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마법 소녀는 배드 엔딩을 타파해야 해!
* * *
어두운 석실.
멍하니 허공에 마법진을 그리고 있던 주황 머리칼 소녀의 옆에 검은 구체 하나가 떨어져 내린다.
"...조상님?"
현 마왕 파르시가 의외라는 듯 중얼거리자, 검은 구체는 느릿하게 그녀에게로 다가간다.
잠시 후 파르시가 손을 뻗어 구체를 쥐는 모습.
구체는 예의 검은 기사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조상님이 당할 거라곤 생각 못했어요."
"음, 나도 의외로군."
"용사라도 나타났나요."
"용사... 그게 용사라면, 그건 그거대로 재밌을 거 같군."
루난의 말에 파르시는 자신이 앉은 의자 받침을 톡톡 가볍게 두들긴다.
그러자 허공에 원이 생겨 무언가를 비추는 모습.
잠시 후 화면에 주변 적을 쓸어버리는 한 마법 소녀가 비친다.
"...마도사."
"음."
"조상님이 마도사한테 당했단 거죠."
"그래."
"신기한 일이네요."
담담하게 그렇게 중얼거린 소녀가 화면을 지우곤, 다시 마법진을 다른 곳에 새기기 시작한다.
신기하다로 넘기곤 다시 작업에 몰두하는 모습에 루난이 흠. 하면서 그걸 바라보며 마랳ㅆ다.
"싸울 때 필요한 마법은 충분히 저장해놨지 않나. 그만 해도 괜찮지 않겠나?"
"...멸망이 코앞이니까요. 퍼스트 마을은 '전 용사'가 너무 많아요."
"나도 나름 전 용사다만... 전 용사들을 상대할 거면, 마법이 아니라 세레스를 보내는 게 낫겠지."
"혹시 모르는 일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또다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하는 모습.
그 모습에 루난이 한숨을 내쉬듯 후. 하고 소리를 내곤 말했다.
"적어도 몸 관리는 하도록. 아무리 마왕이 됐다고 하더라도, 매일 같이 마법진만 그리고 있으면 상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오빠야도 없는 걸요."
체념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린 마왕의 말에 루난은 석실 벽에 기대며 침묵한다.
마왕이 된 이유는 여신이 데려간 사랑하는 사람을 되찾기 위해서.
하지만 인류가 멸망 직전이 됐음에도 여신에게선 답이 없다.
마왕이 된 목적도 잃고, 그저 인류를 멸망시키는 기계가 돼버린 마도사.
그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파르시."
"네."
"인류를 멸망시킨 후엔 어떻게 할 생각이냐."
"...멸망시키지 않아요."
"흠."
"저항할 수 없는 최소한의 인류를 남겨놓고, 끝까지 괴롭힐 생각이에요."
"그런 상태론 내버려둬도 멸종할 텐데?"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렇게 말한 뒤 파르시는 할 말이 없다는 것처럼, 입을 닫는다.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는 인식 정도는 이미 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그저 조용히 인간들을 항거 불가능 상태로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더는 할 이야기가 없다는 것처럼 작업에 집중하자, 검은 기사는 쇳소리를 내면서 석실을 나선다.
그런 루난을 슬쩍 바라봤다가, 다시 마법진 그리기에 집중하는 파르시.
그렇게 석실에는 침묵만이 남게 되었다.
"...이 정도면 주변 청소는 끝났네."
"그렇네요★"
숲길 근처에서 광역 탐색 마법을 날려보지만, 딱히 걸리는 건 없다.
...아까 닌자가 생각나서 거슬리긴 하지만, 일단은 걸리는 게 없으니까.
최소한의 경계만 하도록 하자.
"돌아가자."
"응, 스노우님."
내 말에 유레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날아가기 시작한다.
일단 주변은 끝났으니까, 조금씩 전진하면서...
[마스터.]
"말해 봐."
[이 세계의 신령으로부터 메세지가 도착했습니다.]
"...신령?"
굉장히 뜬금없다면 뜬금없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신령... 이라는 건 신이 대화를 요청했단 의미지?
"전달해줄 수 있어."
[네, 음... 잠시만 기다려주시길.]
렌의 말에 내가 잠시 비행을 멈추자, 두 사람이 의아한 시선을 보낸다.
잠시 가만히 있자 나타나는 하얀색 박스.
...시스템 창과 닮았지만 좀 더 입체적인 게 나타났다.
[보이시나요, 이 세계의 영웅이여.]
"응."
[다행입니다. 저는 이 세계의 신, 루나라고 합니다.]
스케일 굉장한 자기소개다.
다른 의미로 말하자면, 이 세계가 배드 엔딩으로 바뀌는데 일조한 사람이기도 하고.
"무슨 일이야."
[그대는 마왕을 퇴치하기 위해, 배드 엔딩을 타파하기 위해 온 게 맞습니까?]
"응."
[그렇다면 마왕에게 제 이야기를 전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
그런 건 직접 전달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하지만, 일단 이야길르 듣기로 하자.
"스스로 전달하는 건 안 되는 거야."
[제가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건, 신성력을 가진 인간뿐입니다. 현 세계에 남은 신관은 총 2명이며, 그들은 마왕 앞까지 갈 힘이 없습니다. 마왕은 성에서 나오지 않으니까요.]
"아."
그래서 마왕한테까지 갈 수 있을만한 나에게 부탁하는 모양이다.
...근데 신성력? 나도 그런 거 안 가지고 있는데.
[별의 마나가 신성력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별의 마나를 가진 사람이랑 용케 같이 있군요, 악마.]
[당신이 관여할 이야기는 아니겠죠, 무능한 여신. 스스로 부탁하는 처지인 걸 자각하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모예요, 니들 왜 사이 나빠 보여요.
"그래서 스노우 님, 무슨 일이야?"
"여신이랑 대화중."
"이 세계에 여신이 남아 있었나요☆? 무능하네요♡!"
아무래도 여신의 메세지는 나에게만 보이는 모양이다.
[아무튼, 가능하시겠습니까?]
"응, 어차피 갈 거니까."
[네, 그럼...]
잠시 고민하듯 메세지를 멈추다가, 여신이 말을 이었다.
[ㅡ]
"응."
[그렇게 전달해주시면 됩니다.]
"안타까운 이유네."
[...실로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서로 엇갈리고 만 모양이다.
방금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들었다면, 분명 인류가 이런 상황에 부닥치지 않았겠지.
그래도 이곳은 배드 엔딩이 확정된 세계.
내가 마왕을 쓰러뜨려도... 인류가 원상 복구될 때까진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로 생각한다.
[힘이 부족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다른 신령이여.]
그렇게 말한 뒤 흰색 박스가 작은 박스로 분해되면서 사라진다.
신령이라니, 그렇게 거창한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두 사람에게 가자는 제스처를 취하고, 우리는 퍼스트 마을로 들어섰다.
"생각 이상의 성과인걸! 대단한데!"
다시 신전의 응접실로 들어서자, 하프가 기쁜 표정으로 나를 안아버리려다가, 뒤에서 폭하고 안긴 유레하를 보곤 어색한 미소를 보인다.
유레하를 바라보지만, 그저 싱글벙글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뭐야, 무서운 걸 본 표정 같았는데?
"지금 우리 멤버가 영토화 진행하고 있어! 정말 고마워!"
"응."
"고착 상태가 이런 식으로 풀릴 줄이야..."
아무래도 제법 오랜 기간 버티고 있었는지, 안심하듯 그렇게 말하는 하프.
...고착 상태였구나.
결계 하나로 버티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나름대로 나가려고 노력해왔던 모양이다.
"마왕도 결계 해석에 신경 쓸 때가 아니게 됐겠지! 전부 너희 덕분이야!"
"...당연한 일을 했어."
"그래그래, 그렇겠지. 아무튼 고마워! 피곤하진 않아? 너희가 머물 장소 준비해뒀으니까 좀 쉬어도 돼!"
이 정도로 기뻐하니 기분이 묘하네.
그의 과장된 반응을 보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프는 우리를 신전 안에 있는 침실로 안내한다.
현대 수준까진 아니지만, 확실히 깔끔하게 정리된 침실이다.
"배고프면 음식 가져다줄게. 필요한 거 있어?"
"...아니, 조금 쉬고 있을게."
"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달라고."
그렇게 말하며 하프가 멀어지자, 그제야 달라붙어 있던 유레하가 떨어진다.
"주인님~☆ 저런 사람을 조심하는 게 좋아요★"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진 않아."
"그래도요~♡"
"스노우 님, 유레하는 질투하... 아파!?"
"파이렌은 쓸데없는 말이 많아요☆"
뭔가 말하려던 파이렌의 등을 짝! 소리가 나게 치기 시작하자, 울상이 돼선 유레하의 손을 막는 모습.
나는 침대에 풀썩. 하고 앉다가 딱딱한 감각에 손가락으로 꾹 하고 침대를 눌러본다.
...이거 돌침대였네.
푹신해보였는데,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슬며시 변신을 해제하고 눕자, 당연하다는 것처럼 유레하가 나에게로 파고들기 시작한다.
...침대 여러 갠데.
"유레하."
"네♥"
"...아냐."
아예 달라붙어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러자 뭔가 기대하는 것처럼 내 뒤로 들어오는 파이렌.
...둘다 불편하니까 그만뒀으면 좋겠다.
잠시 그렇게 누워있다가 어느새 잠들었는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둠이 밖에 깔려 있었다.
눈을 부비적거리면서 물의 마나를 꺼내자, 평소와 같은 상태로 복귀.
아직 곤히 잠들어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슬쩍 신전 밖으로 걸음을 옮긴다.
신전 경비원으로 보이는 두 기사에게 인사하자, 고개를 푹 하고 숙이는 모습.
어쩐지 너무 정중해 보이는 모습에 쓰게 웃은 내가 마법 소녀로 변신해 날아가기 시작한다.
[산책입니까?]
"아니, 조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마을에 있는 결계를 벗어나자 보이는 건, 점점 범위가 넓어지고 있는 불꽃들.
저녁에도 열심히 작업 중인지, 여기저기 결계가 펼쳐지는 모습이 눈에 띈다.
...인류 최후의 마을이라더니, 사람 엄청나게 많구나.
마법을 쓸 수 있는 인원 숫자가 장난 아니다.
[걸리는 부분입니까?]
"응."
[어떤 점이...]
"닌자라고 칭하던 적, 분명 탐색엔 안 걸렸지만 있을 거야. 다른 사람들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잠든 사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정체를 모르겠네, 닌자.
"닌자처럼 보이는 무언가라고 했으니까... 인간이 아닐지도."
[애초에 이 세계는 판타지 세계입니다. 갑자기 닌자가 나타났다. 같은 일도 수상하죠.]
"...그렇네, 역시 다른 세계에서 온 걸까."
[마법 소녀만 노리는 걸로 봐선, 거의 확실하다고 보면 되겠죠.]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고, 공격당했을 때 위험한 상황에 나타나서 공격하곤 사라진다.
전형적인 암살자의 행동이다.
"닌자라는 건 보통 신출귀몰하지만, 모습을 보였다가 사라지는 게 정상이지 않아."
[글쎄요, 저도 그런 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도 애니메이션상 지식은 있지만, 그런 류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부분은 없다.
파이렌이나 유레하도 다른 세계에서 온 아이라 잘 모를 거 같고...
"비행 마법이 익숙해 보이는걸? 너희 쪽은 다들 그래?"
"..."
내 옆에 똑같이 비행하면서 날아온 잿빛 눈동자의 소녀를 바라본다.
내가 빤히 바라보자, 뭔가 부끄러워진 듯 시선을 피하는 소녀.
잠시 후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그녀가 말했다.
"아, 아무튼 고마워. 너희 덕분에 우리가 나아갈 원동력을 얻었어."
"응, 그런데..."
"응?"
"이름이..."
아까 전사한테서 들은 거 같은데,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내 말에 그제야 자기소개조차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얼굴을 붉히는 모습.
그리곤 허리춤에 손을 올리더니 가슴을 탁. 하고 치면서 그녀가 말했다.
"내 이름은 센. 마을에서 유일하게 대마도사로 승급한 마도사야."
"마을에서 가장 강한 마도사라는 거네."
"그, 그렇지?"
그녀의 말에 내가 순환시를 켜자, 그녀의 온몸에 퍼져있는 마나가 느껴진다.
...가장 강한 마력은 물의 마력인 모양인지, 시원한 감각이 강하게 느껴진다.
"솔직히 다 부질없지만..."
"어째서."
"그야, 이번 대 마왕은 나보다 높은 등급의 마도사인 상태에서 마왕이 됐으니까. 이 위에 뭐가 있을지, 감도 안 잡히는데..."
그렇게 말하며 침울해지는 모습.
확실히 인류 최고라고 하기엔... 유레하&파이렌보다도 약한 아이다.
물론 유레하&파이렌이 약한 건 아니지만, 인류 최고가 저 정도라면... 사실상 마도사로서 마왕 퇴치라는 건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거겠지.
애초에 거기까지 가지도 못하겠지만.
"용사 파티 같은 건 없어."
"...그 용사 파티가 마왕이 된 케이스거든? 진짜... 믿을 수 없어. 왜 저렇게 된 걸까?"
내 말에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그렇게 답한다.
마왕을 잡고 곧바로 탄생한 용사 파티의 마왕.
...그럼 새로운 용사 파티가 뽑혀야 정상 아닌가 싶지만, 아까 여신도 그렇게 이 세계에는 더 이상 그럴 여력이 없는 모양이다.
"솔직히 너희가 도와준다고 해서 이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응."
"하지만... 부탁할게."
잿빛 눈동자의 소녀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 세계를 구해줘. 다른 세계의 용사님."
"..."
용사 아니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