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나라 전복
* * *
Side 루리에
하루가 지나며 마력 회로가 서서히 안정화되기 시작했다.
과부하 일으킨 게 한두 번이 아니라서 그런지, 마력 회로가 회복되는 속도가 나름대로 빠르다.
...보통 이 정도면 늘어날 법도 한데, 그만큼 재능이 없단 소리려나.
씁쓸한 일이다.
"와, 대단하네. 1:1로 막고 있는 건가?"
"무슨 이야기야?"
밤에 잠은 잔 건지 모를 루카의 말에 내가 곧바로 묻자, 붉은 눈을 하고 있던 검은 소녀는 아. 하면서 말했다.
"스노우? 맞나? 걔랑 루루랑 이상한 결계 안에서 싸우고 있어. 지연전으로 싸우는 느낌인데?"
"무슨... 보여줘."
"내가 무슨 영상 재생기로 보이냐구..."
내 말에 투덜거리면서도 허공에 거울을 만들어내 상황을 보여주는 루카.
안에서는 허공에서 능숙하게 비행하며 루루가 던지는 모든 빛을 가볍게 피해내고 있는 스노우의 모습이 보인다.
"우와, 뭐지? 저건 나도 못 피하겠는데 어떻게 피하는 거야?"
"왜...? 스노우...?"
"흐암... 응? 뭐야. 뭔 일 있어?"
루카가 감탄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본다.
지금 거울 속 광경은 분명 '배려'가 담겨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
루루를 상대해야 하는 건, 나와 사이네.
지연전을 하는 이유는 그거 하나뿐.
실제로 스노우와 루루가 부딪히면 스노우는 이길 수 있겠지.
하지만 그래 봐야 의미가 없다고, 별 무리의 마법 소녀는 그렇게 판단하고 싸우지 않고 있었다.
말 그대로 회피만 하고, 피할 수 없는 공격만 격추할 뿐.
루루도 마법을 난사하는 중 이상함을 느낀 듯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이 눈에 띈다.
"엥? 스노우가 밀리...는 건 아니네. 뭐하러 저런데?"
"...스노우는 우릴 위해 시간만 끌고 있는 거야."
"우리? 우리가 직접 처리하게 만들려고 저러는 건가?"
"...응."
루루는 내 동생이니까, 되돌려놓은 것도 언니인 내가 할 일.
그걸 위해 스노우는 루루를 방해하기만 할 뿐, 피해를 주지 않는다.
자신의 정신력을 깎아내면서까지 의지를 관철하는 게, 솔직하게 바보가 할 발상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필요 없는 일이다.
스노우 입장에선 그냥 루루를 쓰러뜨리고 죽이는 편이 좀 더 간단할 테니까.
"어이, 루리에."
"응..."
"회복은 얼마나 됐어?"
"절반."
"쯧, 얼마나 걸릴 거 같은데?"
"3일 정도."
"큰일이구만."
사이네가 혀를 차면서 계속 회피만 하는 스노우를 바라본다.
저런 회피 동작을 12시간을 넘게 하고 있다보면, 집중력이 흐트러질 법도 하건만.
무표정하고 가벼운 움직임으로 전부 피해내고 있는 그녀를 보며 나는 입술을 깨문다.
좀 더.
좀 더 빠르게 회복해야 해.
스노우를 도울 수 있도록.
스노우가 위험해지지 않도록.
나는 수해의 마법 소녀.
물을 담당하는 마법 소녀이자,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는 마법 소녀.
물의 마력은 피에 가깝다.
언제나 온몸을 시원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피처럼 흐르는 마력.
지금도 마력 회로를 과부하 시키고 있지 않을 뿐, 물의 마력은 계속해서 온몸을 회전하고 있다.
물의 마력이 회복의 마력이라면.
마력 회로도 회복시킬 수 있어야 하는 거잖아.
마력 회로로 흐르고 있는데 과부하조차 제대로 진정시키지 못하면 안 되는 거잖아.
"이런 식으론 안 돼."
그리고 뭔가 일어나려는 순간.
루카가 콩. 하고 손날로 내 머리를 치는 감각에 나는 흠칫하며 그녀를 바라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뭐가..."
"믿기지 않네, 너 방금 마력 폭주 일으키려던 거 알아?! 조급해하지 마. 너 지금 단기간 안에 5성 찍었잖아! 거기서 더 각성하려고 억지로 생각한다고 해서 각성하는 게 아니란 말야! 오히려 마력 역
류나 폭주 일어나서 돌이킬 수 없게 된다고!"
"5성... 그런 별이 중요한 게 아냐. 내가 지금 회복할 수 없단 게 문제..."
"루리에."
"사이네...?"
"스노우를 못 믿는 거냐?"
"무슨..."
사이네의 말에 내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평소와는 다른 평온한 표정을 한 사이네가 말했다.
"정말로 스노우를 믿고 있다면, 그냥 평범하게 회복을 기다리라고?"
"어떻게 그래. 나는..."
"스노우가 너 때문에 희생하니 뭐니 말하려는 거지? 아냐아냐, 저거 그냥 쟤가 떼쓰는 거잖아."
"떼를 써...?"
내 말에 사이네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네 상대는 내가 아냐! 그래도 네 상대가 아픈 상태니까, 잠깐 상대해줄게!"
"..."
"뭐, 그런 느낌 아니겠냐. 딱히 우리가 해달라 한 것도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만..."
"급한 거 없어. 저 녀석은 가능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저러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넌 회복에 집중해."
"...응."
사이네의 말에 나는 조급함이 조금 사라진 걸 느끼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사이네가 갑자기 어른이 됐네.
내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을 얌전히 달래는 모습이 신선한 느낌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마스터, 그래도 조금은 반격하는 게...]
"싫어."
[어이, 아무리 그래도 네 집중력이 못 버틴다고? 며칠이나 할지 모르잖냐.]
"괜찮아."
북서쪽 도착까지 1.5초.
동쪽 도착까지 1.3초.
앞 30도 방향 도착까지 0.4초.
모든 탄막의 방향을 읽어내며 최적의 경로로 비행한다.
가끔 아예 경로가 없을 때만 슈팅 스타를 만들어 격추할 뿐, 제대로 싸워주지 않는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지연전.
적에게 상처입히는 일 없이 그대로 시간만 끌어야한다.
"왜, 왜 안 싸우는 거야! 덤벼온 건 너잖아! 놀자고 한 것도 너잖아! 왜 싸우지 않는 건데!"
"네 상대는 내가 아니니까."
"아까부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건데!"
"네 상대는 루리에랑 사이네야."
내가 아예 공격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화난 듯 소리치며 빛의 탄막을 날리곤 동시에 포격을 준비하는 모습.
과연, 회피 경로를 아예 없애면서 동시에 포격을 준비하는 모습에 나는 나름대로 감탄하며 앞으로 손을 뻗는다.
"오버 히트 버스터."
"이곳에 신성한 빛의 심판을!"
콰아아앙!
가볍게 만들어낼 수 있는 오버 히트 버스터에 마력을 양껏 담자, 루루의 빛의 광선과 적중해 중앙에서 그대로 폭발이 일어난다.
동시에 연기를 뚫고 날아오는 탄막을 또다시 회피.
세르칸과 렌을 동시에 단검으로 만들어 몇몇 탄막을 그대로 베어낸다.
순환시로 색채만이 남은 공간을 바라본다.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빛의 탄막은 노란색.
...이제야 무지개 완성이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날아드는 빛의 탄막을 하나하나 베어내기 시작한다.
"아...?"
"너무 느린 건 안 피할래."
모든 마력을 읽어내고, 마력의 핵을 절단한다.
비행을 멈춘 상태로 마력 베기에 집중한다.
몇몇 탄막은 가볍게 피해내고, 몇몇 탄막은 베어낸다.
계속 그걸 반복하고 있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루루의 모습.
정신이 망가진 사람한테 저런 눈을 받다니 상처받는 일이다.
내가 입술을 삐죽하고 내밀곤 탄막을 이제 회피하지도 않고 전부 베어내자, 렌과 세르칸이 말했다.
[...정신이 더 망가질 거 같습니다만.]
[내가 볼 땐, 주인이 더 너무한 거 같은데.]
왜, 뭐.
내가 뭐 했다고.
내가 계속 탄막을 눈으로 보고 직감적으로 피해내고 있는데 탄막을 날리는 쪽이 잘못한 일이다.
패턴처럼 익숙해지기 시작한 공격을 보며, 예측을 발동하지 않고도 계속 베어내기 시작한다.
사용한 건, 별의 마력으로 만들어 낸 강화 마법 정도.
그 이상은 의미가 있나 싶다.
[마스터는 검을 사용한 적이 있습니까? 단검술이 굉장히 능숙합니다만...]
"프로게이머라는 직종은 여러 게임을 섭렵해야 하거든. VR 중에는 이렇게 단검술을 쓰는 게임도 있어."
[프로게이머? 음... 관리 외 차원에서 본 기억은 있는 직업인데.]
[프로게이머보단 프로 스트리머들이나 할 행동 같습니다만?]
"프로게이머가 은퇴하면 스트리머가 되니까."
완전히 여유가 생겨 AI들과 떠들기 시작하자, 루루는 삐진 듯한 얼굴로 공격을 멈춘다.
정신이 망가진 상태로도 삐졌다는 티를 팍팍 낼 정도라니, 너무 괴롭힌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니, 아니지.
괴롭힘당하면 빡치는 게 정상이잖아.
왜 삐진 티만 내고 제대로 안 덤비는 건데.
[제대로 덤비고 있는 거 같습니다만...]
"쟤, 마도사 형 마법 소녀가 아니야."
[엉? 마도사가 아니라고? 대놓고 탄막이랑 포격만 쓰고 있는데?]
"응."
확신에 가까운 내 말에 세르칸이 으이잉? 하면서 당황의 기색을 보이고, 나는 가만히 루루를 응시한다.
그래, 루루는 근접 전투계 마법 소녀지, 딱히 마도사형 마법 소녀가 아니다.
내가 지금 18시간이 넘게 1페이즈를 피하고 막아냈으니, 아무리 루루라도 슬슬 2페이즈로 넘어갈 때가 됐다.
"...진짜, 진짜 너무한 사람이야."
'수족'이라고 부르던 무언가와의 연결을 차단한 채로 빛의 마력으로 이뤄지는 마법을 전부 파훼.
평범한 마법 소녀처럼 전투하려는 그녀를 무시하고 괴롭힌 나를 루루는 살짝 물기가 담긴 눈으로 바라보며 동시에 신체 강화라도 한 듯 노란 색채가 그녀의 방향에서 강하게 피어오른다.
사실 가능하면 1페이즈로 루리에가 올 때까지 버티고 싶었는데... 역시 그건 좀 그렇지?
"렌, 너클."
[네, 너클 모드.]
렌을 단검에서 너클로 바꾸고, 세르칸 역시 똑같은 너클로 변화 시켜 장착한다.
동시에 순환시를 끄자 굉장히 빠른 속도로 나에게 날아오기 시작하는 루루의 모습.
...그러고 보니 사이네가 빛을 쓰는 가짜 마법 소녀한테 졌었지?
다시 만나면 리벤지 전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자연스럽게 킥복싱 자세를 잡는다.
[VR에 킥복싱도 있습니까?]
"있지."
[...VR이란 게 다리도 움직이던 거였나?]
"연결하는 기기가 있어."
물론 내가 제대로 배운 건 아니라서 사실 그냥 마력 강화로 상대보다 빠르게 움직일 예정이다.
어차피 상대의 공격을 읽어내는 건 쉬운 일이니까.
내가 가진 능력을 활용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런 생각을 할 때, 루루가 곧바로 나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페이크?
공격한 왼손이 너무 가볍다는 걸 깨닫고 곧바로 다른 쪽 손을 들어 올리자, 파앙! 하고 경쾌한 소리와 함께 막히는 오른 주먹.
막힐 거로 생각하지 않았는지, 얼굴을 찌푸린 소녀가 물러나려는 순간, 나는 그녀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막혔으면 맞아야지."
"치잇...!"
잡은 그대로 바닥으로 고속 낙하해 바닥으로 내리찍으려는 나.
그러자 그녀가 발버둥 치듯 허공에 마법진을 그리며 탄막을 날리지만, 자연스럽게 나타난 프로텍션이 탄막을 막아낸다.
콰앙!
"꺄윽!"
"스타더스트 스트라이크."
바닥에 내려찍음과 동시에 손가락을 하늘로 향하며 말하는 나.
루루가 충분히 피할 수 있도록 놓아주면서 떨어뜨리자, 그녀는 황급히 비행해 간신히 범위를 벗어난다.
[...저런 것도 나름 데미지 누적입니다만.]
"마력도 안 쓰고 그냥 충격만 준 거야."
마법소녀를 바닥에 내리꽂는다고 데미지가 제대로 들어가는 건 아니다.
루루가 비명 소릴 냈지만, 그건 생각지 못한 충격 때문일 뿐.
정말로 못 버틸 정도로 아팠다면, 저런 비명 정도가 아니었겠지.
"격투술에서 피해 주는 건 어쩔 수 없어. 데미지 주는 걸 엄청 약하게 할 수밖에."
"..."
빠득.
내가 여전히 봐주고 있다는 걸 알아챈 듯 루루가 이를 갈지만, 어차피 루루로서도 크게 손해 볼 일은 아니었기 때문인지 별다른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달려들 기세를 보인다.
지금 부딪힘으로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나한테 닿지 못할 거라는 걸 안 거겠지.
...솔직히 격투로 덤비는 거 자체가 추천해주고 싶진 않은 쪽인데.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시간 끌기니까, 격투로 오면 내 입장에선 귀찮게 된단 말이지.
오히려 그걸 알아서 격투로 덤비는 걸지도.
다시 비행해서 날아온 루루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연타를 날리기 시작한다.
순간순간 예측했음에도 피할 수 없는 공격 몇 개만 가볍게 흘려내며 피하고, 막아내는 나.
오히려 때리는 쪽이 지칠 정도가 될 때까지 계속 피해내기 시작한다.
"..."
"허억..."
설마 격투로 덤벼도 통하지 않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믿기지 않는단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
나는 별로 지치지 않은 모습으로 슬쩍 뒤로 비행하며 말했다.
"수족인가 뭔가 하는 게 생각보다 네 힘 비중에서 크구나."
"..."
"전에 봤던 그 애도 계속 지원받으면서 싸웠었으니..."
신의 힘이니 수족이니 하는 뭔가의 지원이 없으니 굉장히 약해진 모습이다.
...의외로 마법 소녀 등장! 스킬이 완벽하게 루루의 카운터 스킬인 모양.
그렇다고 하더라도 포격전으로 들어가면 얼추 비슷하게 싸워볼 만 해 보이긴 한데...
[농락하지 말고 그냥 죽이는 것도 방법입니다.]
[상대가 불쌍하다고.]
"...얘 나름 파괴자거든."
사실 파괴자로서의 힘을 거의 다 밖에다 던져놓고 왔으니, 그럴 만도 하단 생각이 든다.
마력 공급을 유지하고 있진 않지만, 저 성역 비스름한 게 이 아이의 원천일 테니까.
샤브린의 고유결계나 내 마법 소녀 등장! 스킬은 완전히 천적.
어라? 그럼 사이네도 그런 류로 배우고 왔던 건가?
...그건 아닐 거 같은데.
"죽이지 않아. 애초에 아군인걸."
"...나는, 나는, 인류를, 파괴해야 해."
고오오
"아."
이건 좀.
아무래도 제대로 망가진 건지 눈동자에 초점이 나간 모습을 보며, 나는 긴장하며 그녀를 바라본다.
1페이즈도 피해서 끝내고, 2페이즈도 쉽게 이기는 모습을 보이니 바로 3페이즈로 넘어간 모양이다.
"나는, 인류의 종언. 나는, 인류의 수호자."
"..."
"아냐, 나는... 나는...!"
회색빛 마력이 사방을 잠식하려는 걸 보며, 나는 고민하다가 별의 마력을 흩뿌린다.
마법 소녀 등장 결계를 강화해 루루의 마력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러자 결계 안을 가득 채우는 회색빛 마력.
잠시 후 풀어졌던 마력이 시야를 완벽하게 가렸다가, 스르륵. 하고 시간이 되돌아간 것처럼 루루에게로 스며든다.
그리고 뒤에 나타나는 째깍거리는 시계의 형상.
"...저건 또 뭐야."
그걸 보며 내가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 콰아아아아앙! 하고 결계를 부술 것처럼 성역에서 무수한 포격들이 이쪽으로 쏘아지기 시작한다.
엄... 제가 몬가 잘못 건드렸소요?
[...사탄이 울고 가겠네요.]
왠지 렌의 말이 심장을 찌르는 기분이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