 흔드는 설기.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보따리 역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를 본 강현은 너머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