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 DDay까지 6일
* * *
내가 그걸 확인한 건, 샤워하고 나온 뒤의 일이었다.
...멀쩡하게 하루가 끝나고 샤워한 건, 오랜만이라 조금 낯설다.
자연스럽게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는 마법 소녀 능력에 의존하고 있었으니까.
밖으로 나오자 상당히 갈아입을 속옷과 파자마가 그곳에 있었다.
"..."
멀뚱멀뚱 잠시 그걸 바라본다.
팬티야 그냥 여성용이든 말든 입으면 되는데, 제대로 된 브래지어는 처음 본다.
"렌, 혹시..."
[마법으로 만드는 게 낫지 않습니까?]
"음..."
확실히 그게 나으려나.
그저 가슴을 보호하기 위한 용도라면, 이런 건 필요 없으니...
"이때까지 마력으로만 만드니까 할 줄 모르지. 이리 와."
내가 렌이랑 떠드는 소릴 들은 걸까.
욕실 문을 열어 들어온 세희가 자연스럽게 내 손에서 속옷을 뺏어가더니, 양팔을 들게 한다.
자연스럽게 입혀보다가 흐음... 하면서 맞추는 데 실패하는 모습.
...이거, 가슴 크기가 안 맞다.
"생각보다 작구나. 스포츠 브라로도 충분하려나..."
"그냥 마력으로 만들게."
"안 돼. 그러다가 상혁이한테 뭔가 당할 테니까."
"..."
러브 코미디 세계라서 다양한 사건이 일어나는 모양이네.
우연찮게 서비스 신이 나온다든가 그런 사건이 자주 일어나는 모양이다.
"내일 나랑 같이 쇼핑하러 가자. 여자애가 무슨 마력으로 만든 옷만 입고 있어?"
"그게 실용적..."
"제대로 입어야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마력 사라지면 어쩌려고? 알몸으로 싸우게?"
"..."
디스펠 필드에서도 마력이 해제되지 않는데, 별걱정이란 생각밖에 안 들지만,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제대로 안 들어주겠지.
그냥 잠깐 어울려주고 그녀의 마음이 풀리면 좋은 일이다.
"응, 됐다."
어디서 들고 온 스포츠 브라를 입히고 그대로 파자마까지 입히고 나서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고양이 파자마라니 마이너한 취향이네.
"이거 누구 거야."
"응? 내 거."
그렇게 말하는 그녀가 입고 있는 건, 분홍색 실크 파자마.
평소의 트윈 테일이 아니라 평범하게 긴 생머리를 하고 머리띠를 한 소녀를 보며, 내가 말했다.
"오늘은 빨리 자."
"...너 내가 안 자는 거 너무 신경 쓴다?"
그림에나 나올 법한 동양풍 미인 아가씨네.
이런 미인이 스스로 고통받으면서 살고 있다니, 어떤 세계인 걸까 여긴.
[응, 내가 연락해달라고 했어.]
[아, 받았네. 뭔데? 너 누군데?]
잠깐 답할 내용을 고민하다가, 생각난 걸 그대로 입력했다.
[조력자.]
[조력자?]
[다른 세계에 들어가서 너를 도와줄 사람이야.]
내 문자를 읽었지만, 생각하는 건지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생각하는 중인 걸까?
[그쪽 세계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 거야?]
[...잘은 모르는데, 유린이가 휘말린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
[유린이를 알아?]
[응. 내 친구.]
[...그래, 정말 유린이가 휘말리는구나.]
그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방금 그 대답은 이상하지 않아...?
[루퍼인데, 이면 세계에 유린이가 들어간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건 이상하군요.]
그래, 그 점이 이상하다.
그가 가진 능력은 시간 관련 능력.
여러 번 루프했는데, 그 루프동안 유린이를 한 번도 보지 못한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기억을 계승 받지 못한다...?"
루프할 때 기억을 잃어버린다.
그런 전제라면, 설명 가능한 메세지다.
[기억하는 거, 없는 거야?]
[...어떤 애가 얼추 설명해줬는데, 솔직히 믿기진 않아.]
[네가 능력을 가진 건, 틀림없을 거야. 보증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세희와 관찰자인 아이가 보증했다.
이 아이가 내가 갈 세계의 주인공이라고.
그렇다는 건, 그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건 틀림없는 사실일 터.
[영 안 믿기는데, 쓰는 법도 모르겠고.]
[나도 자세히는 몰라. 너한테 설명해줬다는 아이, 혹시 데려올 수 있어?]
[뭐, 이 마을 사람들이면 다들 아는 사람이잖아? 세연이라는 애야. 한번 연락해볼게.]
"?"
세연이...?
"그건 동명이인이겠지. 세연이가 혼자 나간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시우와 약속을 잡은 다음 날.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하자, 세희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한다.
동명이인이라면 납득 가능이다.
애초에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게 정말로 세연이라면, 그녀도 뭔가 능력을 가지고 있단 의미일 테니까.
"하긴, 최근 수상한 게 없진 않으려나."
"수상한 거..."
"동명이인이 아니면서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네."
[동명이인이 아니면서 다른 사람이라면...]
"그래, 대놓고 있잖아. 패러렐 월드에서 온 주민이."
"아."
확실히 차원의 틈이 있으니까, 저쪽 세계의 세연이가 넘어온 걸지도 모른다.
저쪽 세계에도 세희가 있는데 그쪽이 멸망할 상황인 거라면... 감당 가능할지 의문인데.
"걱정 마. 저쪽에 내가 있을 가능성은 없어."
"..."
"저쪽에 내가 있으면 애초에 그 틈 존재하지도 않았을 거고, 멸망할 사건은 일어나지 않아. 그도 그럴게, 나를 이길 신령은 없거든."
아예 단언해버리는 세희를 보며, 나는 눈을 깜박인다.
...공간을 베어버린다든가, 이것저것 쓰는 괴물이 있으면 지지 않을까?
"영혼을 다루는 기술로 나를 죽이는 건 무리고, 공간을 깨거나 베어버리는 기술도 나를 죽일 수 없어. 내가 있던 세계가 완전히 소멸해도 나는 죽지 않아. 현재 존재하는 신령 중에 내 영력을 뛰어넘는 녀석은 없으니까... 무엇보다 내 영혼은 복사할 수 없거든."
[패러렐 월드라고 해도 한 명 이상 존재할 수 없단 의미입니까?]
"그건 아냐. 내가 인식하지 못한 세계에는 여러 명의 내가 있을지도 몰라. 적어도 '내가 인식한 세계'에서 나는 여러명 존재할 수 없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나는 현천계 출신이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아예 그곳에서 만들어진 영혼이니까."
[...그건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영혼 세계에서 영혼이 태어난다니, 있을 수 없는 소리입니다만? 인공 영혼입니까? 인공 영혼은 신령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말 중에 가장 현실성 없다는 것처럼, 렌이 단언한다.
그녀의 말에 내가 눈을 깜박이지만, 세희는 어깨를 으쓱할 뿐.
"믿기지 않으면 안 믿어도 돼. 딱히 해명할 이유도 없으니까. 그냥 현실을 이야기한 거뿐이야."
"이야기가 샜어."
"그래, 중요한 건, 또 다른 세연이가 있지 않을까라는 점이네."
또다른 세연이가 이쪽 세계로 내려왔다.
그건 귀여운 사람이 2명이 됐다는 의미...
"..."
어라? 좀 이상한데.
어디서 괴전파를 받은 느낌이다.
[러브 코미디 세계관에 전염되고 있군요.]
"러브 코미디는 무슨...라고 하고 싶은데, 비슷하네. 하아..."
이미 그런 상황이 많이 벌어졌는지, 포기하곤 납득하는 세희였다.
"내일은 나랑 같이 움직이자."
"같이..."
"응, 너도 이런저런 사건을 부를 거 같으니까."
"..."
[반박은 못 하겠군요.]
"내 입장에선 반박해줬으면 좋겠는데..."
"여기는 평화로운 세계니까, 아무 일도 없지 않을까."
[어제 마스터가 만난 사람은 누구죠?]
"미류."
"응, 거기까지만 말해도 알겠어. 보나 마나 미류가 마력 확인하고 말 걸고, 이런저런 정보 줬겠네."
"..."
억울한 말이다.
그게 사실이라곤 하지만.
"일정은 없는 거야."
"일정이 있어도 이건 우선순위에 둬야지. 우리 세연이랑 똑같은 얼굴로 무슨 일 하고 있을 줄 알고."
"아."
의외로 같이 다니는 이유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유였다.
마을에 있는 놀이터 중 하나.
휴식을 위해 만들어진 정자에 한 남자와 조그마한 소녀가 과자를 먹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어깨까지 오는 단발을 가진, 세연이.
남자는 투블럭으로 머리칼을 밀고, 머리칼을 오른쪽으로 넘긴, 전형적인 고등학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허면, 시우 오빠야랑 연락한 그 여자랑 만나면 되는기가?"
"조력자라고 하던데, 들은 적 있어?"
"없데이. 전혀 금시초문이다."
"흐음..."
시우라고 불린 남자가 머리를 잠시 긁적이다가, 이내 모르겠다! 하면서 정자에 풀썩 누워버린다.
그러자 그런 그를 한심하다는 얼굴로 바라보더니, 손에서 자연스럽게 그의 핸드폰을 만들어낸다.
"...그거 핸드폰도 만들 수 있었어?"
"뭘 그리 놀라노? 부품만 있으면 뭐든 만들어낼 수 있데이."
"부품만 있으면...? 누구 능력인데?'
"하이고, 지가 지킨다고 말한 사람 능력도 모르노."
"유린이 능력이구나..."
아직도 능력에 대해서 감도 못 잡은 탓인지, 신기한 눈으로 소녀의 능력을 바라본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게 있는지, 몸을 일으키면서 그가 말했다.
"잠깐만, 부품만 있으면 만들 수 있다고?"
"그렇데이?"
"근데 그거 내 폰이지?"
"그럼 누구 폰이고?"
"부품은 어디서 났는데...?"
"당연한 거 아이가? 유심 칩 좀 썼데이."
"야!?"
능청스럽게 세연이가 말하자, 시우는 경악하면서 폰을 연다.
그곳에 보이는 건, 개통되지 않았다는 메세지 뿐.
세연이 손에 있는 휴대폰을 얼른 뺏으려고 하지만, 어느새 그녀는 정자 위의 지붕으로 올라서있었다.
"내용만 좀 보고 줄 테니께, 걱정하지 마라."
"아니, 내 폰 내용물도 그대로 적혀 있어!?"
"같은 폰인데 안 적혀 있을 이유가 있나?"
"쓰으으읍..."
"오, 야한 거도 있나. 생각보다 이것저것..."
"멈춰!? 억까 멈춰!?"
"휴대폰에 야한 거 들고 다니는 사람 처음 본다 안카나."
깔깔 거리면서 시우를 놀린 세연이가 잠깐 코톡 내용을 보고 생각에 빠진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어쩐지 시우가 조용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가 아래를 보자, 애써 시선을 외면하곤 자신의 폰을 만지는 그가 눈에 띄었다.
"뭐고, 인터넷도 안 되는데 뭘 그리 열심히 하노?"
"그, 뭐야."
"응?"
"일단 내려오지 않으련?"
"굳이?"
"아니, 그..."
차마 말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히는 시우를 보며, 세연이는 눈을 깜박이다가 자신의 옷을 바라본다.
검은 긴 팔 셔츠에 브라운색 치마.
검은 스타킹에 분홍색 구두.
...평소대로 입은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현재 시우의 위치와 자신의 위치를 계산한다.
그리고...
"변태가..."
"누가 변태냐 누가."
얼굴을 확하고 붉힌 세연이가 바닥으로 순간이동 하면서 중얼거린다.
자기도 부끄러웠던 건지 시선을 피하는 모습.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흐른 후, 먼저 크흠. 하면서 목을 다듬은 세연이가 말했다.
"그래서 몇 시에 만나는 기고? 시간 안 정한 거 아이가?"
"응?"
세연이가 그렇게 말하곤 휴대폰 유심을 건네자, 시우는 자연스럽게 휴대폰 유심을 꽂으며 코톡을 확인한다.
"아, 그러네?"
"바보아이가?"
"시끄러."
그렇게 말한 뒤 시간과 장소를 묻는 코톡을 보내지만, 답변은 오지 않는다.
한참 떠드는 것만 30분.
읽었다는 표시조차 뜨지 않는 모습에 한숨을 내쉰 시우가 말했다.
"야."
"뭐고."
"너 잘 데는 있냐?"
"...폰에 이상한 거 넣고 다닐 때부터 예상했데이. 돈 있으니까 모텔에서 자면 된데이?"
"날 뭘로 보는 거야?"
"팬티 보는 변태."
"아니거든?!"
그렇게 소리친 시우가 말했다.
"그럼 잘 곳이라도 알려주고 가던가. 시간 정해지면 내가 가서 알려줄게."
"필요읎다. 내가 아침에 찾아갈 거래이."
"그러던가."
"그럼 내일 보제이."
그렇게 말한 세연이가 먼저 사라지고, 잠시 조금 더 기다리던 시우 역시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음 날 아침.
문자가 온 걸 확인한 나는 잠시 고민한다.
오전으로 할까, 오후로 할까...
오전으로 하면 만날 애들하고 좀 오래 있을 수 있고, 오후로 하면 오전 시간을 다른 곳에 쓸 수 있는 장점이 있겠지.
[오전으로 하는 게 어떻습니까? 다른 세계에서 온 세연이가 아군이라는 보장이 없으니, 좀 길게 보면서 파악해야겠죠.]
"오후로 잡고 백화점 들렸다가 만나는 게 낫지 않아? 어차피 백화점 가기로 했으니까, 거기서 만나면 되고."
렌과 세희의 말에 좀 더 고민.
...백화점에 미련을 버려주면 참 좋을 텐데.
쉽지 않네.
그럼...
1. 오전에 만나서 다른 세계의 세연이를 파악하기로 했다.
2. 오후에 만나서 쇼핑 후에 카페에서 모이기로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