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의 마법소녀-30화 (30/149)

〈 30화 〉 1챕터 종료

* * *

영토로 돌아오자 보이는 건 이미 각양각색의 술과 갖가지 음식을 가지고 파티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렌의 말을 듣자니 음식 자판기에 있는 여분으로 누적되있던 음식 제조 횟수가 전부 사라졌다는 모양이다.

오늘만 사세요, 여러분?

그런 말을 하고 싶지만 뭐, 다들 생각하면서 뽑았겠지.

...우리 영토민들이 그렇게 생각없진 않으리라고 믿는다.

[플레이어 후원금으로 포인트 여분이 있으니까, 자판기를 더 설치하면 됩니다.]

"그래...?"

렌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언제나 믿음직한 디바이스의 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곤 유린이와 함께 축제 현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나를 먼저 발견한 루시에르가 다가오는 모습.

뭔가 할 말이 있어보이는 모습에 내가 의아한 기색을 보이자, 방금까지 없었던 샤브린이 그 옆에 합류하고는 그대로 나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

"절망의 마법소녀? 라고 자칭했던 꼬마의 봉인체다."

"봉인체..."

초록색 프리즘과 그 안에 든 조그마한 고깃덩이.

자세히 보니 왠 촉수 괴물의 형상이 눈에 띈다.

모예요, 왜 마법소년데 촉수 괴물로 변했어요.

내가 상황 설명을 요구하듯 그녀를 바라보자, 옆에 있던 루시에르가 아, 그렇군. 하면서 수긍하더니 입을 열었다.

"네가 간 후에 갑자기 괴물로 변했어. 자세한 건 마법소녀들한테 물어보는 게 빠를 거야."

"결계에서 확인해보니 절망이라는 감정 자체가 마력으로 치환되는 모양이더군. 가두고 지켜보니 마력이 점점 더 강해지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절망의 마법소녀구나."

그 말에 문득 나는 위화감을 느낀다.

절망의 마법소녀라는 게 존재할 수 있나?

물론 감정과 관련된 마법소녀 자체는 나도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내가 이상하게 여긴 건 '절망'이라는 쪽.

나는 잠시 클리어했던 퀘스트 목록을 다시 살펴본다.

[마법소녀는 꿈과 희망을 줘야해!]

"이상한데."

"뭐가?"

"마법소녀 공용 퀘스트 이름. '마법소녀는 꿈과 희망을 줘야해!'야."

"그건, 확실히 이상하네."

루시에르의 질문에 답하자, 유린이도 그 의미를 깨달은 듯 고개를 갸웃한다.

대놓고 희망을 줘야한다고 선언된 마법소녀 클래스에 절망이라는 속성이 있다는 건 이상하다.

속성이 반전되기라도 한 걸까.

깨워서 알아봐야 알 수 있을지도.

"마법소녀 레이디들의 퀘스트명은 특이하군요. 저희한테 오는 건 평범하게 영토를 확장하라던가, 지식을 늘리라던가 그런 퀘스트 입니다만..."

"이 분이 퀘스트 구출 대상이야?"

"응."

"흠... 몸 상태가 엉망이군."

"하하하, 제가 학자라서요. 강인해보이는 기사님. 최근 방에 갇혀있다보니 몸 관리를 잘 못했네요."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는 마현의 말에 샤브린이 흠. 하면서 잠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그의 팔을 한 번 잡아보더니 말했다.

"전에는 배운 적 있는 모양이군. 손에 굳은살도 그렇고, 근육도 생각보단 남아있어."

"어릴 때는 기사가 꿈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죠. 책을 보면서 느낀 점입니다만..."

아쉬운 듯 그렇게 중얼거리는 마현에게 샤브린과 루시에르가 말을 걸기 시작하고, 유린이는 그걸 멀뚱히 보고 있다가 그대로 다른 곳으로 가려는지 슬며시 자리를 옮긴다.

그 모습에 이야기가 좀 길어지는 걸 보며 나 역시 몰래 빠져나갈 준비를 하자, 샤브린이 그 기색을 알았는지 휙. 하고 나에게 프리즘을 던져버린다.

"...위험하게."

"그 정도로 깨질 거였으면 봉인이라고 하지 않지. 알아보고 오도록."

"응."

"아, 레이디 가시는군요. 저는 조금 더 이야기하다가 가겠습니다."

"알겠어."

아무래도 중세 시대에 살았던 루시에르였던 만큼 서로 이야기가 통하는 건지, 이것저것 할 이야기가 많은 모양이다.

마법소녀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시선을 옮기자 보이는 건 유레하와 파이렌 정도.

파이렌은 조금 불편해하면서도 주민들의 말을 들으며 이야기 중이고, 유레하는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 작은 몸집으로 술병을 째로 들어 그대로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 모습이 포착된다.

...너 술 마셔도 되니?

너무 당연하다는 것처럼 마시는 유레하를 보며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와아~♥ 술을 마셨더니 마스터의 환영이 보여요♡! 역시 술은 최고예요!"

"환영 아냐."

"으응~? 주인님, 돌아오셨어요?"

"응."

"좋네요★ 아까부터~ 사람들이~ 야한 눈으로 봐서~"

그렇게까지 말하고 내 귀에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해버릴 거 같아요...♥"

"..."

뭘 한다는 거야 뭘.

내가 잠깐 그녀를 바라보자, 유레하는 키득거리더니 이내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기 시작한다.

이거 완전 아저씨네.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유레하가 하는 행색을 보며, 전형적인 중년 아저씨가 떠오르는 건 기분 탓일까.

"다른 마법소녀 애들은."

"으응~? 주인님, 갑자기 다른 여자 이야기라니, 그러면 아무하고도 못 사귄다구...☆"

"..."

"에이, 재미없게. 그렇네요~ 사이네는 요양 중이고, 루리에는 음식 들고 사이네한테 갔어요~ 평소 생활처? 라는 곳으로 간데요. 파이렌은~ 저깄네요?"

"요양...?"

"네~ 사이네 침식도가 70%가 넘었거든요☆ 지금쯤이면~ 침식됐을 지도?"

"...!"

유레하의 말에 나는 얼굴을 굳히며 곧바로 집으로 비행하기 시작한다.

뭘 가볍게 말하는 거야, 저 녀석.

침식이 완료됐을 때의 상황을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무 여유로운 발언이다.

...응? 나 혹시 낚인 건가.

내가 빨리 움직이도록 오히려 더 가볍게 말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집 앞에 툭. 하고 착지한다.

그런 거였으면 그런 식으로 질질 끌면서 말했을 리가 없지.

그냥 성격이 특이한 걸로 해두자.

"응? 아, 스노우 왔구나."

"왜 이제 오는 거냐고..."

"얘 좀 봐. 지금이라도 온 게 어디야?"

"쳇, 어쩔 수 없구만."

집 안으로 들어오자 얌전히 식사 중인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특이점은 사이네가 아직 변신을 풀지 못하고 보랏빛으로 물들어있는 모습이라는 점일까.

하지만 그래도 큰 지장까진 없는지 그저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식사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볍게 말할 정도로 일상 생활에 지장은 없는 수준이었던 모양이다.

"정화, 보석화."

보랏빛으로 여기저기 물든 사이네를 향해 정화를 발동하자, 루리에에게도 뭔가 있었는지 두 사람 모두에게서 보랏빛이 손으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한다.

확인해보니 루리에도 다리 한쪽이 보랏빛으로 물든 상황.

나없는 사이 피오레인가 뭔가하는 놈이 직접 오기라도 한 걸까?

"별 건 아냐. 절망의 마법소녀? 걔가 시작부터 침식키고 덤볐거든. 처음 보는 공격이 많아서 죽는줄."

"괴물로 변한 건 무서웠지... 하필 촉수 괴물이라 더 무서웠어."

"..."

소름돋았다는 것처럼 제스처를 취하는 루리에를 보며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인 후 침식 결정을 인벤토리에 집어넣는다.

두 사람 합쳐서 예전 루리에가 가지고 있던 침식 정도 크기의 보석이라니, 생각 이상으로 많이 당한 모양이다.

"상황 설명 좀 부탁해."

내가 간 후 일어난 일에 대해서 좀 알아봐야겠네.

­­­­

"성실하시군요, 레이디 스노우는."

"그러게, 축제 정도는 즐겨도 될 텐데."

유레하와 잠시 대화하다가 날아가는 스노우를 보며, 루시에르와 마현은 서로 끄덕이면서 그렇게 말한다.

샤브린에게 프리즘을 받고 축제 현장을 빠져나갔다는 건...

"혼자서 처리하든 정화하든 할 생각인 거겠죠."

"괜찮을 지 모르겠네. 그 괴물, 생각보다 강해보이긴 하던데... 뭐, 스노우는 희망이고, 그 괴물도 그렇게 보는 거 같으니까 오히려 스노우 앞에선 약해지려나."

"하하, 레이디 스노우가 생각보다 강한 모양이군요? 루시에르 경 같은 기사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마음이 강해요, 그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입가에 미소를 담는 루시에르. 그러자 마현이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바로 입을 열었다.

"그녀를 좋아하십니까?"

"음? 아뇨. 그저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저도 저런 시절이 있었구나... 하고."

"지금도 전성기로 보입니다만."

"아, 그건 좀 사정이 있어서요. 아무튼 제가 좋아하는 건 스노우가 아니라 샤브린이라서요. 다른 데 눈이 가진 않네요."

"샤브린 경입니까. 부부 싸움이라도 나면 고생하시겠군요."

"아하하... 그럴까요. 전 잘 모르겠는데."

좀 떨어진 곳에서 유린이와 대화중인 샤브린을 슬쩍 본 루시에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어쩐지 말하기 힘들다는 분위기를 바로 파악하며 미묘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마현. 그러자 주제를 바꿀 생각인지 마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흥미롭긴 하군요. 마법소녀 클래스는."

"다들 성격도 다르고, 능력도 다르죠. 공통점이라면 자연계라는 점이려나. 절망의 마법소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퀘스트 명에도 장난스러운 게 많이 붙은 모양이고요. 마치 만들어진 세계와는 동 떨어진 느낌입니다."

"만들어진 세계?"

"이상하게 여긴 적 없습니까, 루시에르 경? 아무리 서로 다른 차원 방벽을 뚫을 수 있는 수준의 괴물들이 넘치는 세계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마구잡이로 영토를 덮어쓰기 할 수 있을까요?"

"..."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애초에 이렇게 되도록 만들어진 세계'가 아닐까하고요."

"재밌는 관점이군요."

제법 흥미롭다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는 루시에르. 전생에 신에게 수호자로서의 힘을 받은 그로서는 썩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래도 관점 자체는 흥미로운 일이었다.

특히나 이 세계에 존재하는 신이 도대체 왜 세계가 침략당할 때까지 놔뒀는지에 대해선 그도 알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세계의 신은 침략자들에게 당한 게 아니라, 애초에 이런 세계였기 때문에 신이 방치한 게 되겠군요. 아니면 신 당사자가 일부러 끌여들였다던가."

"신이라... 신이 있다면 확실히 그렇겠네요. 목적 같은 것도 있을 테고."

"관리자라는 자들이 신일 수도..."

그렇게 그들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

이걸 어떻게 할까.

축제 분위기고 뭐고 잠시 식사만 마친 뒤 목포로 돌아온 나는 프리즘의 내용물을 보며 잠시 생각에 빠진다.

설명을 듣자하니 마법소녀 넷이서 싸웠는데, 침식당하는 것도 있고 스펙 때문에 계속 밀렸다는 모양이다.

특히 사이네가 마법소녀가 아니었으면 두 동강날 정도로 크게 한 입 물렸다는 소식은 좀 더 소름돋았다.

내가 이길 수 있을까?

냉정하게 마법소녀 넷이 동시에 덤빈다면 오래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자신이 있는데 말야.

"..."

역시 내가 좀 더 강해질 때까지는 그만둘까?

잠깐 고민하기 시작한다.

샤브린의 말대로라면 쉽게 봉인이 풀릴 수준은 아닌 모양이고.

게다가 이렇게 괴물로 변한 마법소녀는 또 처음 보는 녀석이라 정화한다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루리에의 말에 의하면 '몸이 터지면서 괴물이 됐다.'라고 했고.

다시 말해 인간 형태 자체가 껍데기였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한다는 거다.

"...몸이 터져나가는 건 고어네."

개인적으로 봤으면 평생 트라우마였을 거야.

아무튼 점점 생각이 프리즘을 깨워선 안 된다고 말리는 느낌이 들어 다시 인벤토리에 넣고 한숨을 내쉰다.

만약 정화가 되더라도 몸을 돌릴 수 없다면, 멘탈이 부숴지는 건 마찬가지.

적어도 내가 몸을 되돌려줄 무언가를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봉인을 푸는 건 악수다.

[그럼 샤브린을 데리고 와서 시도하는게 어떻습니까. 재차 봉인이 가능하도록 하는 거죠.]

"...그건 괜찮네. 그럼 축제가 끝난 후에."

한창 즐기고 있을 사람을 데려와서 도와달라고 할 순 없으니, 나중에 물어보도록 하는 게 좋겠다.

그럼 이 건은 여기서 끝.

다음은 생각해볼 건 마현에 대해서였다.

"마이는 전장에서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들었어."

[전장에 나서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녀가 도움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뭔가 걸리는 느낌이다.

정말로 그런 사유로 공격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공격할 수 없던 건지도 의문.

마현을 빼내달라고 해놓고 그냥 같이 돌아간 것도 이상한 일이고, 듣자하니 영웅인 그와 연인 같은 모습을 보였다는 평도 있었다.

물론 퀘스트까지 나왔는데 거짓말일 거라는 생각까진 아니고, 그냥 마현을 우리 진영으로 보낸 이유를 모르겠다는 정도?

라크헬름을 배신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는 게 내 평이다.

언제 다시 만나서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마스터.]

"응?"

[굳이 축제를 즐기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까? 괴물을 정화하는 건 축제가 끝난 뒤에 해도 되는 일,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이래서 눈치 빠른 꼬맹이들은...

[꼬맹이가 아닙니다.]

"...좀 꺼려져."

[꺼려진다면?]

"잘 생각해봐. 한창 즐기는데, 대대장이 와서 밥 먹고 있으면 이상하잖아."

[...군대 비유같은 게 마스터의 입에서 나오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만, 좀 비유가 틀리다고 봅니다.]

"틀려?"

엄청 정확한 비유라고 생각했는데, 렌에 입장에선 다른 모양이다.

렌이 대리 관리하고 있다지만 내가 영주고 최고 관리자인데, 이 비유가 맞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며 인벤토리에서 음료를 꺼내 마시는 순간이었다.

[대대장이 아니라 아이돌이 왔으니 오히려 열광하겠죠?]

"푸흡! 콜록콜록!"

별 생각없이 탄산을 마시다가 렌의 말에 체해서 콜록거리기 시작하는 나. 눈에 살짝 눈물이 핑하고 돌지만, 애써 진정시키고는 쉼호흡을 한다.

아이돌? 내가? 아이도오올?

"난 아이돌이 아냐."

[그럼요, 꿈과 희망을 주는 마법소녀죠.]

"..."

아니, 그런 건 창피하니까 그만둬...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영토에 있는 몬스터를 전부 쓸고, 누군가를 구하며, 사람들을 보호하는 수호자 역할.

세간에서는 이런 사람을 '영웅'이라고 하지만, 유지의 외모를 생각하면 '아이돌'이라고 불리기 손색없었으니까.

전투계 아이돌.

얼마나 멋있는 단어인가.

물론 그 대상자가 나인 게 문제지만.

"하아..."

그건 그거대로 부담스러우니까 역시 축제에는 안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얼굴은 비췄으니까 봐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영토민들과 이야기하고 소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잘 생각해보시길.]

"알겠어."

렌의 말에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나. 나 대신 영토 관리를 혼자 다 하고 있으니까, 그 정도는 해야겠지.

그래도 오늘 축제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내가 낄 자리는 아니니까, 다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하자.

[쓸데없이 고집이 세시네요.]

남이사.

어쨌든 이야기는 이걸로 끝.

생각보다 영토전이 싱거운 듯 싱겁지 않은 듯 끝났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큰 사건 하나가 끝났다고 볼 순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침대에 풀썩하고 누웠다가, 얼굴을 찌푸린다.

가슴 쓰려. 원피스로 다시 갈아입던가 해야지.

­­­­

"하, 어디갔나 했더니... 납치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군."

"죄송합니다."

"뭐, 어쩌겠나. 이런 물건이 있을 거라고는 나도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미채 망토를 들어올리는 라크헬름.

라크헬름의 모습이 가려졌다가 드러났다가 하는 걸 보며 아레트는 그저 쓰게 웃어보인다.

모습, 숨결, 기척까지 모두 차단하는 망토.

자신마저 눈 앞에서 벗을 때까지 그들이 그곳에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었으니, 다른 병사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마력은 숨겨지지 않지만 모든 감각을 속일 수 있는 망토라... 대단한 물건을 만들었어."

"2개나 있으니 더 있을 지도 모르겠네요."

"흐음... 초월자에도 종류가 있다 이건가. 제작 계열 초월자가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순간 섬뜩함을 느낀 건지, 라크헬름이 자신의 팔을 붙잡는다.

암살자 같은 녀석들한테 이런 망토가 넘어간다면?

아무리 강한 실력자라고 해도 이런 망토를 낀 잘 키운 암살자가 암살을 시도하면 죽어나갈 가능성이 높았다.

심지어 암살자가 아니여도 이 망토를 끼면 암살자 행세를 하며 죽일 수도 있겠지.

물론 스스로의 마력 완벽하게 제어하고 절제할 수 있는 사람으로 한정하지만... 그런 사람이 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섬뜩한 이야기라고, 라크헬름은 생각했다.

"흠... 왜 전투에서는 사용하지 않은 거지?"

전투에서 쓴다면 최고 효율을 볼 수 있는 망토.

물론 전력 차이 때문에 굳이 쓸 필요가 없었다곤 하지만, 라크헬름 본인이 등장했을 때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무기였다.

"마법소녀라서 그런 거겠죠."

"마법소녀인가."

"네, 영웅이시여. 알아본 바, 마법소녀라는 클래스는 사람들을 수호하고 지켜내는 것을 주력으로 하는 클래스라고 합니다. 이 세계의 NPC은 다들 그런 소릴 하더군요."

"흐음... 영웅이랑 다를 게 없지 않나."

"영웅과 비슷하지만 그들은 사랑, 희망, 정의같은 걸 평소에 말하면서 다닌다고 합니다."

"어린애 장난이군."

"그렇죠."

"어린애 장난이라도 저력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알고 있다. 초월자들이 스노우 녀석을 따르는 이유도 있을 테니."

그렇게 말하며 라크헬름은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에 빠진다.

그러자 목례로 인사하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아레트.

잠시 후.

라크헬름은 자신에게 안겨있는 마이를 보며 말했다.

"일단은... 판단을 보류하도록 하지. 어차피 영토는 많으니까. 거리도 멀고, 굳이 그곳을 칠 이유는 없으니까. 마현이 좀 걸린다만, 괜찮겠느냐?"

"...아마 멋대로 죽이거나 하진 않겠지요.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오늘은 너와 함께하고 싶은데, 괜찮겠느냐?"

"뜻대로 하시길."

"좋구나. 가자."

그렇게 말하며 라크헬름은 마이를 안아든 채로 홀을 나선다.

모두가 사라진 홀.

잠시 시간이 흐른 후에 아무도 남지않은 홀에서 갑작스럽게 어둠이 뭉쳐들기 시작한다.

"흐으음... 라크헬름도 칠 마음이 없어졌나요. 곤란해, 곤란해."

그림자로 이루어진 누군가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옥좌에 그대로 남아있는 미채 망토를 바라보며 슬며시 들어올리곤 다시 사라져버렸다.

­­­­

"동맹이니까 가도 되겠지? 괜찮겠지?"

"침착하세요, 도련님."

"네가 도련님 소리하는 건 오랜만이네."

빌딩 옥상.

평소의 진지한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잔뜩 흥분한 현성을 보며, 선예는 이마를 부여잡으며 인상을 찌푸린다.

동맹이 수락되어 직접 영토로 갈 수 있다는 흥분에 찬 모습은 좋지만, 아직 선결 과제가 남아있었다.

"일단 서울부터 점령하시죠. 서울을 점령해야 스노우한테 갈 수 있어요."

"이미 하고 있어. 다중 컨트롤 중이니까."

"건물까지 마구 부수고 있는 건 아니죠?"

"살아있는 건물은 냅두고 있어. 어차피 부숴진 건 다시 지어야하잖아."

"하아... 그래도 해야 할일은 잘 알고 있어서 다행이군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들고 있는 판을 살피는 선예. 그러자 현성이 씨익하고 웃으면서 바로 말을 이었다.

"괜찮아. 내가 실수한 적은 없잖아?"

"영토민들한테는 잘해주셔야 돼요."

"알아. 하루 이틀해?"

"흥분했을 때는 앞뒤 잘 안 가리시잖아요."

"크흠..."

선예의 말에 찔리는 게 많은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하는 현성. 그러자 그녀는 알겠다는 것처럼 고개만 한번 끄덕인 뒤, 열심히 판을 조작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빨리 점령해도 오늘 가는 건 그만두는 게 좋겠네요."

"왜!?"

"소리칠 일인가요. 지금 영토에서 파티 중이예요. 승전 파티는 그들끼리 하라고 해야죠."

"...나도 아군이었는데!"

"적으로 쳐들어가서 동맹이 된 거니 기각이죠."

"쓰으으읍..."

선예의 말에 아쉽다는 것처럼 침을 삼키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는 현성. 그리고는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열심히 판을 건드리던 그는 이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연다.

"뭐야 이건."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니..."

현성은 당황한 표정으로 허공에 홀로그램을 띄우기 시작한다.

나타난 화면은...

"배...?"

미국기를 단 함선들이 부산항에 착륙하고 있는 영상이었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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