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2부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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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원룸.
침대 하나와 책걸상 한 세트,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책꽂이와 컴퓨터만이 있는 공간.
푸석푸석한 은발을 늘어뜨리면서도 잡티 하나 없을 정도로 말끔한 피부를 가진 연분홍빛 눈동자의 소녀가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 보이는 건 한국의 지도가 보이는 창과 전 세계의 지도가 보이는 창.
각양각색으로 물들어있는 한국 지도를 빤히 바라보던 소녀는 이내 수면용 의자에 그대로 기대며 축 늘어진다.
"관여 1도 못하니까 못 해먹겠어..."
생각보다 더딘 진행도.
마법소녀 클래스의 장수인 '스노우'가 가진 스킬 리스트를 한 번 살핀 소녀는 이내 한숨을 내쉬면서 어깨를 살살 돌린다.
"스노우, 사이네, 루리에, 파이렌, 유레하... 윈은 봉인했다는 소식이었는데, 스노우가 어떻게 처리하려나..."
그렇게 중얼거린 여성은 이내 한국 지도에서 시선을 거둬 세계 지도를 바라본다.
2단계가 되자마자 미국의 어떤 영토에서 강행한 전술이 시스템 메세지에 떠있는 모습.
스노우에게도 영향을 끼칠 전략을 보며, 소녀는 그저 턱을 괼 따름이었다.
"경로는 부산쪽... 부딪혀도 샤브린인가. 경로에 따라선 빌런 연합이랑 부딪힐 거 같네."
빌런 연합이나 샤브린이나 부산항에 내린 건 악수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하아아아... 권한을 더 얻으려면 스노우가 5~6성은 찍어야 되는데..."
아예 컴퓨터 앞에 엎드리면서 뒹굴거리기 시작하는 소녀. 이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안 그녀는 흐느적 거리면서 침대에 얼굴을 묻는다.
그렇게 알 수 없는 소녀의 하루가 조용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부산항에 도착한 함선들의 안.
그 함의 가장 안쪽 선실에 타고 있던 금발의 소녀는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녀복을 입은 채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잠시동안의 침묵.
배가 도착했으니 배에서 내리기 위해 시끌시끌해야할 함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저 기도하는 소녀의 머리 위에서부터 따스한 노란 빛만이 떨어지고 있을 뿐.
이내 기도가 끝난 건지 소녀에게 떨어지던 빛이 사라지고, 소녀가 천천히 눈을 뜨자 그녀의 눈동자에는 노란 빛깔의 하트 모양이 새겨져있었다.
"주님, 오늘도 일용할 신성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그렇게 말하는 소녀.
그녀가 선실을 나서자 함의 복도에는 이런저런 시체들이 가득한 노골적인 현장이 드러난다.
어떤 시체는 칼에 맞아 죽은 흔적이 있고, 어떤 시체는 총에 맞아 죽은 흔적이 있다.
심지어 어떤 시체는 팔을 덜렁이면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현재 복도에 있는 유일한 생명체인 소녀에게 다가서려고 하는 상황.
그 모습을 본 소녀는 그저 손에 십자가를 쥔 상태로 자애로운 미소를 보일 따름이었다.
"오늘도 한 명 갑니다!"
퍼억!
그렇게 웃으며 좀비의 머리를 터뜨리는 소녀. 놀랍게도 온갖 뇌수가 튄지 3초도 되지 않아 전부 그녀의 몸에서 사라지고, 소녀는 그저 흐흥~ 하면서 복도를 걸어다닐 따름이었다.
계속해서 일어나는 시체들의 머리를 터뜨리면서 다니는 소녀.
이내 그녀가 갑판 위로 나오자, 갑판 위에 있던 언데드들이 일제히 그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머나... 이렇게나 많은 신자들이 남았을 줄은... 당신들의 숭고한 희생에 감사합니다. 여러분. 전부 제가 성불시켜드릴게요."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양손을 한 번 마주치더니, 곧바로 온몸에 노란빛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얼마나 밝아지기 시작하는지, 지성이 없는 좀비들마저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릴 정도.
그리고...
퍼버버버버버벅!
학살은 시작됐다.
어느 한 병실.
아포칼립스 세계임에도 놀랍게도 멀쩡하게 살아남은 병원 건물의 안에 띠 띠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소녀가 누워있었다.
검고 긴 머리카락에 조그마한 몸.
영양 공급을 그렇게 제대로 받고 있진 못하는 건지, 조금 야위어보이는 몸.
그렇게 가만히 누워있는 소녀의 옆에서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있는 푸른 머리칼의 이질적인 여성.
원래 학생인듯, 교복을 입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걱정이라는 감정만이 그곳에 잡혀있었다.
"마스터..."
잠시 그녀의 손을 꼭 쥔 채로 있다가, 조심스럽게 가슴팍의 주머니에서 무언가 보석을 꺼내드는 여성.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마스터라 부른 여성의 위에서 마력으로 보석을 부숴 그녀에게 뿌리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은은하게 푸른 빛을 뿌리다가, 사라지는 보석 가루.
"모자라구만?"
그런 그녀에게 병실 밖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키잔, 병실에 마음대로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터입니다만."
"이거이거, 미류 아가씨. 아가씨한테만 소환주인 게 아니라고? 소환주가 사망하면 나도 곤란해. 알아보긴 해야 되잖나."
"됐습니다. 그보다 다른 악영령들은 어떻습니까."
"글쎄다. 난 악당들이 작당 모의하는 건 관심 없어서."
푸른 머리칼의 소녀, 미류가 말하자 키잔이라 불린 옛 동양 사무라이 모습의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모르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그러자 싸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미류.
"빌런 연합에 제가 그들을 빌려주었습니다만, 민간인들에게 너무 큰 피해를 줘서는 곤란합니다. 그들은 제물이예요. 마스터를 회복시킬 제물."
"이봐, 아가씨. 내가 어느 정도 협력하고 있지만, 그런 소릴 들으면서까지 도와줄 리가 없잖나. 게다가 빌런 연합 새끼들은 너무 수상쩍다고? 사람들을 갈아넣어 무한동력원을 만들어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말이 된다고 해도 우리 측에 넘겨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나?"
"그런 건 대안이 있을 때나 내세울 수 있는 거, 키잔도 알고 있겠죠."
"어차피 내가 보고 있어봐야 의미없단 거, 아가씨가 더 잘 알잖나."
"...키잔, 명령입니다."
"허참, 영웅 부려먹는 꼬라지가 영 아니구만. 난감하게스리. 아무튼 그 녀석들은 부산쪽으로 갔다."
"부산? 거기엔 주워먹을 것조차 없을 텐데요."
"나도 모르겠군. 왠 커다란 쇳덩이 3개가 물을 타고 도착했거든. 놀라운 기술력이야."
"쇳덩이...? 배가 도착했다는 건가...?"
키잔의 말에 얼굴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서는 소녀.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키잔이 주머니를 하나 휙하고 던졌고, 미류는 얼떨결에 그걸 받아들곤 주머니를 살짝 푼다.
주머니 가득 차있는 건, 예의 보석들.
그걸 잠시 보던 푸른 소녀가 한숨을 푹하고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키잔. 왜 무리하면서 일하곤 저한테 혼나려고 하는 겁니까?"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우연찮게 이것저것 주웠을 뿐이야."
"...하아, 그러시겠죠. 아무튼 그 쇳덩이는 중요할 지도 모릅니다. 같이 가죠."
"빌런 연합 녀석들이 이미 다 먹어 치웠을걸?"
"그건 모르는 일 아닙니까."
"뭐, 뜻대로 하게. 아가씨."
"..."
키잔의 대답에 답하지 않고 잠깐 병실을 바라보다가, 이내 슥하고 걸음을 옮기는 미류.
그 모습을 보던 사무라이는 하품을 하면서 그녀의 뒤를 따라갔고, 이내 병실에는 고요한 숨소리만이 울려퍼졌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힘들겠군."
"그래."
샤브린의 말에 나는 잠시 손에 잡혀있는 프리즘을 보며 망설인다.
원래 모습으로 돌려줄 수 없는데 깨웠다가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물론 지금은 영토전 중이 아니라서 샤브린이 전력으로 싸울 수 있으니 잡는 건 쉽겠지만...
"본인이 스스로 되돌아올 수 없다는 보장은 없지."
"만약에 현 상황에서 불가능하다면, 봉인이라도 다시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한 봉인은 1회용이다. 다시 봉인하려면 새로운 술식이 필요한데, 딱히 가진 건 없군. 난 마법사가 아니니까."
"그래..."
그렇다는 건 윈을 다시 불러내는 건 현재로선 무리수.
좀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그녀는 한동안 프리즘 안에 갇혀 있어야 할 모양이다.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그들의 제약이 약해지고, 세상은 더 강한 어둠으로 뒤덮일 것이다.
너희들은 스스로 정진하여 더 많은 힘을 얻어 탑에 도전할 준비를 해라.
그것이 너희들에게 내린 마지막 자비일지니.
이 세계는 이미 침략자들의 손에 떨어진 세계니 포기하도록.
마치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오는 목소리.
나는 본능적으로 그게 2단계가 돼 떨어진 공지사항이라는 걸 깨닫고 한숨을 내쉰다.
2단계는 어제 됐는데 왜 공지는 오늘 내리는 거야?
병맛 같이 돌아가는 시스템이다.
제약이 약해졌다는 건 초월자가 영토 확장이 가능해진 이야기일 거고, 더 강한 어둠은 몬스터 세력의 증대 이야기.
정진하라는 건 레벨업할 경험치나 더 챙기라는 소리고 탑에 도전할 준비를 하란 건, 3단계에 시련의 탑을 갈 수준은 맞추란 소리다.
자비나 떨어진 세계라는 건 잘 모르겠네.
"흠, 탑인가..."
"전생자였지."
"나는 굳이 따지자면 그저 차원을 넘어온 것뿐이다만, 그렇군. 어찌보면 '전생자'라는 것도 그리 틀리진 않아."
"?"
차원을 넘어왔어...?
새삼스럽게 괴물이라는 걸 깨닫게 만드는 샤브린의 발언에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우리 검은 기사께서는 별 감흥 없다는 얼굴로 공지사항에 대해 고민에 빠진 모습이다.
시련의 탑에 대한 정보를 가진 사람은 없으니까 부질없는 고민일 텐데... 역시?
"탑에 대해 아는 게 있는 거야?"
"없다. 내가 아는 탑은 마탑 정도군. 애초에 불필요하게 세로로만 길게 짓는 탑이라는 구조를 이해할 수 없군. 공격당하기 딱 좋을 텐데."
"..."
그건 유한한 땅의 길이 때문이 아닌가 싶지만, 굳이 태클걸진 않도록 하자.
아무튼 잠시 샤브린과 대화를 하고 있을 때즈음, 왠 드론 하나가 위잉하면서 우리 위를 날아다닌다.
딱히 무장을 하고 있진 않고, 그저 홀로그램 기기 하나를 들고 온 드론.
어쩐지 출처를 알 거 같은 그 모습에 내가 입을 열었다.
"현성."
[오, 기억하고 있어? 마음에 드는데!]
"...팬이라며."
[하하, 그렇지 뭐. 아무튼 그보다 전달할 게 있는데.]
"?"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대화를 지키려는 그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끼며 그가 띄우는 화면을 바라본다.
보이는 건 미국 국기를 단 3척의 배가 어느 항구에 도킹하는 모습.
다만 문제가 있다면...
"...시체?"
세 척의 배 전체에 시체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첫 번째 배에서는 그래도 금발의 수녀가 빛을 흩뿌리면서 배 위의 시체들을 전부 쓸어버리는 모습이 보였지만, 다른 배들 쪽에선 총을 쏘며 어거지로 갑판 위에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금발의 수녀는 어느새 활동하기 편해보이는 노란빛의 슈트를 입은 채 시체를 말 그대로 양학한다. 그러곤 갑판 정리가 끝나자마자 비행해서 옆 배로 이동해서 쓸어버리는 걸 반복.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
전부 좀비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거 설마 공기 감염 좀비 바이러스인가요.
[미국에서 역병을 풀러 왔더라고. 겸사겸사 마법소녀도. 다행인 건 물리면 감염된다는 정도?]
"...물리면?"
[그래서 옮을 걱정은 안해도 될 거 같아. 내가 문제 삼은 건 마법소녀. 지금 부산이 빌런 연합 소속인데, 알아?]
"아... 그러고 보니 빌런 연합에 가입하라면서 난리치던 녀석들이 있던 거 같군. 반쯤 죽여놓고 왔다만."
[그건 굉장한데. 전투계 초월자는 이래서 무섭다니까. 아무튼 마법소녀로 보이는 저 수녀가 빌런 연합에 넘어가면 골치 아플 거 같아서.]
"그건... 힘들어."
현성의 말에 나는 마법소녀들을 봐왔던 감상을 생각하며 말한다.
일단 절망의 마법소녀인 윈은 모르겠지만, 침식이 해제된 마법소녀들은 각자 개성이 어느 정도 있다곤 해도 전부 선 성향에 가까운 아이들이었다.
굳이 클래스로 따지자면 '히어로'에 속한 아이들.
파이렌이 말했던 '정령'이라는 걸 볼 때 나름대로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마법소녀가 되는 거라고, 나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럼 나는 왜 마법소녀냐고?
내가 아니라 유지가 순수했겠지.
아무튼 빌런 연합이라는 곳에 새로운 마법소녀가 들어갈 일은 어지간하면 없단 거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하면 그런 거겠지만.]
"너무 신뢰하는 건 어떨까 싶지만서도."
"굳이 우리에게 거짓을 고할 녀석은 아니잖나."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어. 어찌됐건, 마법소녀라는 클래스는 특성 상 빌런이랑 어울리기 어려운 아이들이야. 아마 알아서 거절하겠지."
[음... 그래? 알아서 따라가던데.]
"?"
그의 말과 함께 자연스럽게 영상이 추가로 재생되기 시작한다.
이어서 보이는 건 왠 남자들이 그녀에게 말을 거는 모습과 조금 대화를 나눈 뒤 그 사람들을 따라가는 모습.
딱 봐도 수상한 가면을 쓴 남자들인데도 그녀는 아무런 동요없이 그저 웃으면서 그들을 따라갈 따름이었다.
[추가로 따라가려 했는데, 갑자기 EMP 맞은 거 마냥 기기가 망가지더라고. 그래서 얻은 영상은 여기까지야.]
"..."
무슨 생각으로 따라가는 거야...?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 장면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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