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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마법소녀-92화 (92/149)

〈 92화 〉 나라 전복

* * *

Side 루리에

정신을 차렸을 땐, 희미한 바다의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풍경.

아포칼립스에는 흔하지 않은 나무들로 만들어진 집과 가구들.

허공을 떠다니는 마법 기기 하나를 마력으로 잡아 살피자, 확실하게 예전 우리 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게임기에 붙어있는 자작 스티커.

어쩐지 그리운 감각에 잠깐 그걸 쓸어보듯 만지작거리다가 주변을 살핀다.

지금 이 공간이 우리 집을 형상했다는 것은 알겠다.

그럼...

"루루~? 어딨니?"

그때의 일상처럼 루루를 불러본다.

집 안에는 인기척이 없다.

"..."

감각이나 이런 건 멀쩡하구나.

새삼스레 느끼며 신발을 신고 문밖으로 나선다.

루루와 내가 자주 가던 해변으로 걸어간다.

아직 피오레가 쳐들어오기 전.

바다가 갈라지지 않은 평범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루루?"

"언니? 추운데 왜 나왔어~"

­ 아파.

웃으면서 나를 반기는 루루의 목소리와 고통 찬 루루의 목소리가 겹친다.

나한테 쪼르르 달려와서 안기는 루루를 안아주자,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헤헤거리는 루루의 모습.

어쩌다가 이 아이가 나를 이어 마법 소녀가 됐을까.

분명 다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였겠지.

"그런 옷으로 나온 사람이 할 소리야~?"

"그치만~ 소리가 들렸는걸!"

"소리?"

"응! 멀리서 불꽃놀이처럼 퍼엉! 하는 소리가 들렸어!"

"퍼엉...?"

­ 그래, 그런 일도 있었을지도 몰라.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또다시 혼란스러운 목소리.

퍼엉 소리와 불꽃놀이.

기시감이 느껴진다.

"그치만... 이런 때 불꽃놀이 하면 몬스터들이 오지 않을까? 위험할 거 같아!"

"그러게, 위험하니까 루루는 마을로 잠시 가서 말 좀 전달해주지 않을래?"

"위험해? 위험하면 언니도 같이..."

"잠시 시간만 끌고 갈 테니까, 시청에 '전투태세를 준비해주세요'라고 전해달라 했다고 말해줄래?"

"언니...?"

"괜찮아. 언니는 전보다 강하거든."

환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이 당시 내 스펙은 2성과 3성 사이.

지금과 천지 차이니까.

가볍게 변신해 몸 상태를 살핀다.

다행히 전용 장비가 그대로 남아있다.

마력도 넘실거리고, 마력 회로도 높아졌다.

지금이라면 피오레가 와도...

"..."

가능할까?

침식의 마력 자체에 닿아선 안 되는데,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아냐, 불안해하지 말자.

"언니...?"

"최대한 빨리 가줘야 언니가 편히 피할 수 있어. 착하지? 루루야."

"으, 응! 알았어! 빨리 갈게!"

"그래."

루루가 마을로 달려 나간다.

그때와 같은 상황.

그때와 다른 스펙.

할 수 있어.

­ 그때도 언니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침식의 마력이라는 마법 소녀의 천적이 있었으니까.

"지금은 달라."

­ 뭐가 다른데?

"침식의 마력은 막을 수 있어."

­ 그럼 막아봐.

멀리 하늘에서 마법 소녀 부대와 피오레가 날아온다.

생각해보면 웃기는 녀석이네, 피오레도.

보통 선발대로 본인이 직접 오는 경우는 없을 텐데.

"아쿠아 필라, 아쿠아 웨이브... 수신제."

모든 필드를 바다로 뒤덮는다.

추억의 집이 바다에 잠식당한다.

마력이 증폭된다.

피오레의 반응은... 명백한 당황.

마법 소녀가 있는 걸 보고 날아왔을 텐데, 바다로 완전히 숨어버렸으니 타겟팅이 불가능하겠지.

"절대로 보내지 않아."

마법 소녀들이 바다에 포격과 탄막을 준비하는 모습이 보인다.

서치 계열이 있는 건지, 내가 있는 방향에 집중되고 있는 모습.

일단, 너희를 땅으로 내리는 거로 시작해야겠네.

"수해, 프리즌 레인!"

그렇게 과거의 전투가 다른 방향으로 시작됐다.

­­­­

Side 사이네

"앙? 뭐야?"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한 나무가 보인다.

이 산에서 가장 큰 나무라고 했던가?

할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나무에 손을 대자, 어쩐지 전격의 마력이 반응하려는 걸 느끼며 손을 뗀다.

"...뭐지?"

왜 내가 한국에 있지?

뒤를 돌아보자 보이는 건 그리운 오두막.

아포칼립스가 되고 무언가에 작살났던 오두막이 어째선지 멀쩡하게 남아있었다.

"...환영인가?"

추측되는 건 환상을 보여주고 있단 것.

마력을 주변에 퍼뜨려 상태를 살피려는 순간, 오두막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보이는 건...

"할아버지?"

"끌끌... 뭐 하다 왔길래 그런 난폭한 기운을 다루고 있는 게냐?"

자신에게 튀려는 전격의 마력을 가볍게 흘려내며 말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그걸 바라본다.

할아버지가 살아있다.

...아니, 이건 환상일 테니까, 살아있는 게 당연하다.

그때, 할아버지는...

"이 년아,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밥이나 차려! 밥 안 먹을 거야?"

"진짜... 할아버지야?"

"그럼 짜가냐? 이 할애비, 아직 팔팔하다."

아니, 그건 보면 알지만...

간만에 보는 할아버지에게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기운에 나는 침을 꿀꺽 삼킨다.

전에는 제대로 느끼지 못해서 알 수 없었는데, 생각보다 말도 안 되는 기운을 가지고 계신다.

물론 스펙만으로 따지면 내가 위겠지만, 어쩐지 근거리 전에서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할아버지."

"뭐야?"

"언제부터 그렇게 강했어?"

"뭬야? 이 년이 어디서 뭘 처먹고 왔길래 헛소리야? 할애빈 원래 강했어~ 나 때는 말이야!"

"아니아니, 할아버지 이야기는 엄청 많이 들었거든!? 그게 아냐!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째서...!"

"뭔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쳐먹겠구먼, 알아듣게 말해, 알아듣게!"

"..."

여전한 성격이잖아.

어쩐지 입가에 담기는 미소에 할아버지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환상이라도 이정도 구현도면 인정해줘야지.

"그런데 할아버지."

"쓰읍, 밥 먹자니까."

"아니아니, 마지막 질문이야."

"뭬냐."

"할아버지는 잠든 상태일 때 갑작스럽게 집이 조각나면, 살아남을 수 있어?"

"흠?"

뜬금없는 질문이겠지.

하지만 할아버지는 내 표정을 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하시기 시작한다.

할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사람이다.

내 질문에 대해 생각하고 나온 대답은 분명 진실일 터.

"뭐, 상처는 좀 입겠지만 살지 않겠냐?"

"그래?"

"그럼. 할애비는 강하니까 말이다."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활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징그럽게 왜 웃는 게야?"

"할아버지, 지금 한 판 붙자."

"...어디서 이상한 거 주워 먹더니, 겁이 없어졌구먼?"

내 말에 할아버지가 사납게 웃으면서 기운을 일으킨다.

우와 평소에 기운도 못 느끼는 손녀한테 기운까지 써서 팬 거야?

그거참...

"할아버지답네!"

전격의 마력을 일으킨다.

동시에 별의 마력까지 일으키자 제법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할아버지.

하지만 재밌겠다는 것처럼 웃은 할아버지가 먼저 스텝을 밟아 달려들고, 나는 먼저 카운터 자세를 잡는다.

"얼마나 늘었는지 보자꾸나!"

"알겠다고!"

­­­­

Side 루루

단체로 미친 건가.

아니, 미친 거로 치면 내가 가장 미쳤지만.

"아파."

기억이 아프다.

기억이 맛있다.

마력이 맛있다.

맛있으면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아?

"...아냐."

이게 아니었어.

분명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이게 아냐.

나는 파괴자가 아냐.

세계를 파괴할 운명이 아니었어.

뭔가 틀어졌어.

분명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니야.

"아하하? 무슨 생각이려나!"

입 안 가득 담기는 마력을 먹어 치운다.

다른 생각하지 마.

너는 그냥 네 목적에 충실하면 되잖아?

"내 목적? 목적? 아, 인류 몰살! 맞아! 그런 게 있었어!"

그랬던가...?

모르겠다.

내 목적이 그런 거 였나?

"아냐, 내 목적은... 언니와 같은..."

무슨 소릴 하는 거니?

너는 이미 많은 걸 먹었잖아?

많은 걸 당했잖아?

이제 그걸 갚기만 하면 끝인걸?

깊게 생각하지 마.

"아하하, 깊게 깊게 내려가는 거야! 그래야 '우리' 목적을 달성할 수 있어!"

저 두 사람은 뭘 위해 싸우고 있는 걸까?

언니의 목적을 알면 내가 알 수 있지 않을까?

"아냐아냐, 그런 걸 안다고 뭐가 달라져? 그냥 전부 먹어 치우면 다 해결인데!"

인류를 멸망시켜야 해.

그래야 내 목적을 이룰 수 있어.

그랬던가?

아냐, 그랬을지도. 몰라.

"아무래도 좋은 일이잖아?"

여기 맛 좋은 먹이가 있습니다.

맛 좋은 먹이가 훌륭한 기억과 마력을 동시에 주고 있군요!

심지어 마력을 더 강하게 주기 위해 날뛰기까지!

굉장한 일입니다.

무한 리필 고급 마력이라니, 극상이다.

"그래."

그거면 된 거야.

나는 모든 걸 먹어 치우는 빛.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내려온 사도.

...그걸로 된 거야.

­­­­

"생각보다 안 나오네."

잠잠해진 피오레를 보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만다.

빛의 짐승이 가진 힘은 마력을 흡수해 주인에게 전달하는 것.

평범하게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닐 텐데, 지쳤다기보단 마치...

"아."

이거 환상 기능도 있었네?

아무래도 저 녀석이 조용한 이유는 어떤 환상을 보고 있기 때문인 모양이다.

[무슨 환상인가요?]

[환상? 그건 또 뭔 소리야?]

"마법에 환상이 포함돼있어. 보자... 대상에게 가장 중요했던 분기점...?"

머릿속에 떠오르는 술식의 해석에 따르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모양이다.

굳이 따지고 들어가면 볼 수도 있는 모양인데...

"중년 아저씨 기억을 굳이 볼 필요가 있을까."

[주인은 가끔 잔인할 때가 있어.]

[마스터는 별생각이 없으니까요.]

"나도 생각은 있어."

내가 툴툴거리듯 말하자 그런 거로 하자고~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진짠데, 생각하고 말하는 건데.

[의식의 흐름대로 말하는 걸 생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스터.]

"그게 생각이잖아."

[됐어됐어~ 그래서 주인, 어떻게 할 거야? 인생의 전환점 같은 환상이라면, 돌아오지 않아서 육체가 죽을 확률이 있다고?]

"으음..."

그건 곤란하다.

이대로면 완전히 다 빨릴 때까지 나오지 않을지도...

"하아..."

결국 봐야 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 직후 입을 닫은 채로 나에게 마력을 보내는 괴물을 툭툭 친다.

그러자 뭐냐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빛의 괴물.

...얘 왜 이렇게 아니꼽게 반응하니.

"내가 싫어?"

크렁?

"아니면 말고."

크릉.

[...이게 무슨 대화냐? 주인한테 동물 회화라도 달려있어?]

[세르칸, 생각하면 지는 겁니다.]

"..."

우리 애들이 오늘따라 왜 이리 날 못 괴롭혀서 안달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괴물에게 손을 댄 채로 집중한다.

들어가야 하는 건 피오레의 환상 속.

그 안으로 들어가서 피오레를 꺼내야...

"응?"

그런 생각을 할 때, 피오레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영혼이 인식된다.

육체의 주인...으로 추측되는 사람의 영혼.

피오레가 의식을 놓는 순간같이 환상 속에 들어가 버린 건지, 이 영혼 역시 뭔가 꿈같은 걸 꾸고 있는 모양이다.

술식 상으로 해제할 수 없나...?

"안 되겠네."

아무래도 해제하려면 마법 자체를 해제해야 하는 모양.

피오레에게 들어가기 전에 육체 주인부터 꺼내야 할 상황이다.

"...다녀올게."

[다녀오시길.]

[아, 꺼내려고?]

"응."

그렇게 답하며 나는 소녀의 환상으로 들어갔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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