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마법소녀는 항상 소녀여야 해!
* * *
"으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내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저녁 시간이었다.
묘하게 욱신거리는 복부의 감각에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일어나는 나. 그러자 파이렌이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와 말했다.
"스노우 님, 일어났어!?"
"파이렌... 안 자고 있었구나."
"나까지 자면 전부 무방비인걸!"
"그래... 착하다..."
전에 무방비로 전부 잠드는 상황을 만든 전적이 있는 나는 조금 찔림을 느끼며 그렇게 말한다.
...무슨 일 있으면 렌이 깨웠겠지!
스스로 그런 식으로 납득하다가 다시 느껴지는 복부의 통증에 살짝 얼굴을 찌푸린다.
"스노우 님?"
"아냐. 뭐 잘못 먹었나..."
"어... 복부가 아픈 거야?"
"그렇네."
"생리하는 건 아니고?"
"...응?"
파이렌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한 물음에 나는 멈칫하며 고개를 갸웃한다.
생리...는 가능성이 있는데.
생리는 꽤나 큰 통증을 유발한다고 들었긴 하지만, 각성자인 내가 통증을 느낄 정도면 제법 아픈 게 아닐까?
"아마 편의점에 생리대는 그대로 있을 거야! 내가 다녀올게!"
"응, 미안하지만 부탁해."
솔직히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이런 건 여자인 파이렌이 더 잘 알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잠시 슬쩍 원피스 속을 들여다본다.
당연히 속옷은 멀쩡했다.
생리면 피 같은 게 묻지 않나 싶긴 한데, 설령 묻었다고 하더라도 마법소녀 패시브가 그걸 없앴을 테니 남아있을 리가 없다.
...아니, 그럴 거면 생리같은 시스템도 없애주지 않을래.
그런 생각도 하지만 이 게임은 아포칼립스 세계관이니까, 주기같은 게 있긴 있어야 할지도.
"...테나는 어디갔데."
평소 같으면 나한테 점프해서 얼굴이나 부비고 있을 고양이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 내가 제법 오래 잠들어 있었으니까, 심심해서 여기저기 돌아 다니고 있는 거겠지.
동물한테 그리 위험한 곳은 아닐 테니까, 여기.
[몸 상태가 나빠보이는군요.]
"그러게... 내일 싸워야 하는데."
[마스터의 생각대로만 된다면 문제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내 생각대로의 전개가 된다면, 딱히 내가 제대로 싸울 일조차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점령전의 패배 조건은 '내가 쓰러지는 것'일 확률이 높으니까.
실력에 대한 자만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물리적으로 나를 잡아먹는 게 불가능하다.
물론 안 걸렸을 때 이야기긴 한데.
"공격 측에 너무 유리해지니까, 설령 중계를 한다고 해도 내 위치를 중계하진 않을 거야. 그렇게까지 하면 2단계에서 영주가 버티는 건 무리일 테니까. 아마 방송 채널 같은 걸로 중계해서 실시간으로 전쟁에 참가중인 사람은 중계를 볼 수 없게 하겠지."
[그렇죠. 그래야만 작전이 의미가 있으니까요.]
"스타트와 종료 조건만 내 생각대로 됐으면 좋겠네."
내 생각과 다른 전개라면 어쩔 수 없이 싸워야겠지만...
뭐, 그대로의 전개라도 상대측에서 눈치챈다면 귀찮은 상황이 연출될 테니 어떻게 보면 도박수다.
"결국 영토전이라는게, 몬스터 없이 순수하게 플레이어들만으로 이뤄지는 거잖아."
[현 시점에선 초월자와 초월자의 하수인을 제외하고 마스터와 동급인 사람은 거의 없을겁니다.]
"거의..."
[이레귤러는 한곳에서만 태어나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네."
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게임 설정을 굳이 따진다면 다른 게임을 하다가 넘어온 사람들이 제법 있는 게임이다.
선두 주자가 있는 이상 내가 가장 강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선두 주자들에 의해 키워진 사람도 있을 거고, 나와 비슷하거나 더 강한 무언가를 얻고 강해진 사람도 있을 테니까.
...내가 들고 있는 것보다 더 강한 능력이라니, 상상하기도 싫지만.
ㅡ그러니까 아예 전장에 나서지 않는다.
겁쟁이라고 불려도 할 말 없다.
전투가 시작되고 내가 할 일은 죽지 않는 것뿐이니까.
그게 다른 사람들이 죽는 길로 연결된다고 하더라도.
"가져왔어! 박스째로 있었어!"
별 어려움없이 상자를 든 채로 느릿느릿하게 비행해서 내 앞으로 도착하는 파이렌.
그녀가 곧바로 생리대를 꺼내서 나에게 주고, 나는 순간적으로 이걸 어떻게 쓰지...? 하면서 잠깐 생리대를 바라본다.
...써본 적이 있어야 알지.
"난 잠깐 옆집에서 밥 좀 해올테니까, 그 사이 붙이고 있어!"
"...응."
파이렌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나. 당연히 내가 할 줄 알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니, 유지 나이가 중~고등학생 사이일 거라고 생각하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정상이지.
모르는 내가 이상한 거다.
...남자가 알고 있으면 그건 그거대로 변태같은데.
보통은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낼 수 있지만, 지금 내 위치는 목포라 인터넷도 터지지 않는다.
날개형이라고 적힌 생리대를 뜯자 뭔가 알 수 없는 기저귀? 같은 게 튀어나온다.
그래서 이걸 어쩌란 거야.
잠시 기저귀를 이리저리 만져보자 아랫부분에 스티커같은 부분이 있는 걸 발견.
그러고 보니 파이렌이 붙이라고 했지. 팬티에 붙이는 건가?
밖이라는 생각에 좀 껄끄러웠지만, 이내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하면서 자연스럽게 팬티에 붙인후 올리려다가, 뭔가 허벅지에 닿는 느낌에 원피스를 들어 상태를 확인한다.
날개? 라고 하는 부분이 거슬린다.
날개니까 그냥 접어서 쓰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해서 접어서 팬티 바깥쪽에 놓아도 이상한데.
...잘 살펴보니 자체에 넣는 부분이 있었다.
냐옹? (뭐하냐옹?)
"햑."
그렇게 원피스를 올린 채로 낑낑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들려온 고양이 소리에 나는 순간 흠칫 하다가 찌릿하고 테나를 바라본다.
놀랬잖아.
익숙하지 않은 행동을 하던 중에 들킨 탓인지 제법 부끄러웠지만, 이내 다시 원상복귀를 시킨 후 소파에 안착.
느낌이 익숙하지 않다.
당연한 일이지만.
"너희는 옷 안 입어도 되서 좋겠네."
냐옹? (그게 뭐냐옹?)
"...아무것도 아냐."
고양이한테 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아무튼 딱히 생리대를 쓴다고 통증이 가시는 건 아닌 모양인지, 복부는 계속 욱씬거리는 느낌이다.
...생각해보니까 마법소녀 패시브가 있어서 생리대는 필요하지 않은게?
그런 생각도 문득 들지만 그때그때 흘러내리다가 사라지고 같은 느낌일 테니, 외관상으로 보기 안 좋겠지.
...절대로 자괴감이 들어서 하고 있는 소리는 아니다.
"스노우 님! 나왔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뭔가 찌개류로 보이는 걸 들고 오는 파이렌. 생긴 건 서양 사람처럼 생겼는데, 의외로 찌개를 좋아하는 구나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국물 있는 걸 좋아해?"
"그냥 편의점에 있는 걸로 가져왔어!"
"그렇구나. 덧붙여서 파이렌은 매운 거 잘 먹어?"
"? 안 먹어서 몰라."
"그래."
그럼 좀 많이 먹기 힘들 텐데.
말릴까 생각해보지만, 어차피 한국에서 맵지 않은 음식은 없다.
지금 기회에 한 번 경험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생리 중에 매운 음식을 먹어도 되던가?"
잠깐 생각해보지만 내가 아는 게 있어야지.
어차피 몸의 원주인도 한국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매운 음식 경험은 많을 터다.
생리라고 한국에서 맵고 짠 걸 안 먹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자주 먹었겠지. 괜찮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그녀가 가져온 숫가락을 든다.
"근데 태반이나 그런 건 없었어?"
"태반? 뭔가 밀폐 용기인 건 다 가져왔으니까 있지 않을까..."
밥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묻자, 옆에 있는 조그마한 백팩을 뒤지기 시작하는 파이렌. 그 작은 백팩에 손이 쑥하고 들어가는 걸 보며, 나는 보이는 것과 물건이 다른 거라는 점을 깨닫는다.
"아공간 주머니?"
"응, 있으면 편해."
아니, 보통 각성자는 인벤토리 있잖아.
그런 생각도 들지만 생각해보면 인벤토리 칸도 제한되어 있으니, 저것도 나쁘진 않아보인다.
좀 큰 걸 넣으면 8칸 이상 먹기 일쑤인데, 인벤토리는 64칸밖에 안 되니까.
"태...반... 아, 이게 태반이라는 글자였지."
한참 뒤적이다가 쏙하고 태반을 꺼내드는 파이렌. 생각해보니 얘는 대체 왜 한국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외국에서 침투? 같은 느낌으로 온 거 같은데... 뭐, 본인도 기억이 없을 텐데 물어봐도 답이 나오진 않겠지.
"잘 먹겠습니다."
어째서인지 살짝 그을린 숟가락을 물의 마력으로 전부 닦아낸 뒤 식사를 시작하는 나. 생각해보면 아포칼립스가 된 이후로는 진짜 거의 대부분 라면으로 떼운 기억이 있다.
심지어 라면도 매운게 아니라 짠 쪽.
밥을 먹는 건 오랜만이네.
그런 생각을 하며 찌개를 먹으려고 할 때였다.
"아파아아아!? 물! 무우울!"
"...엄청 예상대로의 반응이다."
불을 다루니까 혹시나 잘 먹을까 싶기도 했는데, 역시나는 역시나였다.
한 입 먹자마자 허둥거리는 그녀를 보며 물의 마력으로 구체를 작게 만들어내자, 그대로 그걸 한번에 삼켜버리는 파이렌. 그러다가 얼얼함이 가시지 않았는지, 강아지가 체온 조절하듯 혓바닥을 내민 채로 헥헥 거리기 시작한다.
그런 그녀의 혀에 다시 물을 만들어내자, 그제야 조금 나아진 표정을 짓는 파이렌.
아, 이건 좀 글렀...
"그데 마시서."
"..."
먹죽의 전형적인 대사를 치고 있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쓰게 웃고는 우유를 찾아보라고 말한다.
그러자 1.2L짜리 우유를 땅. 하고 테이블에 꺼내드는 파이렌. 그리고 그녀의 매워! 맛있어! 쇼를 보며 나는 피식 웃고는 한 숟갈을 떠서 살짝 식힌 후 먹어본다.
"@!#%^$"
그러자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매운 감각이 느껴지며, 급하게 우유를 가져와 벌컥벌컥 마시는 나.
저기요...? 유지님...?
빙의 전 나는 매운 걸 엄청 잘 먹는 타입이었는데, 지금 찌개 한 숟갈을 먹었다고 식은땀까지 삐질 흘리기 시작한다.
이건 그거다.
파이렌과 마찬가지로 유지는 매운 걸 아예 먹은 적이 없다는 의미다.
우와, 이건 진짜 에반데.
찌개의 색을 볼 때 오히려 한국인이 먹기엔 좀 밋밋한 수준의 매운맛일 텐데, 칼칼한 수준을 넘어 머리에 열이 뻗치고 뇌가 얼얼할 정도의 감각이 쭉하고 올라온다.
잠시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하고 누르다가, 이내 복부의 통증이 조금 더 강해진 걸 느끼고 인상을 찌푸리는 나.
집에 짠 라면만 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나는 생긴 그대로 외국인인 모양이다.
"매운 건... 안 되겠어."
"마, 맛있는데..."
"생리 중에 매운 거 먹으면 안 된다고 해."
"아, 그런 거구나!"
"응, 태반이 있으면... 혹시 스팬도 있어?"
"스팬? 여기!"
내가 말한 햄이 영어여서 그런지, 이번엔 곧바로 찾아내서 나에게 건네는 파이렌. 통조림이 아닌 팩의 형태를 띈 스팬을 보며 잠깐 의아해하다가 이내 뜯어서 꺼낸 후 곧바로 불의 마력을 일으켜 천천히 구워나가기 시작한다.
그 행동에 파이렌은 찌개를 계속해서 먹다가 신기해보였는지 따라하는 모습.
...굳이 그럴 거 없을 텐데.
"근데 이게 뭐야?"
"팬이 없어서 따로 굽는 거."
"흠흠, 햄은 맛있긴 하지."
그렇게 한창 굽다가 어느 정도 구워진 걸 확인한 후 밥 위에 얹어서 먹기 시작하는 나.
그러자 파이렌도 따라서 똑같이 행동했지만, 약간 탄 부분이 있는지 표정이 미묘해진다.
...그냥 나한테 해달라하지. 스팬 아깝게.
"찌개? 랑 같이 먹으니까 더 맛있어!"
"...그러니."
아까 전부터 매워서 찌개 우유 밥을 반복하는 애치고는 제법 준수한 말이다.
나보다 한국인화가 빠르게 될 거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가볍게 식사를 마쳤다.
늦은 밤.
수면이 필요없다면서 찡얼대던 파이렌이 곤히 잠든 걸 보며, 나는 건물 자체에 실드류 마법을 영창해놓고 변신해 하늘을 날아오른다.
밥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뭔가 오류인 줄 알았지만, 역시 하루가 지나가도 퀘스트가 깨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퀘스트 클리어에 필요한 인원이 100/101에서 멈춰있다.
처음 인원에서 한 명이 늘어난 상황.
즉, 다시 말해 처음 전멸시킨 파티가 전멸하기도 전에 누군가 목포시에 추가로 침략했단 의미가 된다.
퀘스트는 침략자를 전멸시키는 것.
아직, 한 명의 침략자가 목포에 남아있다.
"슬슬 나와."
파이렌과 싸운 흔적이 넘치는 숲 중앙 공터.
내가 뻥 뚫린 곳에서 허공에 뜬 채로 말하자, 숲에서는 검은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무희 복장을 입은 소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침략자라고 하기엔 나에게 가진 적대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존경과 경외감이 느껴질 뿐.
"넌 누구야."
"..."
내 물음에 답하지 않고 한 손에 짧은 단검을 만들어내는 소녀.
분명 적대적인 모습인데도 그다지 위기감이 들지 않는다.
소녀는 명백하게 나를 공격하려는 생각이 없다.
그렇다면 왜 시늉을 하고 있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나는 렌에게 중얼거렸다.
"스캔 부탁해."
[알겠습니다.]
내 말을 듣고 곧바로 반응해 희미한 마력을 사방으로 팟. 하고 뿌리는 렌.
소녀는 그 마력을 느끼지 못한 건지 천천히 나에게로 달려오기 시작했고, 나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스타더스트 스트라이크!"
예고없는 폭격.
손가락을 쭈욱 내리긋자, 소녀의 뒤편에 있는 숲이 한 번에 초토화되며, 동시에 검은 소녀는 달려오던 걸 멈추고 힐끗 하고 뒷편 숲을 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는다.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나 얘를 죽여야한다는 건데.
"그래서 넌 누구야."
"...월영의 마법소녀, 마이입니다."
침식당하지 않은 또다른 마법소녀의 등장이었다.
* * *