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DDay까지 7일
* * *
현재 시각은 오후 4시.
이야기가 끝나고 나온 세연이랑 놀아주다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
...아까 이야기상, 사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긴 한데.
"언냐아~ 좀 더 놀아요오~"
"..."
곤란하단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다.
내가 어딘가로 가려 할 때마다, 눈동자가 흐려지는 게 안쓰럽다.
세희한테 좀 놀아주라는 것처럼 바라봐도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있을 뿐.
옆에 쌓여있는 종이 더미가 무거워 보인다.
[저희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이니, 다소 미움받는 건 감수해야겠죠.]
"...미안해, 언니가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또 놀자."
내 말에 소녀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착한 아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의견을 한 번 밀어보고, 정말로 상대가 곤란해 보이면 자기 의견을 내릴 줄 아는 모습.
아마 세희가 매일 바쁜 사람이라 배운 행동이겠지.
여러모로 안타깝지만, 지금은...
삐빅
그런 생각을 할 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들어온다.
...루시에르.
여기선 최 상혁이라고 불리는 남자와 처음 보는 여자애가 손을 흔들면서 등장한다.
포니테일에 장난기 가득한 눈동자.
입은 해맑게 웃고 있으며, 뺨에는 홍조가 가득한 검은 머리칼의 소녀가 있었다.
눈동자도 검은색이고, 딱히 마력을 지니진 않은 일반인이다.
[저희 세계에선 본 기억이 없는 얼굴이군요.]
"..."
굳이 알아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냐옹냐옹~ 미아쨩 등장! 놀러왔다... 으엑?! 뭐야!? 외국인이 있어!?"
"...미아, 그거 실례 아냐? 안녕하세요? 헬로우?"
"...한국어로 좋아."
외국인 취급도 실례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내 말에 미아와 상혁이가 둘 다 놀란 모습을 보이다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연인일까?
그렇다기엔 상혁이는 샤브린이랑 유린이가 있을 텐데.
[이 세계에선 다를 지도 모르잖냐?]
"..."
그야,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좀 그러네.
뭔가 찝찝하다.
"미아 언냐!"
"세연아!"
"미아 언냐!"
"세연아!"
"와아아앙!"
"야아아앙!"
"..."
양손을 뻗으면서 소리친 두 사람이 서로 끌어안고, 그걸 묘한 눈으로 바라보자 상혁이가 말했다.
"아하하, 좀 시끌시끌하지? 미안."
"아냐."
"세희, 너 괜찮아? 학생회 업무가 아직도..."
"괜찮아. 이건 지금 끝내야 할 사항들은 아니라서. 그냥 미리 정리해놓은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노트북을 닫아두는 세희.
지금 작업 가능한 상황이라 판단한 모양이다.
"그... 쟨 누구야?"
"길 잃은 애...?"
"왜 의문형인데."
"일단 잘 곳이 없어 보여서 데려왔어."
"...버려진 동물도 아니고 미아된 사람을 주워왔냐."
두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는 장난스런 표현을 보며, 눈을 깜박인다.
아, 이거 왠지 알 거 같다.
여기 러브 코미디 세계관인가?
[일리가... 있습니다.]
[어차피 이쪽이 아니라 다른 세계라면서? 상관없는 거 아니냐?]
[무엇보다 루시에르는 아직 자기 힘을 각성하지 못한 상태군요. 이쪽 세계관에 전투가 없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럴 리가. 그러면 저 사신 녀석도 힘이 없어야지. 인간 상태로 사신화라니, 터무니없다고.]
"..."
세희가 시끄럽다는 것처럼 눈치 주는데.
아무튼, 두 사람의 의견은 둘 다 일 리가 있다.
나중에 물어보기로 하고...
"그럼 내 방에서 재울까?"
"...여자애를 네 방에?"
"뭔가 의미심장하게 말하지 마라? 난 마루에서 잘 거니까."
"...아냐, 그냥 내 방에서 재울게."
"너 평소에도 피곤해하잖아."
"저기 봐, 세연아. 언니랑 오빠 또 사랑싸움해."
"언냐랑 오빠야랑 사겨?"
"...그건 그거대로 좀 그런데?!"
"아니거든!?"
응, 이거 러브 코미디 맞네.
나를 제외하고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전개를 보며, 어쩐지 맞지 않는 곳에 온 기분이 든다.
여긴 평화롭구나.
이런 곳에서 살았다면, 설이는 나를 부르지 않았겠지.
...이쪽 세계에도 설이가 있을까?
[있겠죠. 패러렐 월드라고는 하지만, 세계의 기반은 같으니까요.]
"평화롭게 살고 있겠네."
[그렇네요... 그렇지 않을까요.]
"?"
뭔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렌이었다.
"나는 류 미아! 무지무지 기분파인 잉여 인간이야! 잘 부탁해!"
"난 최 상혁이야. 음... 뭐, 그냥 평범한 학생?"
"...유 설이야. 설이면 돼."
내가 무표정하게 답하자, 아린이가 반짝이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어쩐지 세연이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귀여워어어어어!"
"..."
"야야, 곤란해하잖아."
"보들보들해!? 부드러워!? 뭐야, 이 초 귀여운 생물은!"
"우와, 저런 상황에도 표정 변화가 없네. 그건 그거대로 대단한데."
세희의 감탄사가 들리지만, 그저 반응만 없을 뿐.
굉장히 부끄러운 상황이다.
여자애가 됐다고 여자애한테 크게 면역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뺨을 비비면서 가슴까지 들이대는 건...
"다 좋은데."
"응응! 뭔데뭔데!?"
"무거워."
뚝.
내 말에 그대로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미아.
시선을 옮기자, 눈에 절망감에 가까운 감정이 새겨진 게 눈에 띈다.
...어라, 뭔가 건드려버렸다.
[마스터가 잘못했군요.]
[주인이 잘못했네.]
대체 뭘?
"무, 무, 무거워...?"
"응, 가슴이 무거워."
"...응? 아, 응응, 그렇구나?! 가슴 이야기구나!? 난 또!"
아무래도 몸무게 이야긴 줄 알았던 건지, 활짝 웃으면서 옆에 앉는다.
그녀를 따라 그 옆에 나란히 앉는 세연이.
어째서일까.
아까 든 시간만큼 추가로 시간이 들 거 같은데.
"방송은?"
"응? 진작 끝났지~ 잠깐 오락실 갔다 온 거야!"
"...방송."
"앗, 아하하... 내 취미가 방송이라서."
어색한 미소와 함께 시선을 피하는 그녀를 수상하게 바라보지만, 대답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뭐, 굳이 알 이유는 없으니까... 넘어가자.
시간을 보니 벌써 5시.
...나가긴 글렀다.
"생각해보니까 미아구나."
"응? 맞아요~ 류 미아예요~"
"류 미래랑 자매야."
"응? 미래가 누군뎅?"
"아니구나."
"으~응? 누구 이야기지?"
"...내 친구 이야기야. 이름이 비슷하긴 해."
"아항?"
세희의 말에 그녀는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어떻게 봐도 자매 이름 돌림인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둘다 분위기도 그렇고 비슷한 느낌인데... 아니, 이건 미아한테 실례일지도.
"이 시간에 집에 왔단 건 밥 먹고 갈 거란 소리지?"
"예스! 세희 셰프! 부탁해요!"
"음... 그럼 재료가 부족하려나. 잠깐 장 보러 다녀올게."
"앗, 같이..."
"아냐, 설이만 데려갈게."
"칫, 맛난 거 잔뜩 주워오겠다는 내 계획이 무너졌어!"
"세연이랑 놀아줘."
"알겠습니다!"
"미아 언냐가 놀아주는 거야?"
"그럼!"
"와아!"
정말 합이 잘 맞는 두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여자 둘이서 괜찮겠어? 나도..."
"누구한테 하는 말일까, 그거."
"미안, 그렇긴 하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지, 세희의 말에 곧바로 상혁이가 수긍한다.
표정을 보니 그냥 세희한테 뭔가 시키는 게 미안한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능력자치곤 상당히 피곤해 보인다.
"저녁 뭐 먹고 싶어?"
"카레!"
"돈까스!"
"...저러면 카레 돈까스면 되지 않을까."
"알겠어."
상혁이의 말에 세희는 장바구니를 하나 들고 신발을 신는다.
그 모습에 따라 신발을 신는 나.
그걸 가만히 바라보던 상혁이가 말했다.
"진짜 조심해야 한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걱정도 팔자야. 알겠어. 바로 연락할 테니까."
"너 쓰러진 적 있잖아."
"...요즘 그 정도로 무리하진 않아."
우와, 정상급 능력자가 과로로 쓰러졌다는 말을 들은 거 같은데요.
내가 잠시 세희를 바라보자, 그녀는 시선을 피하면서 먼저 문을 나선다.
...뭘 어떻게 했길래 능력자가 과로로 쓰러진 걸까.
"일단 그 녀석은 서점에 자주 나오는 애야."
"서점."
"응, 유린이가 거기 있으니까. 뭐, 우리도 많이 가긴 한데..."
고민하듯 잠시 말을 멈춘 세희가 말했다.
"일단 장 보고 나서 혹시 유린이 보이면 시간 맞춰달라고 할게."
"응."
"...상혁이가 유린이한테 신경 못 썼나? 왜 이상한 세계로 끌려가는 걸까."
고민하는 쪽은 아무래도 일어날 '사건' 쪽인 모양.
다른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인 만큼, 그녀로서는 예민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아까 언뜻 느낀 것도 공간을 다루는 사신이라는 거였고.
...생각해보면 아까 공간의 틈을 막아서 다른 세계의 간섭을 차단했다고 했지.
막지 못한 틈이 있는 게 아닐까?
세희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이 동네는 과하게 마력이 몰려있는 게 눈에 띈다.
ㅡ차원의 틈이 없다면, 성립할 수 없는 구조다.
이걸 말해줘야 할까?
[주의) 방금 깨달은 사실을 알린다면, 세계 진입 실패로 퀘스트가 자동 실패하게 됩니다.]
"..."
내가 혹시나 말할 거라고 생각한 건지, 시스템 메세지가 급하게 날아온다.
그렇구나, 세희한테 그걸 자각시킨 순간, 그쪽 세계로 진입할 방법이 영영 사라지는 모양이다.
...하지만.
"세희."
"응? 뭔데."
"네가 약속 하나를 지킨다면, 사건이 일어나는 이유, 말해줄 수 있어."
"...뭐?"
내 말에 세희가 얼굴을 찌푸린다.
말해줘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녀가 나중에라도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이유?"
"응."
"무슨 약속인데?"
"내가 말해주면, 내가 진입할 때까지 원인을 제거하려 하지 말 것."
"...무슨 소리야. 유린이가 죽을 가능성이 있는데, 막는 게 당연하잖아."
"안 돼, 그럼 내가 이 세계에 있을 수 없게 돼."
내 말에 세희는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 목숨이 더 중요하잖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는 세계 자체를 걸고 들어왔어."
"...!"
"내가 실패하면, 세계를 구할 방법이 사라져. 그래서 안 돼."
"...그건, 정말, 귀찮은 일이네..."
다른 세계라곤 하지만, 그걸 구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 있다.
영웅.
세계 자체를 구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을 칭하는 또 다른 이름.
아까 렌에게 들은 신령 회수 사신이라면, 그 무게를 잘 아는 사람이리라.
그렇기에 세희는 고민하다가, 문득 나와 눈동자를 마주한다.
"그럼 아예 말을 안 했으면 됐잖아. 왜..."
"내가 떠나고 나서 원인을 제거하면 될 테니까."
"...그 후에도 제거할 수 있다고?"
"유린이는 내가 지킬게.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든. 나도 아는 사람이라서 죽는 걸 원하지 않아."
"마법 소녀 말이라서 썩 신뢰가 가는 이야기네."
내 말에 씁쓸한 미소만 흘린 세희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수긍의 의사.
...이름을 걸고 약속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여기선 신뢰할 수밖에.
"루니아 세르넨으로서 맹세할게."
"...아, 응. 고마워. 순환시로 느낀 건데, 허공에 마력 근원 같은 게 뭉쳐있어."
"응? 아, 그거... 이쪽 세계가 좀 비틀린 세상이라 그래. 세계에 마력이라는 게 대부분 동네 하늘로 모여들거든. 여기가 사건 중심지라 그런가."
"...곤란하겠네."
"그러게나 말야..."
"응, 차원의 틈이 없으면 저런 건 불가능하니까. 중심지에 있을 거야."
"그렇... 뭐라고?"
하늘 쪽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건지,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리곤 눈동자만을 붉게 물드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
내 말이 사실이라는 걸 깨달은 건지, 그녀는 그저 허탈한 웃음만 입에 담을 뿐이었다.
"그럼 유린이가 위험에 처하는 건... 나 때문에?"
"그건 아냐. 아포칼립스가 일어나는 게, 더 위험하니까."
유린이가 죽을 위험은 적겠지만.
뒷말을 숨긴다.
"하지만 내가 실수만 안 했어도..."
"실수라기엔, 이미 큰일을 했어."
"...후, 알았는데도 못 막는 건 좀 힘드네."
"미안."
"아니, 알려줘서 고마워. 일이 끝나면 바로 막아야겠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세희가 어쩐지 묘하게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자책이 심한 아이다. 피곤한 이유를 어쩐지 알 거 같다.
"능력잔데 굉장히 피곤해 보이네."
"...그렇게 피곤하진 않은데?"
"수면시간은 채우는 게 좋아."
"하루 3시간이면 충분히 자는 거지, 할 게 많..."
"더 자."
아, 이 사람 워커 홀릭이구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