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DDay까지 7일
* * *
세희를 따라 도착한 것은 평범하다면 평범한 2층 주택.
...원래 세계로 따지면 이런 집도 제법 돈 나갈 텐데.
자연스럽게 그녀가 집에 들어서자, 안쪽에서 한 소녀가 쪼르르 달려나온다.
"언니!"
"얌전히 있었어, 세연아?"
"응! 언냐도 괜찮아? 힘들지 않앙?"
"..."
잠깐만, 나 지금 성격 갭 때문에 혼란 왔는데.
딱딱하고 사람을 믿지 못하던 세연이 혀짧은 소리로 어리광부리고 있다.
[다른 사람... 혹은 아직 아포칼립스가 올 연도가 아닌 걸까요. 저희가 봤던 세연과는 나잇대가 다르군요.]
"이 사람은 누구양? 언냐 엄청 예쁘당!"
"...응."
내 앞까지 와서 해맑게 웃는 소녀를 보며, 무표정을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저 외모로 저런 말투 쓰니까 귀엽긴 하네.
언니를 따라 한 건지, 붉은 리본으로 짧은 트윈 테일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띈다.
언니를 굉장히 좋아하는 거겠지.
"저느은~ 이 세연이에요! 언냐는 이름이 모에요?"
"스... 아니, 유 설이야. 잘 부탁해."
"웅!? 언냐 한국인이에요?"
"혼혈이야."
"우아..."
내 말에 감탄하듯 눈을 반짝이는 세연이.
한참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자, 세희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손님 문 앞에 세워놓으면 안 돼, 세연아."
"앗! 언냐! 이쪽으로 와영!"
세희의 말에 나를 거실로 안내하는 세연이.
...내가 뭐하러 온 건 줄 알고 이렇게 자연스럽게 대하는 건지 모르겠다.
"상혁이는?"
"오빠야? 오빠야는 미아 언냐랑 할 일 있다고 늦는댔엉!"
"흐응... 미아랑... 아, 커피랑 차 중에 뭐가 좋아?"
"커피."
"그래, 앉아있어. 할 이야기도 좀 있겠네."
세희의 말에 나는 머뭇거리면서도 소파에 앉는다.
그러자 헤실 거리면서 내 옆에 앉더니, 빤히 바라보는 세연이.
...내 얼굴에 뭐라고 묻은 걸까.
"상혁 오빠야 친구예요?"
"상혁..."
어디선가 들었던 이름 같은데.
[루시에르 한국 이름 아닙니까?]
"아."
모에요, 여기 루시에르 집이었소요?
그렇다고 하기엔 루시에르한테 세희&세연 자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
애초에 친한 사이였으면, 유린이, 샤브린만 데려오는 게 아니라 전부 데려왔겠지.
"아는 사이... 까진 아니야."
"어라? 그럼 언냐 칭구? 신기하넹!"
"...신기한 거구나."
"응! 언냐는 매일 뭘 하는지 바쁘니까~ 세연이는 매일매일 심심하답니당."
"..."
너무 귀여운 척해서 적응 안 되는데, 실제로 귀여운 게 더 거북하다.
탑 바깥으로 돌아가면 세연이한테 꼭 해보라고 해야지.
절대 안 하겠지만.
"여기, 쿠키도 먹을래?"
"응, 고마워."
"별 말씀을. 세연아 이리온."
"응!"
그 말에 꼭 달라붙는 세연이와 다정한 미소를 입에 담으면서 쿠키를 주는 세희.
...왠지 가시방석처럼 불편한 건, 나만 그런 거겠지.
가족.
가족인가...
처음 보는 가족애가 굉장히 낯설면서도 부럽다고, 그렇게 생각해버리고 만다.
[...어이, 주인은 원래 어떤 삶을 산 거냐?]
[글쎄요, 저도 원래 세계의 기억 자체는 알 수 없어서... 프로게이머로서 활약했단 건 알고 있습니다만.]
"..."
다 들린다.
목소리를 낮춰서 소곤대는 두 사람의 대화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곤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담는다.
응, 쓰면서도 달다.
아무래도 세연이한테도 같은 커피를 만들어주다 보니, 쓴맛보다는 단맛을 강하게 만든 거겠지.
...나도 단 걸 좋아하니까, 이득이다.
"먹으면 양치해야 한다? 숙제는 다 했어?"
"치 언냐는~ 방학 숙제는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거랍니당!"
"미리미리 끝내놔야지."
"부부~ 기간 안에만 다하면 되지롱."
"혼난다."
"으앙! 설 언냐, 세희 언냐가 무서워!"
세희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내 뒤로 쪼르륵 와선 숨어버리는 세연이.
내가 세희를 바라보자, 그녀는 그저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리광이 좀 많아서."
"응, 그래 보여."
"웅? 언냐들 친구 아냥?"
"...친구야."
"...으응, 친구지."
어쩐지 아니라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에 수긍하자, 그녀 역시 떨떠름한 표정을 보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수긍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웅...? 잘 모르겠당! 세연이는 착한 아이니까 언냐 말을 잘 듣는 거야! 숙제하고 있을 테니까, 얘기 많이 행!"
"응? 아... 미안, 세연아."
"아냥아냥~ 뭔가 할 이야기가 있는 거징? 세연이는 다 알고 있다구요! 엣헴!"
그렇게 말하면서 싱글벙글 웃더니,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모습.
전개를 따라가지 못한 내가 세희를 바라보자, 그녀는 이마를 잠깐 짚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요즘 많이 못 놀아줬는데... 미안하네..."
"착한 언니네."
"착한 언니는 무슨. 맨날 일하느라 늦게 오는 나쁜 언니야."
"일..."
"응, 수진이랑 세류 부딪히는 것도 그렇고, 이런저런 사건이 많거든. 상혁이는... 응, 아린이가 방송 킨 거 보니까 버튜버 일 도우러 간 거 같네. 좀 이야기할 수 있겠다."
사건 때문에 일이 많다니 영문을 모르겠다.
아무튼, 나한테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모습에 느릿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어. 너도 그런 거 같네."
"응,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세연이랑 상혁이를 아는 모양이네? 어떻게 알게 된 거야?"
대답 여부에 따라 죽일 수도 있다라는 말이 뒤에 숨겨진 기분이 든다.
딱히 비밀로 할 일은 아니니까, 답하도록 하자.
"조금, 시간이 걸리는 이야기야."
"...어떤 상황인지 알 거 같네."
내 원래 세계에 대한 설명을 들은 세희가 머리끝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말했다.
"이쪽 세계는 내가 내려오는 경우의 수가 생겨서 침략이 막혔어. 실제로 내가 어릴 때 여기저기 작업 중인 틈을 자주 봤으니까... 그 틈으로 쳐들어오는 거네."
"...그렇구나."
"내가 놀란 이유기도 해. 차원의 틈을 전부 닫았는데, 다른 세계에서 누군가가 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나저나 배드 엔딩이라고 했어? 이쪽 세계가 배드 엔딩으로 향하는 건, 믿기지 않는데."
얼굴을 찌푸리면서 고민하는 세희.
...실제로 그건 말도 안 되는 전제라고 생각한다.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 내가 볼 때는 아포칼립스가 터져도 순식간에 모든 공간을 차단해버릴 수 있는 능력자다.
애초에 아포칼립스가 성립하지 못한다는 게 정확할지도.
"...내가 없다는 건, 내 임무가 없단 소리겠지. 그럼, 상혁이의 아버지가 소원의 꽃을 얻지 못한 모양이네."
"...소원의 꽃."
"이쪽 세계의 이야기야. 아무튼, 좋아. 우리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면, 다른 세계 이야기겠네. 생각해보니까 한 가지 경우의 수가 있긴 해."
"그래."
"응, 네 미션이 '주인공'을 찾는 거라면, 상혁이 말고 또 다른 주인공이 있긴 해. 다만... 그쪽 세계가 열리면 유린이가 죽을 확률이 높은데..."
걱정된다는 얼굴로 중얼거리는 세희.
유린이가 죽을 확률이 높다니, 무슨 소리일까.
"유린이는 용사잖아. 어째서 죽는 거야."
"아, 그건 내가 설명할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허공이 열린다.
그 안에서 나타난 건, 흰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
검은 머리칼을 엉덩이까지 늘이고, 거대한 검은 리본을 머리에 달고 있는 소녀가 허공을 가르고 나타난다.
"미래 너, 문으로 다니라니까. 세연이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
"안 들키면 된 거잖아?"
"그걸 말이라고..."
"됐어됐어! 안녕, 수호자? 아니, 아니다. 뭐라고 부르지?"
"...스노우."
"그래, 스노우!"
그녀의 눈을 밝히는 달의 마력에 이 소녀가 관찰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루크와 다른 점은 이 소녀에겐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단 걸까.
...적어도 앞에 있던 세희에게 뒤지지 않을 스펙이다.
"우와, 너 다른 세계도 다녀왔어? 다른 세계에서 대놓고 관측 중이네? 눈 마주쳐도 볼 정도면 많이 친해졌나 봐?"
"...응."
루크가 이쪽을 보고 있는 모양이다.
"좋아좋아, 다른 세계 수호자 씨. 관측자로서 말할게! 다른 세계에서 가장 먼저 유린이를 찾아가지 못하면, 유린이는 죽어! 다른 세계에서 갈 곳을 잘 정하도록 해. 모르겠다면, '주인공' 씨한테 물어보면 돼!"
"주인공 씨."
"그래그래, 주인공 씨야! 이름이... 어, 뭐였지? 잠깐만~"
"시우."
"아, 그래! 시우였지. 다른 세계에 너무 많이 쓰인 주인공 이름이라 기억 안 났어."
"..."
그럼 보통 기억 잘 나야 하는 거 아냐?
그렇게 반박하고 싶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결국 상혁이 말고 다른 주인공을 찾으란 소린데...
"자, 스노우! 너는 시우를 찾아내고, 루퍼의 세계로 진입하도록 해."
"루퍼."
"시우는 현재 10번이 넘는 루프 대상자! 응? 근처에 루프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고? 몰라, 요즘 시대는 회빙환이 대세인걸."
"..."
마치 소설이나 창작물을 말하는 것처럼, 소녀는 그렇게 말한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답변하는 렌.
[실제로 관찰자는 모든 세계를 '이야기의 세계'로 보기 때문입니다. 신경 쓰지 마시길.]
"실제로 이야기의 세계니까 어쩔 수 없어. 아, 나도 사신이다? 그래서 영혼의 목소리는 잘 들려. 희생자 씨."
[그렇습니까, 저를 지칭하는 이름이 낯설군요.]
"적어도 내 눈엔 그러니까? 아무튼, 가능하면 유린이는 살려야 해? 못 살렸다고 해도... 뭐, 운이 좋으면 살 수도 있겠네. 루프는 언제나 변수가 등장하니까."
"..."
너만 아는 이야기하지 말랬지.
"제대로 알려줘야 유린이가 살 거 아냐."
"난 이 세계에 제대로 관여할 수 없는 거 알잖아? 이것도 제법 많이 봐준 거야."
"...그렇긴 하지만."
"살 수 있는 방법은... 뭐, 순수하게 주인공은 '시우'의 행보에 달렸어. 빨리 만나서 네가 데리고 다니면 확률은 올라가지 않을까?"
그렇게 말한 미래의 눈이 원래의 검은 눈동자로 변한다.
...그렇구나, 주인공을 빨리 만나면, 아군일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거구나.
이건 좋은 힌트다. 감사하기로 하자.
"난 유린이 영혼 회수, 하고 싶지 않아..."
"휴가 나온 사신장이 뭐래. 회수하면 다른 애가 하겠지. 음... 내 선에서 줄 수 있는 추가 힌트가... 그래, 혹시나 '루퍼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유린이랑 친해지면 '시간이 끌리면 죽으니까, 합류에 전념해'라고 말해. 관찰자가 말했다고 하면 들을 거야."
"응, 고마워."
"응? 네가 왜 고마... 아, 너 다른 유린이랑 친구구나? 흐응흐응, 관측할 세계가 늘었네. 재밌겠다."
"..."
관찰자는 확실히 하나같이 뭔가 나사가 빠진 느낌이다.
"네가 왔다는 건 그 세계의 배드 엔딩이 확정됐단 거니까, 뭔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있다면, 돌아오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 이쪽이 귀찮아지니까."
"응."
"좋아! 난 이만 갈게!"
그렇게 말한 즉시 그녀는 공간을 열고 사라진다.
그 빠릿빠릿한 행동에 눈을 깜박이다가 세희를 바라보는 나.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원래 저래. 마이 페이스거든."
"..."
[관찰에 미친 관찰자가 있다고는 들었습니다만, 정도가 심하군요.]
[뭐, 그런 일도 있는 거 아니겠냐? 그래도 할 일은 정해졌네.]
[미션이 갱신됩니다.]
[서브 미션으로 '진짜 유린이를 구하라'가 활성화됩니다.]
[서브 미션으로 '아군이 될 사람들과 친해지자'가 활성화됩니다.]
"..."
아무래도 세희를 따라온 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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