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3단계 세력
* * *
원래 육체를 소환한다라...
생각지 못한 해결 방법이다.
어차피 저쪽 세계로 돌아가도 만나는 사람이라곤, 지겹도록 질투만 하는 선수들뿐.
감독님이야 반기겠지만, 글쎄... 그것도 내가 게임을 잘해서 그랬던 거고, 지금 돌아가도 좀 더 젊은 애들보다 잘할 수 있을지는 다소 의문이 든다.
그래, 나쁘지 않은 수다.
[네, 그렇다면 그렇게 하시는 게...]
"하지만, 그건 나잖아."
[네?]
그건 스노우가 아니라 '나'다.
스노우로서 활동해온 나도 백지화될 거고, 스노우로 들어가는 유지 유미카도 다른 사람이 되겠지.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스노우의 외모와 내 성격이 잘 맞았기 때문에 다들 나를 좋아해준 것 뿐.
어차피 원래 육신으로 돌아가면, 나는...
[아닙니다.]
"아냐, 맞아."
[설령 마스터가 원래 육신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마스터의 성격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건 선천적 외모와는 관계없습니다.]
"...아냐."
만약 그렇다면, 나는 원래 세계에서 칭송만 받을 게 아니라 두루두루 친했어야 했다.
모두가 그렇게 떠났을 리가 없다.
모든 건 내 성격과 모두의 상식이 맞물리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문제.
스노우 때는 어째서인지 다들 좋게 받아들여 줬지만, 그건 유지의 외모 덕이지 딱히 내 성격이 좋아서가 아니다.
[쓸데없는 걱정이구만.]
"..."
[어차피 전부 다 구해내고 나서의 전제잖냐. 지금은 구하는 거에 집중하는 게 낫지 않겠어?]
[세르칸,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냐? 지금 그걸로 망설이다가 그냥 멸망 엔딩 나면, 누가 책임질 수 있는데? 지금 세계 굴러가는 꼬락서니가 스노우 없으면 안 되는 일들 투성이로 보이는데.]
[그렇긴 합니다만, 혹시나 오게 될 미래를 준비하지 않으면, 당장 찾아왔을 때 망설이기 마련이죠.]
[거, 주인이 세진 건 알겠지만, 당장 내 전 주인이 상대한 적 중에 주인보다 강한 녀석이 제법 많았어.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걸 신경 쓰다가 자기 수준 이상의 적을 만났을 때 실력 부족으로 지는 걸 이야기하는 거라고. 내가 볼 땐 지금 주인은 하나에 집중해야 할 시기야. 포기할 건 포기하자고.]
두 사람 다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잠깐 눈을 감고 침묵한다.
세르칸의 말이 옳다.
지금 내가 강해진 상태라고 하더라도, 더 강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세계를 멸망으로 이끈 '주체'가 있을지도 모르지.
세계에 구멍을 뚫은 사람.
관리자는 말 그대로 '관리자'일 가능성이 높다.
분명 뒤에 흑막이 있을 거고, 차원을 깨고 들어오는 건 나로선 불가능한 일.
즉, 나보다 강한 사람이 흑막일 가능성이 높다.
다른 걸 신경 쓰기엔 내 실력이 모자라다.
그리고 렌의 말도 옳다.
멸망을 막고 나에게 시간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상황에 부닥칠 가능성이 높다.
준비하지 못한 상태로 선택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나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
모든 게 끝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도 생각해볼 문제가 맞다.
두 사람 모두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라는 동일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방향이 다를 뿐.
"둘 다 하자."
[역시 주인이야, 다 생각해둔 건가!]
"아니, 생각하진 않았어."
[그런 거냐고.]
[마스터는 저희가 말한 두 가지를 동일한 선상에 두고 있군요. '미래를 대비한다'로.]
[당장 해야 할 건 어쩌고?]
"지금 생각해봤어."
루루를 잡는 게 정말로 내 일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루루를 잡는 건, 루리에와 사이네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
[으잉? 그 둘로 되겠어?]
"...루리에가 한 행동을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
루리에가 왜 영구 봉인 마법까지 걸어서 루루를 묶으려고 했는지, 알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자신이 동생을 구할 수 없다는 걸 분하게 생각하면서도 최선의 수를 생각했다.
책임감을 느끼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얼음의 성뿐만이 아니다.
여기저기 흩어진 얼음과 폭발 자국이 루리에가 얼마나 분전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분명 루리에가 스펙이 밀리는 상태로 루루가 움직이는 걸 막아냈다.
분명 그런 생각이겠지.
자기가 언니니까.
아무리 동생이 자신보다 더 강하다고 하더라도... 언니니까 동생이 잘못된 길로 향하는 걸 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막아섰다.
루리에가 지키고 있던 건, 한 동굴.
분명 파괴자의 각성 무구가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동굴을 루리에는 틀어막은 채로 버텼다.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의 공로를 뺏는 건, 옳지 못해."
[그렇다고 해도 말이지~ 나로선 그 둘이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안 든다고? 사이네가 수호자가 됐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 난 다르게 생각하는데."
[네, 저도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래~?]
"사이네는 초창기 셋인 우리 중 가장 약한 애였어. 공격적인 속성인 '전격'을 가지고."
[그렇지?]
"세르칸이 아마 착각한 거 같은데, 비행할 때 나는 마력으로 가속했어. 비행 마스터 수준을 넘어선 수준으로 가속한 거지."
[음...]
그걸 사이네가 따라왔다.
그 시점에서 사이네는 최소 내 근처까지 수준이 올라온 상태란 이야기다.
중간에 식겁하면서 말한 거로 볼 때 내 수준까지 올라오진 못했지만, 그래도 파괴자를 상대하기엔 충분한 실력까지 올라와 있단 의미다.
"무엇보다 루리에와 사이네가 연합하면 굉장히 강하니까."
물과 전격의 조합은 나도 애용하고 있는 조합이다.
물의 마력과 전격의 마력이 조합하면 효과가 배가 되는 게 아니라 3배 이상의 위력이 튀어나올 때가 많으니까.
순수 화력은 불과 별이 가장 강하겠지만, 물과 전격 조합보다 뛰어난 조합식은 없다.
"두 사람이면 잘할 수 있을 테니까, 걱정 마."
[뭐, 그럼 그렇다 치자고. 그럼 주인은? 뭐할 건데?]
"...공격할 거야."
루루를 구출한다는 명목에서였지만, 본 목적은 따로 있다.
ㅡ피오레를 잡는다.
피오레에게 잡힌 마법 소녀는 한둘이 아니다.
전부 침식당해 노예처럼 부려지고 있을 게 분명한 상황.
그녀들을 해방하려면 내가 나설 수밖에 없다.
"피오레, 지금 잡아야 해."
루루가 풀려난 거로 볼 때, 피오레 측에도 피해가 쌓인 상태일 가능성이 높았다.
칠 거면 지금.
영원한 밤의 마법 소녀와 연합해서 지금 쓰러뜨려야 나중에 뒤통수 맞을 일이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루리에를 영원한 밤의 마법 소녀에게 맡긴다.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무시하고 이동.
피오레가 있던 성으로 가던 중, 필드 보스 하나를 만나 가볍게 제압한다.
애초에 내 마력량에 겁을 먹고 있던 녀석이라 쉬운 상대였다.
이런 부작용이 있구나.
마력을 갈무리할 생각을 안 했더니, 아무래도 바로바로 내 스펙이 보이는 모양이다.
[마스터, 종속이 가능해 보입니다만...]
"됐어, 약해."
[크핫! 들었냐, 렌? 얘가 약하단다! 캬, 엄청 컸구만?]
[마스터 기준에선 굉장히 약한 게 맞습니다.]
[와우...]
진심이냐는 것처럼 당황하는 세르칸을 내버려 둔 채, 나는 잠시 고민한다.
죽이기엔 불쌍하고, 종속시키기엔 영 약한 수준.
그렇다고 풀어주면 또 사람들을 습격하는 녀석이 되겠지.
뀨뀨...
손에 권투장갑을 낀 토끼가 귀를 축 늘어뜨린 채로 바닥에서 안쓰러운 표정을 한 채로 나를 바라본다.
귀여운 척해도 의미는 없지만... 그렇네, 적어도 이야기는 알아듣는 느낌이다.
"잘 들어."
뀨!
"지금 너한테 걸린 계약을 끊어줄 거야. 그럼, 사람을 습격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뀨?! 뀨뀨뀨!
내 말에 화들짝 놀라면서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는 모습. 생각보단 지능이 괜찮은 모양이다. 자기한테 족쇄 같은 게 걸려있단 사실도 잘 알고 있는 모양.
허공에 마력을 모아 그대로 검으로 만들고, 계약으로 보이는 쇠사슬을 베어버린다.
그러자 내가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에 화들짝 놀라다가, 이내 눈을 깜박이며 뀨? 뀨? 하더니 주변으로 주먹을 휘두르는 모습.
그리곤 뀨! 하면서 격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음에 네가 사람을 습격한다는 소리가 들리면, 그땐 끝이야."
뀨뀨!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깡충 거리면서 멀리 보이는 산으로 뛰어가기 시작하는 모습.
그걸 잠시 바라본 내가 다시 시선을 옮기자, 조금 먼 곳에 피오레의 반파된 성이 보인다.
...루루가 제대로 날뛰었구나.
괴수가 물어뜯은 것 같은 형상의 성벽들을 보며, 나는 곧바로 마력을 일으킨다.
굳이 들어갈 필요도 없다.
내가 원하는 건 피오레를 잡는 것뿐.
상대가 나오도록 공격할 뿐이다.
화염의 마력이 피어오른다.
거대한 태양이 내 손으로부터 생성되고, 그대로 땅을 향해 내리꽂힌다.
성에 닿으려는 순간, 성 측에서 나타나는 10겹이 넘는 마법 방패.
적어도 적은 10명 이상의 마법 소녀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ㅡ약해.
그렇다고 해도 약하다.
너의 전력은 절망의 마법 소녀 뿐이었나, 피오레.
그런 수준으로 마법 소녀들을 타락시키고 이용하려고 들었단 거야?
별의 마력이 피어오른다.
쏘아내는 건, 전력의 포격.
아직도 내 화염 구체를 막아내는 걸 보며, 마력을 더한다.
그 순간.
타앙!
[프로텍션]
티잉!
마력이 담긴 스나이핑 탄환이 내 실드에 부딪혀 떨어진다.
동시에 사방에서 날아오는 미사일 세례.
모든 방향을 예측하고, 시간 초를 예측해 슈팅 스타를 날린다.
전부 격추.
이어서 기관총 세례가 쏘아지지만, 그 정도로 뚫릴 실드가 아니다.
화염 구체를 막아낸 직후.
각양각색을 가진 마법 소녀들이 비행해서 날아오기 시작한다.
검, 창, 활, 채찍, 방패, 지팡이 등등.
정말 많은 숫자의 디바이스가 눈에 보이며, 각자 마력 공격을 날려온다.
강한 것도 약한 것도 있지만, 부질없다.
아, 그럼 그거라도 테스트해볼까.
생각보다 전체적 스펙이 약하니까, 가능할 거 같은데.
[마스터?]
생각이 길었는지, 마력 탄환이 코앞까지 날아든다.
세르칸이 당황하면서 변하는데 0.2초.
탄환 적중까지 0.3초.
그 정도면 상관없는데, 다들 걱정이 많네.
"Ich wurde für einen Stern geboren.(나는 별이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
샤브린과 비슷한 영창.
첫 구절을 읊는 순간, 사방으로 별의 마력이 퍼져 나간다.
닿기 직전의 마력 탄부터 시작해서 광범위하게 모든 마법을 무효화시키는 별의 마력.
나는 고요한 눈동자로 그걸 가만히 지켜본다.
아무래도 나쁘지 않게 처리된 모양이다.
[마스터, 그건...]
"엔딩 그레이브, 샤브린 심상이라 사용할 수 없었어."
고유 결계를 구축하는 엔딩 그레이브.
내 심상이 아닌 샤브린의 심상을 복사했기 때문일까?
전혀 사용할 수 없는 힘이었기에 잠시 고민해본 적이 있었다.
이걸 사용하면 분명 더 나아갈 수 있을 텐데.
파괴자의 힘을 어느 정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 하나만으로 영창 초반부를 만들었는데... 생각보단 잘 된 모양이다.
"중요한 건, 독일어와 구절의 의미."
[이게 뭔 소리래?]
[샤브린이라는 자의 고유 결계를 사용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굳이? 없어도 센데?]
[마스터의 심상을 만들어내면... 아마 스타라이트 브레이커 정도는 추가 마력 없이 바로 그려내지 않을까 싶군요.]
[오, 거기서 더 빨라질 정도면 볼만하겠네.]
두 사람이 떠들고 있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첫 구절,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별(수호자)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
...적어도 유지는 그런 아이다.
"후우."
내가 만들어야 할 고유 결계는 나와 유지의 동시 심상.
유지의 심상에 내 심상이 더해져야만 만들어낼 수 있는 고유 결계다.
[마스터, 슬슬...]
"응."
아직 구절을 완성하지 못했다.
지금 해본 건 테스트.
적당히 약한 상대한테 테스트해보려고 했던 것뿐이었다.
"서치."
렌과 함께 서치 마법을 발동하자 온 사방에 분홍빛 띠가 퍼져나간다.
침식 마력 특유의 끈적한 마력.
모든 마법 소녀들이 가지고 있었지만, 무시한다.
어차피 본체만 잡으면 끝날 일.
피오레를 찾기 위해 서치에 집중하는 사이 세르칸이 푸른 궁수로 변해 다가오는 마법 소녀들을 위협한다.
총성이 들려오지만, 가볍게 튕겨 나가는 모습.
진심으로 피오레에게 충성을 다한 누군가가 있는 걸까.
순간 엇나간 신경을 되돌리며 범위를 넓힌다.
내 마력이라면 미국 전체를 탐색할 수 있다.
그저 별에 부탁할 뿐이니까.
"...?"
하지만...
[마스터, 이건...]
"없어."
피오레가 없다.
미국 전체를 뒤져봐도 피오레가 없다.
잠시 생각한다.
가능성은 여러 개다.
1. 어느 던전에 들어갔을 가능성.
플레이어는 모두 자신의 각성 무기가 존재한다. 피오레가 아직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에 필요한 각성 무기를 가지러 갔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 경우 각성하지 않고 초월자를 찍었단 소린데... 마법 소녀가 이렇게 많으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2. 나라를 떠났다.
루루에게 큰 피해를 받아서 그냥 바로 나라를 떠났을 가능성.
이 경우, 타깃이 되는 나라는 한국이다.
마법 소녀들의 수준이 어중간한 것도 그 이유라면, 납득이 된다.
하지만... 과연 그건 어떨까.
루루도 제어 못 하는데 더한 마법 소녀들을 데리고 있을까?
3. 제3의 세력에게 합류해 이곳에서 벗어났다.
"...아?"
그 순간, 나는 서치에 걸리는 마력 중 어둠의 마력 뭉치들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동시에 빛의 마력 뭉치가 있다는 것도 깨닫는다.
이건... 설마?
"렌, 지금 빛의 마력과 어둠의 마력 세력이 이동하는 곳은?"
[흑마력 세력은 예전에 봤던 기계 요새로, 신성력 세력은 영원한 밤의 마법 소녀의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
완전히 잊고 있던 세력이 있었다.
3단계가 되면서 나타난 천족들과 마족들.
거기에 피오레가 합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