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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신 자리에 앉아주세요
이 층으로 올라가자 설기가 강현을 반겼다.
“컹! 컹!”
“혼자서 심심했지? 미안해.”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
설기를 쓰다듬으려던 강현의 눈에 엉망이 된 안방이 들어왔다.
‘...심심하진 않았겠구나.’
옷장은 어떻게 열었을까? 강현은 못 본 척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자 술들이 쌓여있었다.
소주와 맥주, 막걸리까지.
어떤 걸 마실지 몰라서 골고루 사 온 것이었다. 적당히 챙겨서 아래로 내려가려던 강현이 설기를 돌아보았다.
“...”
“컹?”
다시 냉장고와 냉동고를 열어서 고기를 챙겼다.
이장이 준비한 고기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설기의 배를 채우기에는 부족할 거다.
“가자.”
“컹!”
설기가 쫄래쫄래 강현을 따라 일 층으로 내려왔다. 그러자 작업을 마치고 짐을 정리하고 있던 이장의 눈이 반짝였다.
“오오, 왔구나.”
이장이 손을 뻗었지만, 재빨리 피하는 설기.
그를 보며 이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고놈. 생긴 것만, 잘생긴 게 아니라 빠르기도 하네.”
손을 피한 것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민호는 일반 개와는 다른 외견의 설기를 보고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관심을 접었다.
그러던 이장의 눈에 강현이 들고 있는 술과 고기가 들어왔다.
“어유, 왜 이리 많이 가져왔어? 고기는 또 뭐고?”
“설기도 있어서 넉넉하게 챙겨왔어요.”
고기를 살피던 이장의 눈이 커졌다.
“...이거 소고기 아녀? 비싼 거잖아.”
말은 그리하면서 이장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민호도 놀란 눈으로 강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먹으려고 산 거라.”
“그래? 이럴 게 아니라 어서 먹자고.”
이장이 트럭에 실려있던 포대를 꺼내서 바닥에 깔았다. 그러자 민호도 포대 위에 가스버너와 불판을 올렸다.
커다란 솥뚜껑.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언제 가져왔는지 고기 봉지가 놓여 있었다.
여러 가지 부위가 섞인 돼지고기. 흔히 막고기라 부르는 것이었다.
팔고 남은 자투리를 모아놓은 것. 옆에는 채소와 된장도 보였다.
강현은 포대 위에 앉은 이장과 민호를 보다가 따라서 앉았다.
곧 민호가 솥뚜껑에 고기를 올리려고 하자 이장이 눈을 부릅떴다.
“어허. 소가 있는데 돼지부터 올리면 어떻게 혀? 집게 줘봐.”
민호가 자신이 하겠다고 했으나 이장은 기어코 집게를 빼앗았다.
치익.
고기가 올라가자 연기가 올라왔다.
셋은 익어가는 고기를 보며 술잔을 따랐다.
* * *
이어지는 술자리. 대부분 이장 혼자 떠들고 강현과 민호는 그저 듣기만 했다.
구워진 고기 절반은 설기의 입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고놈 참 잘 먹네!”
“컹!”
기특하다는 듯이 설기를 바라보는 이장. 설기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설기 역시 이제는 이장 곁에 붙어서 고기만 받아먹고 있었다.
이장에게서 술을 받은 강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근데 정말로 이걸로···.”
“충분해, 비싼 소고기도 얻어먹었는데. 그치?”
이장의 물음에 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그 짝은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겨?”
강현이 머뭇거리자 이장은 고개를 저었다.
“하긴, 이런 시골에 올 정도면 사정이 있겠지. 어쨌든 잘 왔어. 요즘, 젊은 애들은 전부 도시로 떠나기만 하니···.”
한숨을 내쉰 이장이 술잔을 따랐다.
“이제 나 같은 늙은것들만 남았어. 우리가 죽으면 마을도 사라질 거여.”
이장의 말에 강현은 할아버지 댁이 있는 동네를 떠올렸다.
이제는 빈집밖에 남지 않은 동네. 그를 보니 이장이 강현을 반기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긴 다들 사람이 좋아. 이런 동네가 또 없어. 기왕 왔으니 잘 살아. 정들면 도시나 시골이나 다 똑같아. 말은 안 하지만, 마을에 식당이 들어선다고 해서 다들 좋아혀.”
술잔을 털어놓은 이장은 무언가 떠올렸는지 탄성을 뱉었다.
“맞어. 중요한 걸 안 물었네. 근데 무슨 식당이여?”
“이탈리안이요.”
“이타, 뭐?”
“양식당입니다.”
강현의 말에 이장은 눈을 껌뻑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양식이면 미국 요리 말하는 건가?”
“예.”
강현이 대답하자 이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자, 잘 될 거여. 식당이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도 많구.”
앞과 뒤의 뜻이 전혀 맞지 않았다. 그러나 강현은 웃으며 넘겼다.
이런 반응은 이미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이장은 화제를 돌려서 마을의 좋은 점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려줬다.
그리고는 취기가 올랐는지 붉어진 얼굴을 절레절레 저으며 일어났다.
“내는 이만 가볼 테니. 둘은 더 있다 가.”
비틀거리며 떠나는 이장. 기분이 좋아졌는지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이장이었다.
설기도 이제는 배가 부른지 이장이 떠난 자리에 배를 깔고 누웠다.
조용해진 술자리.
하늘은 서서히 붉은 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술잔을 홀짝이던 민호가 입을 열었다.
“양식당이면, 혹시 그럼 돈가스도 팝니까?”
민호의 물음에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돈가스. 전에 있던 곳에선 만들지 않았다.
강현의 시선에 민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 마누라가 좋아합니다. 결혼 전부터 자주 갔었죠. 얼마 전에도 먹고 싶다고 말했는데, 읍내에 있던 식당이 문을 닫아서···.”
술이 들어간 탓인가. 처음보다 말이 많아졌다.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이던 민호가 말을 이었다.
“홑몸이 아니라서 멀리 나갈 순 없으니, 제가 만들어주긴 했는데, 맛이···.”
거기까지 말한 민호가 고개를 저었다.
“안 팔면 괜찮습니다.”
민호는 강현이 부담을 느낄까 봐, 말을 보탰다.
그리고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민호.
그때, 설기가 졸린 지, 강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강현은 그런 설기에게 시선을 던졌다.
망설임은 짧았다. 각오를 다진 강현이 입을 열었다.
“...아내분과 오세요. 팔진 않지만 만들 줄은 압니다.”
강현의 말에 민호가 손사래를 쳤다.
“괜히 저 때문에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강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해드리고 싶어요. 이번 일의 보답이라고 생각하세요.”
남을 위해 요리할 수 없다면 매장을 열 수도 없었다.
이건 자신에 대한 시험이기도 했다.
굳은 강현의 표정에 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
“편할 때 오세요. 열지 않았을 뿐이지 장비는 다 있으니. 아,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강현의 말에 민호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말씀해주십시오.”
아내에게 돈가스를 먹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현의 부탁은 민호의 예상과는 달랐다.
“아내분과 먹었던 돈가스.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사소한 것도 상관없습니다.”
강현의 말에 민호의 눈이 커졌다.
* * *
다음 날. 강현은 읍내에 나가서 장을 봐왔다.
민호가 아내를 데리고 오는 건 이틀 뒤. 그때까지 돈가스를 완성해야 했다.
‘단순히 맛있는 돈가스여서는 안 돼.’
아내가 좋아하는 건 결혼 전부터 민호와 함께 나가서 먹었던 돈가스일 거다.
추억.
강현이 먹었던 돈가스에 대해서 알려달라고 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긴 해도 너무 오버했나?”
강현은 주방 안에 가득 쌓인 식자재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강현의 눈에 홀이 보였다.
창문 너머로 햇살을 받으니 아득한 느낌이 흘러나왔다.
처음 강현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나았다.
이장과 민호의 덕분이었다.
홀을 확인한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앞치마와 조리모를 쓴다. 그리고는···.
“그럼, 잘 부탁해. 파트너. 먼저 지치면 안 된다?”
“컹!”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씩씩하게 짖는 설기.
꼬리를 흔드는 설기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오늘의 시식 담당이자 잔반 처리 담당이었다.
그런 설기를 보며 미소 지은 강현이 식칼을 잡았다.
그와 함께 강현의 눈빛이 바뀌었다.
강현의 머릿속에는 민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재작년에 문을 닫은 낡은 돈가스집.
무려 십 년도 더 된 집이라고 했다.
“수프는 일반 크림수프와는 달랐습니다. 냄새는 뭔가, 좀 더 담백하다고 해야 할까. 아, 안에 무언가가 씹혔어요.”
수프는 쉬웠다.
‘감자야.’
감자를 넣은 크림수프. 그것만으로 맛이 풍성해진다.
그러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소스는 갈색보다 붉은색에 가까웠는데. 음···.”
민호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전문가도 아니라 양식 경험도 적은 일반인이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토마토를 넣은 것 같긴 한데 신맛이 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단맛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토마토?’
붉은빛도 그 때문이었다. 강현의 머릿속에 소스 하나가 떠올랐다.
데미글라스 소스.
양식을 시작하면 가장 처음 배우는 소스. 그만큼 잘 알려진 소스이기도 했다.
강현은 루를 볶기 시작했다.
* * *
“어때?”
강현의 시선이 설기의 꼬리로 향했다.
“컹! 컹!”
소스를 먹은 설기의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이제는 설기의 반응이 파악되었다.
저렇게 살랑살랑 흔들리면 나쁘지 않다.
격해질수록 맛있다는 뜻이었다. 최고는 꼬리뿐만이 아니라 방방 뛰는 것. 거기까지 가는 일은 드물었다.
소스만으로 저런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남아있었다.
“토마토 맛이 느껴져?”
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느껴진다.
설기의 말에 강현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벌써 이틀째. 신맛을 없애기 위해서 약한 불로 볶았으나 토마토 본연의 맛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설기는 미각이 예민하다지만.’
동물답게 감각이 발달했다. 전문가 수준.
반대로 민호씨는 수프에 든 감자조차 구분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무언가가 걸렸다.
그렇게 강현의 고민이 더욱 깊어가던 도중, 강현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번뜩였다.
“잠깐만 단맛?”
미각이 둔감한 민호라도 느낄 정도의 단맛.
시골의 영세한 매장이 토마토 페이스트를 쓸까?
‘케첩인가!’
그렇다면 민호가 단맛을 느낀 것도 이해가 되었다. 토마토 페이스트를 직접 쓰는 것보다 맛이 튈 거다.
“다시 한번 해보자. 부탁해.”
“컹!”
맡겨두라는 듯 힘차게 짖는 설기.
이틀째, 돈가스만 먹었으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있었다.
‘...고마운 일이지.’
문뜩, 집에 쌓여있는 개 사료와 고양이 사료를 떠올렸으나 애써 외면했다.
강현은 다시 팬을 들어 올렸다.
* * *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약속한 날.
‘...겨우 맞출 수 있었어.’
강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계를 보자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를 자각하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떨리는 손.
작게 심호흡했다. 그러나 떨림은 사라지지 않고 더욱 커져만 갔다.
그때.
“끼잉, 낑.”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아래를 보니 강현의 발에 설기가 몸을 비비고 있었다.
‘...그래, 난 최선을 다했어.’
어떤 결과가 나와도 받아들일 뿐이었다.
강현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설기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 이제 괜찮아.”
떨림은 멈췄다. 그와 함께 문에 그림자가 나타났다.
딸랑딸랑.
문이 열리고 민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예정보다 조금 이른 시간.
그런 민호를 뒤따라오는 건 배가 부른 여인이었다.
나이는 강현과 비슷할까?
동글동글한 인상에 눈꼬리가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바로 민호의 아내인 수진이었다.
“어머, 진짜네. 우리 마을에 이런 곳이 생기다니···.”
만삭인 수진은 신기한 듯 매장을 둘러보다가 강현을 발견하고 미소 지었다.
“내 정신 좀 봐. 안녕하세요.”
“...조금 빠른데 괜찮습니까?”
“제가 닦달해서 일찍 왔어요. 기다리기 힘들어서.”
무뚝뚝한 민호를 대신하여 살갑게 이야기를 꺼냈다.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편하신 자리에 앉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