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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
꼼지락, 꼼지락.
강현은 오늘도 온기를 느끼고 잠에서 깼다.
이제는 완전히 사라진 불면증. 그뿐만이 아니었다.
강현은 손목을 돌렸다. 시원한 느낌이 남아있었다.
‘...거의 나았어.’
설기 덕분이었다. 설기가 핥아줄 때마다 통증이 사라지고 있었다.
신비로운 일.
아침마다 손목에서 침 냄새가 올라왔지만,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아니, 손목만이 아닌가?”
강현은 발을 보았다. 신고 있던 양말이 사라졌다.
그리고 손목과도 같은 침 냄새가 올라왔다.
강현은 자신의 발에 뭔가 이상이 있었나 고민했다.
그러나 집히는 게 없었다.
‘...그냥, 발 냄새가 좋은 건가?’
그럴 수도 있었다. 피식 웃은 강현은 자는 설기의 배를 쿡쿡 찔렀다.
그러자 꼬리로 손을 쳐내는 설기.
아직 졸린 지 칭얼거리기까지 했다.
강현은 그런 설기를 놔두고 조심스레 텐트를 나왔다.
새벽의 강은 아름답기보다 성스러운 느낌이었다.
강가 주변에는 사냥에서 돌아온 늑대들이 보였다. 이제 잠을 자려는 모습.
강현은 그걸 바라보며 스토브에 불을 켰다.
금세 데워지는 물.
너무나도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풍경을 감상하던 강현은 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 * *
잠든 늑대들이 깨지 않게 텐트를 정리하고 돌아온 강현을 맞이한 건 마을 이장이었다.
“이야. 그짝, 돈가스가 기가 막히다며?”
싱글벙글 웃던 이장이 강현의 등을 두드렸다.
어쩐지 신나 보이는 이장.
“아주 마을에 소문이 쫙 퍼졌어. 다들 먹어보고 싶다고 난리도 아니여.”
양식당이란 소리를 듣고 걱정했던 이장이었으나 마을 사람들의 반응이 좋으니 기분이 좋아진 것이었다.
그러나 강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지만 이장이 직접 찾아올 정도로 반응이 클 줄은 몰랐다.
‘민호씨가 말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오히려 우직했다. 그때, 강현의 생각을 읽은 이장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민호네 색시한테 고마워혀. 제대로 광고해주고 있더구먼.”
“아.”
그제야 소문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몸도 무거울 텐디. 아주 정성이여.”
이장이 흐뭇하게 말했다.
그런 이장의 말에 강현은 수진의 배를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돈을 받지 않아서 홍보라도 해주려는 것이었다.
‘...고마운 일이네.’
강현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때, 이장이 갑작스럽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이쿠. 내 정신 좀 봐. 그 이야기하려고 온 게 아닌데.”
강현이 의아한 시선으로 이장을 바라보았다. 따로 용무가 있는 건가?
“가게는 언제 열 거여? 열기 전에 잔치라도 해야지.”
“...잔치, 입니까?”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뜻은 알지만 강현에게는 생소한 단어였다.
그러나 그런 강현의 반응에 이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치! 그럼 안 할 생각이었나? 새로운 사람이 왔으니 얼굴이라도 익혀야지.”
그리 말한 이장은 흘리듯 입을 열었다.
“...뭐, 얼굴을 익혀두면 장사할 때도 나을 거 아녀?”
자세히 듣지 않으면 듣지 못했을 정도의 은근한 목소리. 곧 이장이 강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종의 환영회였다. 그러나 강현은 쉽사리 입을 열 수 없었다.
“날만 말해주면 준비는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어. 소까지는 아니어도, 돼지나 닭 정도는 잡아야지.”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이는 이장.
“그럼 그리 알게.”
그렇게 휘적휘적 떠나갔다. 강현은 그런 이장을 바라보다가 볼을 긁적였다.
이사 왔다고 환영회를 열어주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아니, 서울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뭐, 나쁘진 않나?”
새로운 이들을 만난다는 사실에 긴장되기도 했으나 기대도 되었다. 예전의 강현이었다면 가지지 않았을 감정.
강현의 시선이 설기에게 향했다.
“그렇지?”
“컹!”
기분 좋게 짖는 설기.
기사랑 늑대도 만났는데 마을 사람이라고 대수인가.
* * *
여름이 다가올수록 햇빛은 점점 따끔해져 갔다.
밭일하던 여인 하나가 햇볕에 지쳐갈 때 멀리서 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참 드시고 하세요!”
익숙한 목소리에 여인의 얼굴에 반가움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감정은 곧 걱정스러움으로 바뀌었다.
배가 볼록 올라온 임산부.
“아휴, 혼자도 아니면서 뭘 자꾸 나와!”
여인의 호통에 여인, 수진은 배시시 웃었다.
“너무 집에만 있으면 답답해서요. 그보다 어서 오세요, 식혜 다 녹아요!”
“다른 형님은?”
“이미 오셨어요.”
“벌써? 빠르기도 해라. 일 좀 하려니깐 가만히 두질 않네.”
그리 말한 여인이 몸을 일으켰다. 툴툴거리는 말과 달리 표정이 밝았다.
안 그래도 쉬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못 이긴 척 밭을 나섰다.
밭 옆에 있는 작은 정자.
마을 중심에 있는 것보다 작은 정자였다. 마을 중심에 있는 정자가 어르신들을 위한 것이라면 이 정자는 여인들이 모여서 수다를 떠는 장소였다.
수진이 부르지 않은 이들도 다른 여인의 부름을 받고 하나둘 모였다.
종일 일하다가 왔음에도 여인들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수진을 제외하면 대부분 오십은 넘어 보였다.
식혜를 홀짝인 수진이 눈을 굴렸다.
“오늘 남자들은 다 어딜 가고 형님들만 있어요?”
“간밤에 춘식이 할아버지 집에 멧돼지가 내려왔다잖아.”
한 중년인의 말에 수진의 눈이 커졌다.
“할아버지는 괜찮으시데요?”
“그래. 놀라서 허리를 다치긴 했는데 큰일은 아니래. 그 집 담벼락이랑 밭이랑 다 엉망이 돼서 다 같이 고치러 갔어.”
그제야 마을의 사내들이 보이지 않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시기에 한 번씩 있는 일이잖아. 부상자가 없는 게 다행이지.”
고개를 끄덕인 수진은 의아함을 숨기지 못했다.
“우린 왜 안 불렀지···.”
보통 이런 경우에는 방송한다. 그러나 오늘은 방송조차 없었다.
“동생네는 손이 하나잖아. 이장님이 신경 쓴 거겠지.”
다른 여인의 말에 수진이 탄성을 뱉었다. 민호가 도우러 가면 임신한 수진만 남게 된다.
“그러니 이것도 안 해도 돼.”
여인 하나가 식혜와 배추전을 가리켰다.
“우리야 좋지만, 무거운 몸으로 다니다가 어디 잘 못 되기라고 하면 어떻게 해.”
쏘아붙이듯 말했지만, 속에는 걱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다른 여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수진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이런 거라도 해야지, 집에만 있으면 답답해서 안 돼요. 정 힘들면 안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수진도 아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수진의 말에 여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도 경험했던 일이기에 그 심정을 잘 알았다.
그때, 한 여인이 입을 열었다.
“저거 점례 할머니 아니여?”
“그러네. 상후도 있어.”
멀리 등이 굽은 노인과 아이가 보였다.
상후. 이 마을의 유일한 아이였다. 그러니 모를 수가 없었다.
곧 상후가 무언가를 바닥에 던졌다.
“...이런 거, 아니야!”
그리고 뛰쳐나가는 상후. 여인들의 눈이 커졌다.
평소 예의 바르던 상후였기에 놀란 것이었다.
곧 홀로 남은 점례 할머니가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주섬주섬 주웠다.
여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런 점례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수진 역시 다른 여인의 부축을 받으며 같이 걸어갔다.
“어르신, 무슨 일이에요?”
점례 할머니가 들고 있는 건 흙이 묻은 햄버거였다.
편의점에서 파는 것.
여인의 물음에 점례 할머니가 한숨을 내쉬었다.
“학교에서 친구가 이번에 함버그인가, 뭔가 하는 걸 자랑했다고 먹고 싶다고 하더라고.”
여인 몇몇이 탄성을 뱉었다. 그것만으로 상황이 짐작되었다.
초등학교는 옆 동네에 있었다. 말이 옆 동네이지 차로도 십오 분은 가야 했다.
초등학교라고 해봤자 전교생이 열 명도 안 되었다. 그중 하나가 서울에 놀러 갔다가 햄버거를 먹고 자랑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걸 사줬는데. 아닌가 봐.”
여인네 하나가 대신 입을 열었다.
“평소 안 그러던 애인데. 왜 그러지?”
여인의 말에 점례 할머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쟤, 아비 때문이지. 이번에도 못 들어온다잖아. 에휴, 그놈의 돈이 뭔지.”
그제야 여인들의 얼굴에 안타까움에 떠올랐다.
작은 마을답게 상후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상후네 어머니가 지병으로 입원하고 아버지는 병원비를 충당하기 위해 해외로 떠났다.
그 때문에 할머니 집인 이곳에 맡겨진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학교 친구가 자랑하니 서러움이 터진 것이었다.
“제가 그이한테 말해볼게요. 내일 읍내에 다녀오면서 하나 사서 오면 되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나 여인의 말에도 점례 할머니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그게 읍내에 파는 거랑 다른 가벼.”
“예?”
여인네들이 눈을 껌뻑였다. 햄버거가 다 같은 햄버거가 아닌가?
“저···.”
그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점례 할머니와 여인들의 시선이 수진에게 향했다.
“제가 한 번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다들 일하다가 잠깐 나온 것이었다.
수진의 말에 점례 할머니의 얼굴에 기대가 떠올랐다.
“...색시는 도시에서 왔지? 그래 줄 수 있나?”
도시와 서울은 달랐지만, 자신보다는 잘 알 거다.
점례 할머니의 물음에 수진이 부드럽게 웃었다.
* * *
“...햄버거, 말이죠?”
수진의 이야기를 들은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상후한테 이야기를 들어보니 친구가 서울의 롯데월드에 갔다가 햄버거를 먹고 왔다고 하네요.”
“롯데월드···.”
그것만으로는 특정하기가 어려웠다. 당연히 강현은 롯데월드에 가본 적이 없었다.
롯데월드에서 파는 햄버거.
‘너는 이런 것 먹어본 적 없지?’
‘있거든!’
‘거짓말하지 마! 서울에만 파는 거랬어! 넌 서울 가본 적 없잖아!’
‘아니야! 있어!’
거짓말이 아니었다. 엄마가 아프기 전에는 종종 놀러 갔었다.
그렇게 말다툼하다가 싸움까지 번진 것이었다. 어리기에 생겨난 일.
수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어렵나요?”
“아뇨. 햄버거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강현이 유학했던 곳이 바로 미국이었다. 햄버거의 본고장.
하지만···.
“다른 건 못 들었나요? 어떻게 생겼다느니. 맛이 어떻다느니.”
강현의 물음에 수진이 고개를 저었다.
“수제버거 같던데. 저도 정확히는···.”
수진이 곤혹스러워하는 사이 그림자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뭔, 쓸데없는 걱정이여!”
바로 이장이었다.
“엄마야.”
이장의 호통에 화들짝 놀란 수진이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이장의 얼굴에 미안함이 떠올랐다.
“어이쿠. 미안혀. 가게 문이 열려 있길래. 애가 있다는 걸 깜빡했어. 괜찮나?”
안절부절못하는 이장의 모습에 수진이 부드럽게 웃었다.
“괜찮아요. 살짝 놀랐을 뿐이에요. 그보다 쓸데없는 걱정이라뇨?”
이장을 배려해서 화제를 돌리는 수진. 뒤늦게 이장의 표정이 풀어졌다.
이장은 헛기침한 후에 입을 열었다.
“상후, 걔도 진짜 햄버거를 먹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닐 거여. 친구네가 부모님하고 같이 놀러 갔다 왔다는 게 부러워서겠지.”
이장의 말에 셋의 눈이 커졌다. 그랬다. 쌓이고 쌓인 서러움이 햄버거를 통해서 드러난 것이었다.
“그러니 똑같이 만들 필욘 없어. 학교 가서 자랑할 수 있게 맛나게만 해주면 돼. 어차피 옆 동네라고 해도 여기보다 조금 클 뿐이지 거기서 거기니, 맛도 잘 모를 거여.”
이장의 말에 일행들은 쓴웃음을 흘렸다.
씁쓸하지만 사실이었다.
“그 짝, 요리 잘한다며? 뭐든 이곳에서 먹지 못하는 걸 만들어주면 좋아할 거여.”
이장은 그리 말한 후 강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 그런 쓸데없는 고민은 하지도 말고 어여, 날짜나 잡아.”
“아.”
그제야 강현은 이장이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도 말이 없어.”
며칠이 아니다. 바로 어제였다. 하루라도 빨리 마을 사람들에게 강현을 소개해주고 싶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