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나라 전복
* * *
고유 결계를 무조건 완성해야 한다라.
뭐, 그건 차차 생각하기로 하고.
[그래서 여긴 뭐냐!? 여가 라비린토스에 갇혔다만!?]
"아니, 미궁까진 아니야."
[갇힌 건 맞지 않나!]
"기다려봐."
자연스럽게 가둬놓은 영혼을 육체 쪽으로 유인하자, 파직! 하며 반발력이 일어난다.
반쯤은 들어가지만, 무리! 같은 느낌으로 납작해지는 모습.
그냥 이동하는 거라 만원 전철에 들어간 느낌인지, 링은 끙끙거리면서 힘들어할 뿐이었다.
"안 들어가지는 구나."
[여의 몸을 차지한 못된 놈을 먼저 꺼내야 하느니라!]
"음..."
결국 피오레 기억 속으로도 들어가야 한단 이야기.
문제는...
"렌, 이거 내가 들어가 있어도 유지 가능해?"
[여는 물건이 아니니라!]
[네, 가능합니다.]
"..."
다행히 혼자 들어가도 되는 모양이다.
가볍게 마력에 간섭해서 마법을 준비하자, 갇혀있던 링이 급하게 소리쳤다.
[기다려라!]
"응."
[여기는 마치 지옥에서 형벌을 받는 듯한 곳이구나! 천상의 정원을 만들어낼 순 없나?]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음... 세르칸, 가능합니까?]
[에잉, 귀찮게 하는구만.]
그렇게 말하며 링의 모습으로 변하는 세르칸.
잠시 후, 마치 무기질 인형처럼 가만히 있는 그에게 자연스럽게 링이 들어선다.
그러자 핫. 하면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
"음, 나중에 사례하도록 하지, 천계의 신기여!"
[그러도록 해라, 암흑 여제여! 여는 잠시 잠들어있겠노라!]
"음?! 자, 잠깐, 지금 뭐라고?"
[무슨 일인가, 암흑 여제여?]
"오오, 말이 통하는 자로다! 그대 같은 신기가 있다니, 전생과 현생이 덧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채 버리고 말았노라!"
...잘들 논다.
열심히 노는 세르칸과 링을 보며 나는 다시 자연스럽게 환상 세계로 다이브한다.
잠시 어두워지는 공간.
통로를 떠나 도착한 곳은...
"바다."
거대한 파도가 넘실거리고, 하늘에선 폭풍우가 치고 있는 바다 한가운데.
한 개도 아니라 여러 배가 폭풍우에 휘말려 부서지는 것이 보인다.
내가 안착한 곳은 가장 멀쩡해 보이는 배.
결계 같은 게 보이긴 했지만, 마력을 동조 시켜 자연스럽게 스며들듯 들어간다.
은폐 마법으로 몸을 숨기며 주변을 둘러본다.
"...?"
그래서 대체 왜 바다가...
붙었다가 말랐다가 반복하는 머리칼을 넘기며 본 배 위는 난장판.
선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급하게 움직이고 있고, 돛은 올려져 있다.
최신식 배가 아닌 영화에 해적들이 쓸법한 배 위엔 선원들이 미끄러지고 방향키를 움직이며 분주한 상황.
살짝 몸을 띄워 충돌을 방지하는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마법사! 빨리 안정화시켜!"
"집중 안 돼! 마법진도 자꾸 지워진다고!"
"제기랄!"
그 방향을 보자, 콧수염이 멋져 보이는 외팔 선장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이를 간다.
마법사라고 불린 사람을 바라보자, 어딘가 낯이 익다는 사실을 깨닫는 나.
보랏빛 머리칼을 가진 중성틱한 분위기.
마법사들이 자주 입는 보랏빛 로브.
...다른 점은 침식의 마력이 아니라 보랏빛 마력을 쓰고 있단 점일까?
"보랏빛."
조금 끈적이는 마력을 만지자, 자연스럽게 땅에 마력이 스며든다.
침식이 아니라 마력 흡수 정도의 성능을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 피오레가 내 쪽 방향을 바라본다.
"...뭐지?"
이상하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 하지만 이내 선장의 외침에 얼굴을 찌푸린다.
"집중 안 해!"
"에라이, 내가 이놈의 배 괜히 타서는!"
그렇게 말하면서 하늘에 다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하는 모습.
그때였다.
하늘에 누군가가 나타난 것은.
"여러부우우우운~ 괜찮아영~?"
그렇게 말하면서 나타난 하늘빛 머리칼의 소녀.
본 순간, 마법 소녀라는 느낌과 이상하다는 느낌을 동시에 받고 만다.
그냥 서면 바닥에 끌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긴 하늘색 머리카락.
이마에 박혀있는 푸른색 보석.
푸른 셔츠에 남색의 짧은 치마.
주변에는 선녀의 날개옷과 같은 천이 4개 둥둥 떠다니는 모습이 좀 특이한 인상이다.
"파라!"
"응애, 아가 파라 도착해써!"
"..."
미친 건가?
피오레의 외침에 장난스럽게 대답하는 파라의 발언.
다른 사람들 표정을 보니 '여전히 미친년이네.' 같은 느낌으로 바라보는 모습이다.
"마법진 보조 좀 해줘! 여기서 빠져나가게만...!"
"음~ 그럼 내가 배 4개 밖으로 옮길 테니까, 피오레는 버티고 있는 건?"
"쯧, 그놈의 마법 소녀 룰. 오케이, 이쪽은 버틸만하긴 하니까...!"
"피오레! 누구 멋대로 그걸 정하나!"
개판이네.
환상이라곤 하지만 나도 조금 돕고 싶긴 한데... 문제는 피오레가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내 입장이 좀 애매해진다.
피오레는 대놓고 나를 적대할 거고, 주변이 그 싸움에 휘말릴 확률이 높으니까.
...아니, 잠깐.
파라라는 마법 소녀는 지금 조종당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다.
게다가 피오레가 사용하는 마력도 침식의 마력이 아닌 다른 마력.
그렇다는 건... 기억이 없을 확률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지금 피오레와 파라의 관계가 꽤 깊은 관계라던가.
그런 상황이면 나와도 상관없지 않나?
"..."
시끄러운 자리 속에서 유유히 떠다니며 잠시 고민에 빠진다.
...솔직히 환상 세계니까, 굳이 구할 필요는 없다는 쪽이 지배적.
하지만 정말로 파라라는 사람과 피오레가 깊은 사이고, 그가 침식의 마력으로 마법 소녀들을 조종하게 된 이유가 있다면...
ㅡ알아볼 가치는 있어.
"마법 소녀 씨, 나한테 맞춰."
"에? 누, 누구...? 어라? 어라라라라? 마법 소녀!?"
내가 마력을 연주하듯 조종하기 시작하자, 갑작스럽게 하늘에 나타난 나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왠지 휘파람 소리가 추가로 들려오는데, 로리콘은 전부 사형이다.
물의 마력과 전격의 마력을 조작해 폭풍우가 가진 힘의 방향을 돌린다.
아무래도 물과 관련된 마법 소년지, 당황하면서도 내가 조종하는 물의 마력을 보조하는 모습.
하늘 높이 모여들기 시작한 비구름에 나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한다.
"보조는 여기까지. 바다에 있는 사람들을 빨리 옮겨줘."
아무리 그래도 자연 자체를 제압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위업이었던 모양.
그래도 한동안 버틸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내가 말하자, 파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인다.
동시에 날개옷과 물의 마력이 넘실거리더니 자연스럽게 배를 인도하는 파도.
...최소 루리에 급이네.
마치 해신의 딸을 보는 것처럼 파도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파라를 슬쩍 보곤, 하늘에 쌓이는 폭풍우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한다.
ㅡ먹어치워.
잿빛 마력이 속삭인다.
아무리 그래도 자연을 먹어 치우는 건 힘들지 않을까?
ㅡ먹을 수 있어.
다시 한번, 파괴자의 마력이 속삭인다.
순수하게 돕기 위한 전달인지, 안정된 정신이 발동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바랄 거 없지.
"나의 하수인이여, 전부 먹어 치워라."
허공에 빛의 마력이 팽창한다.
비구름 영역 전체를 삼키려는 것처럼, 거미줄처럼 퍼져나가는 마력.
생각 이상으로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마력에 인상을 찌푸리지만, 먹어 치운 만큼 회복되는 것을 보며 안도한다.
...다음부터는 가능하다고 해도 조율하면서 하는 게 좋겠다.
눈을 감은 채 요동치는 마력을 전부 별의 마력으로 치환하며, 전부 진정시키기 시작한다.
환상 세계인 주제에 자연 구현 자체는 제법 구체적이다.
"어..."
그걸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보는 파라의 모습.
그녀의 행동에 나는 담담하게 마도구를 세우며 말했다.
"안녕, 마법 소녀. 나는 별 무리의 마법 소녀, 스노우야."
"아, 안녕하세요? 저, 저는 그, 그... 방울의 마법 소녀 파라예요."
"방울."
"네에~ 물의 마력으로 이런 거 만드는 게 특기예요."
그렇게 말하며 사방에 퍼져나가는 비눗방울과 같은 방울들.
...자세히 보니 자연스럽게 파도에 인도되고 있는 배들은 전부 저 방울에 둘러싸여 있다.
기능적으로는 굉장히 좋아 보인다.
"...잠깐만요, 스노우요?"
"응."
"어... 어디서 들어봤는데?"
"?"
이번엔 내가 놀랄 차례.
여기는 피오레의 과거 세계.
내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 맞아 맞아! 기억났다아앙!"
"응."
"최초의 마법 소녀 이름이 스노우였어요! 별 무리의 마법 소녀!"
"...?"
진짜 영문을 모르겠다.
파라의 인도에 따라 어느 섬에 도착해 안착하자, 피오레가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본다.
아, 역시 기억 있구나.
기억은 있는데 침식의 마력을 사용하진 못하는 모양이다.
파라가 있으니 나한테 소리치진 못하는데, 왠지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고 있다.
"떽! 피오레! 떽이야!"
"파라, 저건 좋은 마법 소녀가 아냐."
"좋은 마법 소녀가 아니라는 건, 무슨 의민지 모르겠어."
"최초의 마법 소녀는 가장 선에 가까운 사람이야! 멋대로 말하지 마!"
"..."
아니,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파라가 뺨을 부우 하고 부풀리면서 말하자, 피오레는 크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린 채 눈을 감는다.
대화하고 싶지 않단 의미.
그 행동에 링이 그의 머리 위에 방울을 만들어 통! 통! 하고 때리면서 말했다.
"하여간 못 됐다니까! 아, 집으로 안내해드릴게요. 따라오세요!"
"응."
"파라, 그..."
"피오레?"
"하, 그래. 알겠다고."
결국 포기한 듯 느릿한 걸음으로 따라오기 시작하는 피오레.
링을 따라가자 보이는 건, 흙과 돌로 빚어진 집.
마력으로 강화돼서 어지간한 충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을 수준으로 마개조된 집을 보며, 나는 잠깐 눈을 깜박인다.
현대식도, 중세식도 아니다.
차라리 같은 걸 찾으라고 하면, 이글루가 맞지 않을까.
크기가 10배 차이 나고, 온갖 가구로 가득 차 있지만.
"차는 어떤 거 좋아하세요!"
"맛있기만 하면 돼."
"우와, 어려운 주문이네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혼자 주방으로 떠나는 파라.
그와 동시에 피오레가 내 건너편에 앉더니, 작은 목소리로 노려보면서 말했다.
"네 녀석이 왜 여기 있지? 과거에 널 본 기억은 없다만."
"일단 여긴 환상이니까."
"퍽이나 진짜 같은 환상이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부정하지 못하는 피오레.
슬쩍 주방을 한 번 보더니,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나를 꺼내기 위해서 왔나?"
"응."
"왜지? 내가 환상에 갇혀 있으면, 너로서도 좋은 일 아닌가."
"..."
여기서 육체가 링의 것이라고 말하는 건, 악수.
잠시 침묵하던 나 역시 잠시 주방 쪽을 힐끗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악당에게도 과거가 있을 테니까."
"그거참 고맙군. 그럼 날 살려주기라도 할 건가?"
"아니, 너는 너무 많은 죄를 저질렀어.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죄, 죄라... 웃기는 소리!"
쾅!
내 말에 분노하며 책상을 내리치는 피오레.
나름대로 조절한 건지, 마력량이 대단치 않았던 건지 책상이 살짝 패이는 것으로 끝난다.
그와 함께 주방에서 고개를 빼꼼 내미는 파라.
"피오레!"
"아, 미, 미안해."
"손님한테 화내지 마라!?"
"그래."
파라의 말에 시무룩한 상태로 얼굴을 부여잡고 머리칼을 쥐어뜯는다.
영 익숙하지 않은 모양.
...피오레가 마법 소녀한테 붙잡혀 살다니, 누구한테 말하면 농담하지 말라고 할 거 같은데.
"연인이구나."
"아니...! 아, 아니다. ...적어도 죽기 전에 말하지 못했다는 게, 정확하겠지."
소리치려다가 눈치 보면서 진실을 입에 담는 모습.
그런가, 파라라는 사람은 죽었구나.
죽기 전에 고백하는 것도 성공하지 못한 모양이다.
"이봐, 스노우."
"응."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순 없나?"
"...일단 이야기를 들려줘."
"할 수 있나, 없나."
"그건... 내 추측이 맞다면, 방법은 있어."
아직은 말할 수 없지만, 방법이 있을 거로 생각한다.
탑을 오르면, 알 수 있는 게 있을 테니까.
"피오레."
"뭐냐."
"마법 소녀와 연인이 되려던 사람이 왜 마법 소녀를 증오하게 됐는지, 알려줘."
"안다고 뭐가 달라지나?"
내 말에 씁쓸한 미소가 피오레에게 담긴다.
...솔직히 달라지진 않지만.
"그래야만, 내가 너를 구할 이유가 생기니까."
"어이가 없군."
내 말에 혀를 차면서도 고민하듯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치는 모습.
잠시 후 눈을 한 번 감은 그가 차분한 눈동자로 말했다.
"어차피 하든 안 하든 나는 손해군. 좋다, 들려나 주지."
그렇게 그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