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나라 전복
* * *
밖으로 나와 영혼을 갈아 끼우고, 다시 피오레를 환상 세계로 돌려 넣는다.
마력 흡수율은 최소로.
지속해서 마력을 조금씩 공급하게 만들면, 아마 환상 세계 자체는 유지될 테니까.
[...솔직히 옳은 선택이라는 생각은 안 듭니다만.]
"악당이라도 개과천선할 수 있을지도 몰라."
[거, 이번 마스터는 좀 감상적이구만. 그건 됐고, 마스터, 지금 상황 알고 있나?]
"?"
세르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자 보이는 건 이 도시를 제외하고 전부 사라져버린 지상.
도시는 내가 펼쳐놓은 영역 덕분에 유지되고 있을 뿐, 마력을 놓는 순간 사라질 게 분명한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모예요?
"라그나로크가 시작되었노라. 이것은 전조, 포세이돈의 영역이 이곳을 전부 메웠을 때, 또 다른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지니."
"..."
링의 헛소리를 듣고 내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몬스터를 찾아내는 기계를 꺼내는 것.
내가 봤던 과거 기억에는 레드 드래곤, 라덴이 함께 있었다.
라덴이 보스로서 지켜야 할 영역이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라덴에게 연결된 속박을 끊을 수 있다.
레이더에 표시된 미국 근처 필드 보스는 넷.
다른 필드 보스들은 지하로 사라진 건지, 잡히는 게 없었다.
지금 남은 건 전부 비행이 가능한 녀석들이겠지.
내가 봤던 건 비홀더, 레드 드래곤, 만티코어 정도.
그리고 녀석들은...
"..."
마지막 땅인 이곳으로 전부 모이고 있었다.
"오오, 천상의 전사들도 온 것인가! 좋구나!"
몬스터들뿐만이 아니었다.
비행할 수 있는 생존자들, 천족들 역시 이 땅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이 조그마한 땅이 내 마력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걸 안 건지, 천족들이 감탄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지지만,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ㅡ몬스터들을 전부 제압하거나 죽여야 한다.
"전부 들어."
마력을 담아 말하자, 온 도시에 내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러자 한 번에 시선이 집중되는 모습.
나는 자연스럽게 치마 아래를 가리듯 한 건물 위에 앉은 채 입을 열었다.
"지금 오고 있는 보스 몬스터는 총 넷. 나는 너희의 스펙을 몰라. 그러니까, 살아남은 건 개인이 해야 할 거야."
웅성웅성.
땅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들을 보호하면서 싸울 정도로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다.
지속으로 마력이 충전되고 있지만, 땅을 유지하면서 환상 세계까지 유지해 사용 가능한 마력량은 30%가량.
어차피 레드 드래곤의 계약을 해제해서 아군으로 만들 생각이니까, 모두 조금만 버텨주면 어찌저찌 괜찮은 결과가 나올 거라고 생각된다.
"천계 팔품천사, 대천사 중 하나인 라구엘이라 하네, 별의 인도자여."
그런 생각을 할 때, 긴 금발을 휘날리는 한 천사가 신관복을 입은 채 나에게로 날아올라 말한다.
날개가 5쌍인 걸 보니, 일단은 고위 천사인 건 확정.
스스로 소개하는 라구엘의 말에 나는 무표정하게 끄덕이면서 말했다.
"응, 별 무리의 마법 소녀 스노우야. 무슨 일이야?"
"그대는 현재 땅을 유지하기 때문에 보호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은가?"
"응."
"허나 지금 오고 있는 자 중에 드래곤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가? 그대라도 지금 이 땅과 고유 세계를 유지하면서 드래곤을 상대할 순 없을 테지."
"드래곤!?"
"저 천사가 지금 드래곤이라고 한 거야!?"
"젠장, 겨우 살았나 했더니!"
라구엘의 말에 그나마 남아있던 사람들이 당황하며 도망가려는 모습이 보이지만, 이미 늦었다.
제법 먼 거리에서 들려오는 괴물들의 울음소리.
사람들이 날아갈 때 즈음이면, 전부 괴물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드래곤은 내가 맡아, 나머지 셋만 막아줘."
"...우리 천사들이 발록과 만티코어를 맡지. 아무리 인간들이라도 비홀더 정도는 잡을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며 라구엘이 손짓하자, 천사들이 각기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직도 갈팡질팡하는 사람들.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비홀더가 오고 있는 방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쪽, 비홀더는 브레스류만 조심하면 돼. 피하면 과부화걸리니까, 그때를 노려. 그리고..."
잠깐 헛기침을 하고 숨을 들이켰다가 내쉰다.
그리고 입을 우물거리면서 잠깐 렌을 바라보자, 렌의 말.
[...하실 거면 빨리하시는 게 좋지 않습니까?]
[뭐야, 뭔데뭔데?]
"..."
그래,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참을 수 있다.
마력을 끌어올린다.
사용하는 건 강화 계통 마법.
내가 아는 강화 계열 마법은 딱 하나뿐이다.
"매, 매... 흐으..."
잠시 다시 숨을 고른다.
내 상태가 이상한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진다.
모르겠다, 진짜.
"매지컬 스타링! 서로 사랑하면서 정의를 구현하죠! 스타 프리즘 파워 업!"
[아, 마스터. 덧붙여서 하는 말입니다만, 지금 마스터 스펙이라면 영창 없이 사용 가능할 겁니다.]
"...에."
[부끄러운 영창이라고 생각한다면, 스킵하시길.]
"레에에에에엔!"
내가 이 정도까지 소리를 지를 수 있단 걸 알게 된 나였다.
전부 보낸 후.
나는 어지간한 건물을 씹어 삼킬 수준으로 거대한 드래곤과 정면에서 마주한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 링을 보내놨으니, 그쪽은 나름 안전할 거고...
생각보다 약해졌군, 스노우.
"...너 드래곤이지."
그렇다만?
[마스터가 뭘 하는지 보이지 않는 모양이군요, 라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힘을 억제하다니, 덧없는 짓이다.
"나는 마법 소녀야. 사람을 지키는 게, 내가 할 일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조용히 그를 바라보자, 라덴이 돌진할 준비를 마친다.
명백한 전투태세에 곧바로 렌을 겨누는 나.
내가 맞받아치려는 모습을 보이자, 입가에 화염을 머금는 모습.
돌진하면서 브레스라니, 제대로 부딪혀도 재밌을 거 같지만...
"정면 승부해줄 리가 없잖아."
바람의 마력으로 가볍게 드래곤의 등에 안착한다.
그러자 갈 곳 잃은 브레스를 하늘로 뿜어내더니, 그대로 나를 떨어뜨리기 위해 고속으로 비행하기 시작하는 모습.
...나도 날 수 있어서 크게 의미 없는 행동인데.
그런 생각을 하며 렌을 검의 형태로 바꾼다.
자연스럽게 세상이 색채로 변한다.
목표는 라덴의 온몸에 붙어있는 마력 다발들.
계약의 사슬을 끊기 위해 그 자리를 기점으로 온 사방으로 마력을 분산해 날리기 시작한다.
"아쿠아 커터."
모든 마력의 실을 향해 검격을 날리자, 자연스럽게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져 공격을 막아낸다.
나타난 건 평범한 마력으로 뚫을 수 없는 새하얀 방패들.
...지금 땅 유지하는 마력 때문에 뚫으면서 자르기는 귀찮은 상황인데.
슬슬 마력으로 등 위에 버티고 있는 것도 조금 버겁다.
'할 수 있는 걸 할 뿐.'
지금 마력량으로 저 방패들을 뚫을 수 없다지만,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드래곤의 등에서 아이스 링크를 타듯 미끄러져 첫 번째 마력실로 향한다.
자동 방어 기능이라도 있는 건지, 내가 있는 방향을 정확하게 방어하는 방패.
하지만, 한쪽만 방어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는 없다.
서걱.
바람의 칼날로 마력 실을 잘라내는 데 성공하고, 그대로 다시 등을 타고 움직인다.
드래곤의 꼬리가 날아오는 걸 비행으로 가볍게 피하며 손을 등에 붙이는 데 성공.
자연스럽게 신발에 있는 날개에 마력을 담아 확대하고, 돌려차기로 두 번째 마력 실을 강타하는 데 성공한다.
이걸로 2개.
잘라내야 하는 건 총 10개.
꼬리 근처 2개를 잘라내자, 꼬리가 비행하기 편한 자세를 취할 뿐 딱히 공격해오진 않는다.
"..."
그러고 보니 이 녀석, 폴리모프를 사용하지 않는다.
폴리모프를 사용하면 등에 있는 나를 공격하는 것 정도는 평범하게 가능할 텐데.
딱히 제대로 싸우고 싶진 않단 거겠지.
물구나무에 가까웠던 자세를 되돌리고 다시 등에 안착.
어쩐지 비늘이 공격할 것처럼 뾰족해지는 걸 알아채고, 나는 손에 마력을 담아 몸을 보호한다.
다행히 투사체까진 아니고 등 전체가 칼날처럼 날카로워진 정도.
이 정도는 마력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
살짝 미끄러져 등 부분의 마력 실로 향하자, 이번엔 3개의 방패가 온 사방을 막아선다.
미묘하게 화난 것처럼 웅웅 거리는 느낌이지만, 신경 쓰지 않고 틈을 찾는다.
"렌, 생각해봤는데."
[네, 말씀하시길.]
"렌이랑 세르칸, 둘 다 저런 실 형태로 변할 수 있지 않아?"
[와이어 폼으로 전환하겠습니다.]
[가능하긴 하다만... 차라리 나도 인간형이 돼서 돕는 게 낫지 않냐?]
"음..."
내 말에 곧바로 와이어 형태로 변하는 렌과 의견을 제시하는 세르칸.
잠깐 그 제안에 고민한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말했다.
"그것도 다 마력이니까."
[뭐, 알겠다고?]
렌과 똑같은 와이어로 변한 것을 확인하고 잠시 와이어를 만지작거린다.
솔직히 와이어 조작법까진 잘 모르겠다.
다만...
피슉.
마력을 담아서 그저 일자로 쏘아내는 것으로 마력 실을 절단.
그대로 회수하자 재빠르게 다른 방패들이 또 다른 마력 실을 지키기 위해 이동하기 시작한다.
응, 이것도 괜찮겠네.
"연사로."
마치 잽을 날리듯 와이어 방향만 정확하게 잡고 손을 뻗는다.
방패들이 급하게 그 방향을 튕겨내려고 하지만, 마력을 컨트롤해 그 사이로 쏙 들어가서 또다시 절단.
카이트 실드 형태의 방패인 시점에서 내 공격을 막아내는 건 무리다.
남은 건 4개.
"..."
아예 내가 가는 길을 막아버리겠다는 것처럼 길을 막아선 녀석들을 보며 비행으로 올라가려 하지만, 내 앞에 척척척! 하고 계속해서 쌓이는 방패를 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얘들 바보 아닐까.
서거거걱!
방패들이 내가 비행하는 걸 막는 사이 쏘아진 와이어에 하나의 실을 제외하고 모두 절단.
놀란 듯 허둥지둥하다가 하나 남은 마력 실로 이동하더니, 아예 원통 기둥으로 슬라임처럼 형태를 바꿔 마력 핵을 숨긴다.
거, 등 간지러워 죽겠구만 그래. 얼마나 더 걸리겠나?
"...날처럼 세운 거나 거둬."
그래그래, 이제야 좀 살맛 나는군.
그렇게 말하며 비늘을 원래대로 돌리는 모습.
마지막 하나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할 때, 세르칸이 갑작스럽게 실체화로 내 손에서 빠져나간다.
뭐냐는 얼굴로 바라보자 보이는 건, 처음 보는 왠 남고생의 모습.
진검 하나만 들고 있는 모범생처럼 보이는 남자를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한다.
"걔는 누구야."
"저 같은 사람이 있었죠. 단순한 마력 능력자일 따름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발에 마력을 담고 그대로 대쉬.
그리고 그 녀석이 움직이는 순간,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순간적으로 원통 기둥이 잘려 나간다.
"..."
말이나 하고 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원격 조작으로 마력 핵을 베어내자, 우우우우우웅! 하는 큰 소리와 함께 다시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하는 원형 기둥.
도망가려는 녀석 중 하나를 잡자, 왠 방패 하나가 내 손에 잡혀선 바둥거리기 시작한다.
[천계의 유물... 흥미롭네요. 마스터, 저에게 주시겠습니까?]
[어이어이, 악마가 천계 유물로 뭐하게.]
[지금 제 몸체는 천계와 마계의 합작입니다. 좀 더 강화 파츠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응."
그녀의 말에 주저 없이 방패를 주자, 우웅! 하고 비명을 지르듯 소리 내다가 그대로 렌에게 빨려 들어가는 모습.
딱히 외형이 변하지 않는 렌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자, 그녀가 말했다.
[좋네요, 이 정도면 마스터의 마력 출력을 더 높일 수 있을 겁니다.]
"응."
마력량이 10% 이하까지 떨어졌단 걸 확인하며, 나는 풀썩. 하고 라덴의 등에 앉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해제되는 마법 소녀 복장.
오랜만에 보는 듯한 새하얀 원피스를 보며, 나는 다리를 살짝 만지작거리고 만다.
"..."
피오레도 잡았고, 루루도 잡혔다.
라덴의 속박도 풀어냈고, 문제는 대륙 전토가 풀썩 주저앉았단 건데...
"거기까진 모르겠어."
거긴 내 관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기도 버거운... 어라?
"라덴."
음?
"사람들 위험해, 도와줘."
내가 왜 인간을 도와야 하지?
"내가 너 풀어줬으니까."
음...
매우 타당한 말이라고 생각한 건지, 그는 잠시 침음성을 흘린다.
하지만 잠시 후 자연스럽게 돌아가며 입에 불의 마나를 담기 시작하는 모습.
생각해보니 드래곤 위에 타고 있으면, 포격하기도 편할 거 같은데?
"렌."
[네, 마법 소녀 상태가 아닌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포격 쏘는 정도야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말하며 나는 라덴을 타고 포대를 정조준하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